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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더 사랑하느냐? (2020년 9월 6일 주일낮설교)

나를 더 사랑하느냐?

9. 6, 2020

本文:요한복21:15-17

說敎:崔仁根牧師

 

어느 시골 마을의 한 농가에서 인절미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 집 며느리는 옆에 있는 신랑에게 손으로 떡을 소담스럽게 잘라 비벼서 먹여주었습니다. 옆에 있던 시아버지는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나고 입에 군침이 돌아도 체면이 있어서 달라고는 못하고 창밖으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부인이 들어오면서 며느리에게 , 아버님께 떡 좀 드렸냐?” 고 하자 아니요, 아버님은 상 차려서 잘 해드려야지요.”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떡을 뚝 떼서 주먹만 하게 만들어 콩고물을 묻혀서 남편에게 전하면서 어서 일어나 우선 맛을 보세요.” 하면서 전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시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볼이 미어지도록 떡을 한 입에 넣고는 이놈아, 너만 색시 있냐? 나도 있다.’ 고 했다고 합니다. 이 시아버지는 한때 서울을 새벽마다 다녔습니다. 그 부인은 새벽이면 일어나 더운밥을 해주다가 그것이 지겨웠는지 나중에는 저녁 하는 길에 밥을 한 그릇 더 해두었다가는 새벽에 먹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그것도 귀찮았는지 우유나 커피 한잔만 끓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미안도 하고 또 부인이 귀찮아하는 것 같아서 새벽에 그냥 간다고 하며 옛날 그의 어머니를 생각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들에게 먹겠느냐 안 먹겠느냐를 물어 볼 필요도 없이 첫새벽에 일어나셔서 밥을 해놓으셨다가 아들에게 먹였고 먹여 보낼 시간이 없으면 보자기에 싸 주어서라도 보냈습니다. 며느리가 귀여워도 아내만 못하고 처가 좋다한들 어머니만 못한 것입니다. 조건 없이 다 부어주시는 어머니의 사랑은 아가페적인 하나님 사랑의 화신인 것입니다. 부모님의 그 사랑을 아는 자식이 효자가 되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아는 성도가 충성스런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 주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여드렸습니다.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그 대답이 고상하지 않습니까? “, 그렇습니다.”도 아니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호언장담하였다가 그 주님 앞에서 실패를 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6:31-35)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최소한 우리 주님의 이와 같은 질문 앞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에 승리하지 못하면 이 세상 그 어떤 일에도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왜 이렇게도 단도직입적으로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오늘은 이 질문에 걸 맞는 해답을 찾아보면서 축복과 사랑으로 우리 교회를 이 땅에 허락하신 9월 첫 번째 주일 예배의 말씀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로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21:1-3)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였습니다. 이 베드로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던지 항상 데리고 다니는 최고의 제자였습니다. 변화산상에 올라가실 때나 겟세마네 동산으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러 가실 때도 베드로는 항상 예수님께서 데리고 가셨습니다.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6:37-38)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도 예수님께서 특별하게 구별하시고 사랑하시며 가시는 곳 마다 예외 없이 데리고 다니셨던 제자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베드로에게 일찌감치 놀라운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1:16-18)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위험한 순간이 닥치게 되자 미련 없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26:69-74)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 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예수님을 떠나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가르쳐 주셨건만 베드로는 그 삼일조차 기다려보지 못한 채 원점으로 되돌아가 다시 갈릴리에서 물고기나 잡는 초라한 어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21:2-3)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평생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던 그가 밤이 새도록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물고기는 어부인 자신이 잡는 것인 줄 알았겠지만 그 물고기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그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광경을 단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다 알고 계셨던 주님의 눈에 베드로는 과연 무엇으로 비취게 되었을까요? 바로 배신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것 하나만 들라고 한다면 이 종은 배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인간이라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단 한 가지가 바로 배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배신자 베드로까지도 가슴으로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보답해 주셨습니다.

(21:12-13)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단순한 조반이 아닙니다. 그렇게도 자신을 배신하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물고기나 잡고 있는 초라한 베드로에게 주시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배신도 다 용서하시고, 주시는 따뜻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그와 같은 베드로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말입니다.

나폴레옹은 온유한 면을 지녔던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불란서의 유명한 장군으로, 구라파를 점령하고는 곳곳에 보초병을 세웠습니다. 하루는 나폴레옹이 한밤중에 보초막을 살펴보려고 나갔습니다. 한 보초막에 갔더니 사병이 너무나도 지치고 피곤해서 총을 보초막 옆에 세워 놓은 채 쭈그리고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폴레옹이 손수 그 사병이 놓아 둔 총을 들고 보초를 섰습니다. 한참 후에 깨어난 보초병은 자기 대신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이 나폴레옹 장군임을 알고 죽을 각오를 하고 엎드려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래, 얼마나 피곤한가? 잠깐 쉬게, 내가 대신 보초를 서 줄께."라고 위로하고 용서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때 그 사병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일생 동안 나폴레옹을 위해서 충성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 용납합시다. 그리고 이해합시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온유한 자로 진실한 이해와 용서를 삶속에서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으심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빈 배를 만선으로 채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21:4-6)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을 배신하고 맡기셨던 사명도 던져버리고 다른 어리석은 제자들을 여섯 명이나 꼬드겨 원점으로 되돌아가버린 그런 배신자에게 왜 이렇게도 풍성한 만선의 축복을 부어 주시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정 반대로 거센 풍랑을 일으켜서 배신자의 최후가 무엇인지 친히 보여주셔야 마땅할 텐데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는 사랑,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한국 속담에 미운 자식에게 밥 한 그릇 더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 주님의 이와 같은 사랑은 배신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우리 주님의 이와 같은 사랑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조건 없이 사랑으로 빈 배를 만선으로 채워주시니 단방에 주님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기적임을 깨닫고 외쳤던 것입니다. “주님이시다!”고 말입니다.

(21:7)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무엇으로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영원히 보고 싶지 않은 배신자라도 넘치는 사랑으로 채워줌으로서 그 악한 가슴에 사랑의 불을 붙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금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말입니다.

33살에 미국에서 최고의 전문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 신경외과 주임의사가 된 흑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벤 카슨입니다. 그는 1987년 뒤통수가 맞붙은 쌍둥이를 장장 22시간에 걸친 [사투]끝에 분리하는데 성공하여 [기적의 손]이란 찬사를 듣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선물 받은 손]이란 자전적인 책을 썼는데 거기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오늘의 내가 된 것은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손은 하나님의 선물이니 바로 그분 하나님의 것이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은 바로 하나님이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의 기초는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전히 새로운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보람 있고 가치 있고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일도 귀하지만 그것은 결국 육신적인 것이고 한 순간 뿐이며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대한 가치나 지혜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렇게 자기 자만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을 보면 뭔가 보통사람과 다른 면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실로 잘난 사람이었습니다. 전통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당대 최고의 명문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엄청난 돈을 주고도 가질 수 없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미련 없이 버리고 오로지 그 예수님만을 위해 일생을 쫓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다 간 사울보다는 그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갔던 사도 바울이 훨씬 더 존귀하게 보입니다. 그러했던 그가 평생을 통해 가장 감사드렸던 일을 감격적으로 성경에 기록해 두었는데 오늘 우리들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사도라는 놀라운 직분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딤전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는 축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사도 베드로가 배신자로 전락하는 한 순간의 실수도 있었지만 주님께서 친히 주시는 사명을 받았음이 그의 일생에 최고 최대의 축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나 잡아 연명하며 한 세상 살다 갔으면 이 세상 그 누가 그를 알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기적 같이 그의 사명을 회복 받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였기에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오늘 우리들도 아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을 고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는 이 땅에서도 축복의 근원이지만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우리들의 돌 비석에 새겨지는 영광이요 하나님 앞에서는 면류관을 받아 누리는 영원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소중한 의미를 모른 채 세상의 부귀영화에만 치심 하다가 그 고귀한 직분을 던져버리게 되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삶을 살고 맙니다. 그런 인간이 바로 가룟 유다였습니다.

(1:17-26)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 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자칫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그의 사도직을 회복시켜 주시지 않았다면 가룟 유다와 같이 될 뻔 하였으나 사랑으로 그에게 다시금 사도직을 회복시켜 주셨으므로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는 베드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이 넘쳐나지만 그 중에서도 직분 주심을 잊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여 땅에서도 훗날 하나님 앞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신자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결국에는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철의 장막을 뚫고]로 널리 알려진 브라더 앤드류가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말씀을 전할 때 있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었습니다. "내가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말했을 때 그 즉시 강단 뒤쪽에서 청년 두 명이 마이크 앞으로 나왔습니다. 수염을 기른 이 청년들은 과격분자 같은 태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종주의자요 제국주의자라고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며 모택동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격찬했습니다." 앤드류는 결국 그들의 말을 중단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발언이나 질문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백 명의 그리스도인 학생 중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절망적으로 보이는 바로 그 상황에서, 흑인학생과 백인학생이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흑인이 먼저 말했습니다. "저는 나이지리아에서 왔습니다. 이 기회에 저는 아프리카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준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이 오지 않았다면, 나는 이 대학에 오지 못했을 것이고 아직도 미개인이요 이교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영원히 죄악 속에 버려질 뻔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회개케 하려고 찾아온 선교사들에게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어서 동유럽에서 피난 온 백인이 말을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을 참을 수 없어 나는 조국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나는 조국에서 할 수 없던 모든 것을 이 기독교 국가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미주시민 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들까지도 말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에 사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두 명의 마르크스주의자가 사백 명의 그리스도인에게 겁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요 침묵하는 다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바로 무관심입니다. 기꺼이 싸우려는 사람이 있어야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용기와 믿음을 우리는 사명이라고 합니다. 너무나도 부족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천사도 흠모할 양 무리를 맡겨주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며 감당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동시에 순교할 것도 예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21:18-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말씀대로 훗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주님을 위해 이처럼 헌신할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큰 축복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위해 거룩한 희생을 감당할 수 있도록 오늘도 말씀을 통해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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