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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2020년 8월 16일 주일낮설교)

나를 따르라!

8. 16, 2020

本文:요한복음12:20-26

說敎:崔仁根牧師

 

[백선엽 장군이 710일 오후 114분께 향년 100세 나이에 별세했다. 그는 6·25 한국 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영웅으로 여겨졌으나 친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11일 육군 등에 따르면 백 장군은 1920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났다.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에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군에 입대했는데 국군 제5연대장과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거쳐 6·25 전쟁 때 1사단장을 지냈다. 1960년 예편 전까지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 대표, 합참의장 등을 지냈다. 19605월 대장 전역 뒤 주중 한국대사와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교통부 장관 시절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을 맡았다. 백 장관은 6·25전쟁 중 낙동강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낙동강 다부동 전투는 백 장군이 꼽은 가장 치열했던 전투다. 1950년 여름 1사단장으로 당시 전투를 이끈 그는 당시 도망치는 장병들을 모아놓고 "내가 앞장서 싸우겠다. 나를 따르라, 만약 내가 후퇴하면 나를 먼저 쏘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두 달 가까이 부하 장병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고, 전투 현장은 그야말로 생지옥과 같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951년에는 동부 전선을 지키는 등 주요 전투를 지휘했다. 이를 바탕으로 백 장군은 19531월 한국군 최초로 4성 장군에 올랐다. 당시 나이 33. 한편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이 별세한 백선엽 장군(예비역 육군 대장)에 대해 진심으로 그리워질 영웅이자 국가의 보물이라고 애도했다.](아주경제 712일자에서 발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우리 예수님의 명령 하나를 듣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병사는 지휘관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도 지휘관이 명령하면 병사는 무조건 따르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 군인의 상식입니다. 군대에 갔다 온 남자라면, 그 누구도 이 말에 공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 명령 앞에서는 과연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요?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이 예수님의 이와 같은 명령이 있는지 조차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명령을 가슴으로 받고 순종하고 따랐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고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1:16-20)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시큰둥하거나 거절하고 자기들이 평생 해 왔던 대로 물고기나 잡았으면 지금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우리들처럼 먹고사는데 시달리다가 수명이 다 하여 죽었으며 그들의 삶을 이 세상에서 아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현실을 가슴으로 인식하며 지금도 우리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나를 따르라!”는 우리 주님의 이 명령은 21세기에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함께 공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듣고 깨닫고 결단하는 놀라운 은혜가 풍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섬기라는 뜻입니다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우리는 죽는 날까지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요 인생의 길라잡이 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도 죄로 인해 영원히 죽어야 마땅한 우리 죄인들을 말입니다.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먼저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도 그 사랑을 배워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요일4:9-11)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섬기심은 바로 이 사랑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긴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생명을 내어놓고 섬기신 것과 같이 우리들도 그와 같은 우리 주님을 생명을 내어놓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에다 비유하셨습니다.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렇듯 우리 성도들이 죽기까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예수님을 섬기면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객관적인 증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제자로서의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이웃을 섬기면서 예수님의 길을 따라 열매를 맺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을 따라 겸손하게 섬기는 삶이 몸에 배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은 사람, 큰 사람, 대접받는 사람, 권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려 하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죄인 된 우리를 대신해 가장 추악한 죄인만이 지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본받으려 노력해 온, 그리고 현재나 앞으로도 예수님께 본받고 싶은 점은 바로 이 '낮아짐'의 도()입니다. 낮아진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높아지려는 사람이 대부분인 이때, 예수의 "너희도 가서 남의 발을 씻기라"는 말씀은 언제나 내 생활 가운데 있습니다. 섬기는 삶, 낮아짐의 도,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는 제자가 배워야 할 가장 기본적인 도리일 것입니다.](임택진목사님의 글에서)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도 가지라는 뜻입니다

(21:18-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는 앞서 성경의 인용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평생 물고기를 잡고 사는 어부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부모님과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러했던 그도 사람인지라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악당들이 무서워 제자의 길을 버리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물고기를 잡고 사는 평범한 어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그를 다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물고기 대신 사람을 낚는 복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나도 놀랍고 무서운 명령을 주셨습니다. 다시 베드로를 향해 나를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방금 함께 읽은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명령,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곧 나를 위해 순교의 제물이 되라는 뜻입니다.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말씀은 곧 순교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한 가지 알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순교는 죽어야 하는 것이고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남이 나에게 띠를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고통과 죽음의 길로 이끌고 가는 것이기에 무섭고 두려운 말이지만 순교할 수만 있다면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 최고의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요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순교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도와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축복을 지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라!”고 명령하시면서 말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 주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거룩한 순교의 기회를 맞았고 감히 주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릴 수 없다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참으로 역사에 남은 위대한 베드로의 삶이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고 주기철목사님은 순교자의 대명사처럼 위대하신 목사님이십니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역하고 대항하며 목숨을 걸고 복음을 지킨 최고의 목사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에게는 연로하신 어머님이 계셨고 아들 넷을 낳고 이 세상을 떠난 사모님을 대신하여 처녀의 몸으로 자신에게 시집을 와서 남의 자식 넷을 키우며 자신의 자식을 아예 낳지도 않았던 오정모사모님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두 여인을 두고 순교하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하였지만 그는 끝내 믿음의 절개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나무판자에 못을 박고 그 송판을 뒤집어 날카롭게 튀어 나온 못 위로 걸으라는 일본놈의 강요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 송판 위의 못을 두 발로 밟고 지나는 모진 고난을 온 몸으로 감당하시며 순교하신 그 섬김은 두고도 잊지 못할 고귀한 귀감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찌 사람의 힘으로 그 모진 고난을 감당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늘의 천사가 돕고 성령님이 붙들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우리 예수님을 섬기되 죽기까지 섬기며 충성일랑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14:18-19)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예수님은 우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너희는는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말씀일까요? 목숨을 내어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목숨을 아끼지 말고 당당하게 우리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내 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지켜주실 줄 믿고서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생명에 관한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생명과 오늘 우리들이 생각하는 생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비밀인데 진정한 성도라면 이 말씀의 의미부터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종은 자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씀을 사용하는데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제대로 된 신앙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돈을 벌고 우리들이 행복을 추구하며 우리들이 우리들의 생명을 관장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관장하시고 인도하십니다.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1:21-22)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는 말씀들이 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명이라고 우리들이 주장하지 못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라도 부모가 그 자식의 생명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최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선 5세 소년이 아버지 집 근처에서 자전거를 타며 놀다가 머리에 총을 맞아 숨지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옆집에 사는 25세 남성이었다. 14(현지 시각) USA투데이·CNN 등 미 언론에 따르면, 노스캐롤라이나 윌슨 경찰은 캐넌 히넌트(5)를 총격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다리우스 세섬스(25)에게 1급 살인 혐의를 적용했다. 경찰 발표와 현지 언론 보도를 종합해보면 사건은 이렇다. 지난 9일 오후 캐넌은 노스캐롤라이나 윌슨에 있는 아버지 집 근처에서 자전거를 타며 누나들(각각 8·7)과 놀고 있었다. 아버지 오스틴 히넌트는 집 안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웃인 세섬스가 나타났다. 세섬스는 캐넌의 머리에 총을 겨눴다. 총소리에 놀라 달려 나온 아버지는 쓰러진 아들을 끌어안고 울며 도와 달라, 우리 아들을 구해 달라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총을 들고 달아나는 세섬스를 봤지만, 아들을 두고 세섬스를 쫓아갈 수 없었다. 캐넌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세섬스는 10일 차로 30분 거리 정도 떨어진 노스캐롤라이나 동부 골즈버로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세섬스의 범행 동기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USA투데이는 경찰은 해당 총격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거의 공개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캐넌의 아버지는 언론 인터뷰에서 왜 캐넌이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세섬스를 포함한 이웃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했고, 세섬스와 함께 맥주를 마신 적도 있는 등 그와 아무 불화가 없었다고 했다.](조선일보 814일자에서 발췌)

오늘 우리들이 주님을 따르고 섬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재물과 생명을 우리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소중한 것들을 주시는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생을 스스로 살아가려고 버둥거리고 모으고 인색하고 원수 맺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하다고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을 다 버려두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 인생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백성들의 피를 뽑아 남의 나라에 갖다 바치며 돈을 챙겨 백성들의 원수가 되었던 세리가, 돈밖에 몰랐던 그 수전노 세리가 어떻게 예수님께서 나를 쫓으라(따르라).”고 하자말자 그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을 수가 있었을까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요 권능인 것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은혜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부름 받은 자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받은 자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이처럼 복된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마태처럼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기만 하면 세상 끝날까지 그 삶을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져주시고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면서 말입니다.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렇게도 놀라운 말씀을 과연 누가 기록하였습니까? 주님의 그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순종했던 마태가 아닙니까? 그는 과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진정한 축복을 맛보았던 제자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이와 같은 마태와 같이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멋진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도 좋지만 그 보다 더 고귀한 것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겨주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잠시 누리는 영화보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주시는 영원한 축복을 선택할 줄 하는 것이 지혜요 하나님을 만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값진 삶이기 때문입니다.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겨주시고 예수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삶, 이는 생각만 해도 황홀하지 않습니까?

*앞마당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이웃에게 총을 맞아 사망한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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