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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믿으라! (2020년 8월 9일 주일낮설교)

나를 믿으라!

8. 9, 2020

本文:요한복음14:1-6

說敎:崔仁根牧師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관할권 내에서 틱톡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백악관은 6(현지시간) 성명을 내고 "미국의 국가안보를 보호하기 위해 틱톡 소유주에 적극적인 조처를 하기로 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틱톡이 중국 공산당의 허위조작 캠페인에 이용될 수 있다"면서 "틱톡의 안보 위협에 대응해 45일 내로 미국 관할권 내에서 틱톡 모회사 바이트댄스와의 모든 거래를 금지한다."고 밝혔다. 틱톡은 중국 스타트업 바이트댄스가 20175월 글로벌 서비스를 시작한 소셜미디어(SNS). 월간 순 이용자 수(MAU) 8억 명에 달하는 등 전 세계 10대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틱톡이 문제가 된 것은 최근 애플의 운영체제(OS)가 새로 업데이트된 뒤 스마트폰 사용자 몰래 정보를 훔쳐보는 기능이 발각됐기 때문이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915일까지 MS 등 미국 기업에 매각하지 않으면, 틱톡 사용을 금지하겠다고 경고해 왔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거래에 따른 수익금 중 상당수를 중개 수수료로 지불하라고 주장하고 있다.](머니투데이 7일자에서 발췌)

관계는 신뢰로부터 유지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뢰가 깨지면 관계도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국제관계는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일단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국경도 폐쇄되고 서로 오고가는 길이 막혀버렸습니다. 한 나라와 같이 오고가던 캐나다 국경도 폐쇄된 지 벌써 수개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옹기종기 얽혀 공부하며 뛰어놀던 학교도 폐쇄된 지 반년이 지나가고 있으나 가을학기 또한 개학이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 이정도이고 보니 모든 관계가 다 깨지고 있는 것입니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국제관계가 절단이 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사랑도 없고 사랑이 없으면 모든 관계는 모래알처럼 무너져내기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처럼 절박한 때에 우리 주님께서 가장 짧으면서고 가장 강력한 명령 하나를 남겨 두셨습니다. “나를 믿으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은 도대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면서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길라잡이로 삼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될 줄로 믿으라!

(벧전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는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변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 말씀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곧 그 말씀이십니다.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말씀이 되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변함이 없으시고 영원까지 이르며 그 말씀은 기록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도 않고 듣지도 않을뿐더러 그 말씀을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그들을 우리는 불신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8월 두 번째 주일예배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은 과연 어떻습니까? 과연 믿음이 있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객관적 증거가 하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에 근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을 근심하게 하는 요인은 수 천, 수 만 가지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모든 근심을 그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근심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그것이 오늘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단 한 마디로 예외 없이 다 그대로 됩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실례를 하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들의 구세주로 임마누엘 예수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처녀가 잉태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처녀라는 말은 남자를 모르는 여인을 말합니다. 남자도 모르고 남자도 없이 아이가 태어날 것이란 말씀입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이 어떻게 이 땅에 태어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100%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직까지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도 있어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기선이 없이 방안에 불이 환하게 켜진다는 것보다 더 황당하고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말씀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매주 예배 시간마다 사도신경으로 이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이렇게도 황당한 사실을 매 주일마다 그것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고백할 수가 있습니까? 성경에 그렇게 예언 되고 또한 예언된 그대로 이루어져서 기록으로 남겨져 역사적인 사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18-25)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나를 믿으라!”고 명하심은 곧 내가 한 모든 말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집대성 되어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이 모든 말씀부터 그대로 될 줄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수천 년이 지나도 그 약속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남녀가 만나 오랫동안 교제를 하면서 살펴본 결과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좋고 잘 어울려 서로가 함께 영원히 살자고 결혼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집안의 축복 속에 약혼을 하고 결혼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추운 겨울 어느 날 두 남녀는 데이트를 하다가 날씨가 너무 추워서 따뜻해 보이는 일본식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마주 앉아 몸을 녹이며 주문을 하는데 여자 쪽에서 대각선으로 저만치 않아 있던 중년신사가 자꾸만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매우 불쾌하였습니다. 웬 낯선 남자가 노골적으로 자기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약혼자가 화장실에 가자 그 남자는 일어나서 카운터로 가면서 그 여자 뒤쪽에서 말을 하며 지나갔습니다. “일곱 살 난 아이를 죽인 놈이 예쁜 여자는 만나서 데이트를 하는구먼!”하고 말입니다. 여자는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듯 혼란스러웠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벌써 그 사람은 가고 없었습니다. 카운터에 가서 방금 떠난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요 뒤쪽 대학병원의 의사요 교수로 우리 식당의 단골손님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세요?” 그때 화장실에 갔던 약혼자가 나와서 더 이상의 대화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말자 인터넷을 뒤졌습니다. 그 병원의 모든 의사들의 프로필을 다 살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혈액암(백혈병) 전문의였습니다. 그 의사의 모든 차트와 기록들을 밤을 세워가며 서칭하던 그녀는 깜짝 놀랄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7살 여아가 백혈병에 걸려 골수이식 외에는 살 길이 없었는데 다행히도 골수를 기증하겠다는 사람이 6명이나 나타나 그 중에서 가장 모든 것이 잘 매취가 되는 한 분을 선정하였습니다. 행여나 도중에 기증을 포기하겠다고 하면 난처해지니까 최종 기증 때까지 5-6번을 확인하는데 마지막 확인은 이식 3일 전에 한다고 합니다. 그때는 환자나 기증자나 다 병원에 입원해서 이식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밟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환자는 암에 걸린 골수를 이 3일 동안에 100%죽이게 되는데 바로 이때 기증자가 기증을 포기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환자는 이미 골수를 죽이는 작업에 들어갔기 때문에 기증을 못 받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사가 기증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하였으나 끝내 기증자가 거절하는 바람에 7살짜리 여자아이는 의사의 눈앞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증 약속을 끝끝내 어기고 아이를 죽게 만들었던 장본인이 바로 자신의 약혼자였던 것입니다. 충격을 받은 그 여인은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한 약속도 어긴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무슨 약속인들 지키겠느냐는 불신감에 결국 그 남자와의 결혼도 취소하고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사라진 사랑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으로부터 모든 관계회복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안을 주실 줄 믿으라!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두 말씀은 우리 예수님께서 그 얼마나 우리들을 사랑하시는지를 단방에 알 수 있는 가슴이 뭉클한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험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숱하게도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근심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위로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참으로 인생은 외롭고 힘든 외길인 것입니다. 문득 이 말씀을 준비하는데 20살 때 혼자서 학교와 생활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도 어렵고 힘들어서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그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없는 적막한 현실 앞에서 오직 찾아갈 곳은 하나님밖에 없으니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습니다. 눈물로 기도하고 답답한 마음에 눈을 들고 강대상 위를 쳐다보는데 눈물에 젖어 희미해진 눈에 십자가가 보이고 그곳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그러니 너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거라! 내가 영원히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입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평안이 무엇인지 느꼈습니다. 그렇게도 답답하고 불투명하고 혼란스럽던 마음이 갑자기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보이는 것처럼 시원하게 뚫리고 뭔가 다 해결된 것만 같은 평안이 가슴을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켜주시고 단 한 번도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체험이라는 말만은 공감합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온 가슴으로 만나본 성도라면 오늘 주시는 우리 주님의 이 말씀에 절대 공감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힘든 세상에서 지치고 병들고 외롭고 답답한 우리들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조용히 부르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힘든 너에게 평안을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 누가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주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평안을 기대합니까? 바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믿음이 있는 신자만이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금 명령하십니다. “나를 믿으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찬송가 474(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찬송을 쓴 사람은 H. I. Gilmore라는 성도입니다. 그는 16살 때 선원이 되어 대양을 건너는 항해를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그 배가 미국에 입항하자 그 길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페인트공으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남북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그 전쟁에서 그는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많이 겪었습니다. 전쟁 후 그는 치과의사가 되어 뉴저지에서 치과병원을 개업하고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었음을 깨닫고 교회를 세우고 주일학교 교사와 찬양대를 섬기면서 헌신적인 신앙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렸습니다. 16살부터 겪어왔던 고달픈 생활과 위험과 죽음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바로 주님의 지키심과 인도하심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는 지나온 삶의 경험을 종합하여 고백처럼 이 찬송시를 써내려갔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참 기쁘고 즐겁구나

그 은혜를 영원히 누리겠네 곧 평안이 쉬리로다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영원한 안식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부르시고 부탁하시고 계십니다. “나를 믿으라!”고 말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천국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으라!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을 받아야 하는 최종 목적은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 다니면서 이와 같은 진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는 성도들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교회에는 다녀도 삶의 가치관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채 어쩌면 그들보다 더 세상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 모두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잘 살고 더 잘 되고 더 잘난 자식들 키우며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으뜸이 되고 군림을 하고 남보다 더 누리는 그런 삶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말씀 앞에서 아니요!”하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은 온 몸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돈도 권세도 출세도 바이러스 하나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목표는 세상의 가치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숨을 쉬어도 주님을 위하여, 건강하여도 선한 일을 하기 위하여, 돈을 벌어도 이웃을 섬기고 돕기 위한 목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도 하고 부자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을 성공케 하시고 부자가 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습니까? 다윗이 어떻게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될 수 있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어떻게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하는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까? 한결 같이 그들을 그들 되게 하신 분은 하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어떻게 거부가 되었습니까? 한결 같이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거부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스스로 성공하고 스스로 부자가 되려고 하니 성공도, 재물도 자신의 삶을 지켜주지 못한 채 재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삶을 친히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26:12-13)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라는 말씀과 같이 부귀영화는 우리들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믿음의 바른 가치관으로 성공도 하고 재물도 얻어서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며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천국을 상속 받을 신자답게 그 하늘나라에 목표를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면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천국에서만 맛보는 것이 아니랴 천국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므로 이 땅에서도 천국과 같은 기쁨과 평안을 누려야 제대로 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위대하게 산 산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바로 J.C. Penny가 그 주인공입니다.

J.C.페니는 미국의 부호로 이름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1929년 미국 증권시장 파동 때 실수로 인해 많은 재산을 날리고 고민하던 중 불면증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나중에는 대상포진이란 육체적인 병까지 생겨 통증으로 고생을 하며 밤만 되면 죽음의 불안과 공포에 떨며 진정제나 수면제를 복용하고도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고통과 불안에 떨고 있던 페니에게 병원 예배실로부터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성경을 봉독하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에게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페니는 당시를 회상하며 고백하기를 그것은 다만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찬송과 성경 말씀과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캄캄한 굴속에 서서히 햇빛이 비치더니 나중에는 온 굴 속이 밝아져 마치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인생의 새 출발을 하며 예수님의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자기의 사업과 생활의 표어로 삼았습니다. 실제로 그가 재기한 후 맨 처음 교회에 많은 헌금을 바쳐 드렸습니다. 그리고 플로리다에 은퇴 목사를 위해 주택 백동을 건축해서 헌납하면서 어떻게 하면 많은 것을 많은 사람에게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감사하는 생활 속에 넘치는 복이 있음을 알았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천국을 소유한 담대함과 믿음으로 우리 그렇게 살아가라고 생명을 바쳐 희생해 주신 예수님을 똑바로 믿고 전하면서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 길은 오직 하나 예수님을 제대로 잘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오늘도 강력하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나를 믿으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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