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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인격입니다! (2020년 11월 1일 주일낮설교)

감사는 인격입니다!

11. 1, 2020

:디모데전서1:12-17

說敎:崔仁根牧師

 

모세가 이끌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적지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리더들의 보고를 듣고 그만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12명 중 10명이 절대불가라는 보고를 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격하게 모세를 원망하며 다시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하여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정 반대의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보호자가 떠났고 우리들이 올라가서 충분히 점령할 수 있으니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까지 하였지만 두 사람의 긍정은 10사람의 부정에 뭍이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광야에 이슬같이 만나를 내려 그들을 먹이시고 지키시던 하나님께 감사는커녕 원망으로 일관하다가 광야에서 비참하게 다 죽고 말았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을 거울삼아 우리는 원망하지 말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망은 감사하지 못하는 자들이 하는 멸망의 어리석은 소행입니다. 똑같은 환경에 놓여 있었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감사를 하였고 나머지 열 명의 두령들은 하나님을 극렬히 원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모세를 돌로 치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광야에서 다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디에 속한 성도들일까요?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긍정적이고 감사가 넘치는 성도들일까요? 아니면 나머지 60만 명과 같이 원망하며 불평하는 자들일까요? 60만 명 대 두 명으로 나뉘어 심판과 축복으로 갈리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들은 과연 어디에 서 있는지, 감사의 달에 다시 한 번 더 성찰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4:26-30)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감사가 없는 자들의 결말은 실로 엄청난 심판으로 종말을 맞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도 정탐꾼들이 정탐한 40일을 1년씩 계산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하도록 심판하시고 말았습니다. 이 정도이면 오늘 우리들도 감사 대신 원망하는 죄가 그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렇게도 비참하게 망하고 말았을까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믿음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의 감사를 통하여서 감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인격이 갖추어져야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현실을 초월하는 결단력이 있을 때 비로소 그 하나님께 제대로 된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세하게 함께 공부하면서 깊은 깨달음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자신을 바로 알 때 할 수 있습니다

(딤전1:13-15)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아무리 못난 부모도 자식들 앞에서는 좋은 부모이기를 바라고 아무리 못난 스승도 제자들 앞에서는 훌륭한 스승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아들과 같이 여기는 수제자 디모데 앞에서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언제나 제자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쉽게 고백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고백을 그러나 그는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성경에 기록한 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전15:8-10)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똑바로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나면 비로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바로 신앙인격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인물도 없습니다. 아예 그는 범사에 감사를 드렸을 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자들은 광야에서 죽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감사는커녕 악하게 원망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지적 능력을 가진 자들을 우리는 인격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 주변에 자칭 잘난 사람들을 보면 세상 이치와 돌아가는 정세는 다 꿰뚫고 알면서도 정작 반드시 알아야 할 자기 자신과 하나님은 모르는 사람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데 어떻게 감사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감사는 인격인 것입니다. 그것도 단순하게 이치를 아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의 허물진 모습을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용서하시고 고귀하게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을 알 때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 돌아가는 것은 몰라도, 학교에서 많이 배우지 못해서 지식은 없어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자신이 누군지를 바로 알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깊은 깨달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알아야 할 것을 똑바로 알게 될 때 비로소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항상 감사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그의 축복을 교만한

자의 손에서는 거두시나, 겸손한 자에게는 언제나 허락하신다.”

- 토마스 아켐피스 -

감사는 마음에 감동이 있을 때 할 수 있습니다

(딤전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사도 바울은 감사드릴 조건이 너무나도 많이 있었지만 그가 가장 귀하게 느끼고 감사를 드린 내용은 바로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에게 사도의 직분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수제자 디모데에게 하나님께 드릴 감사의 제목을 가르쳐 주면서 자기 자신을 충성되이 여기시고 사도의 직분을 주신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데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육 간에 남보다 잘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다 자기 자신의 공로로 여기고 있습니다. 키워주시고 공부시켜 주신 부모님께 조차도 그 공을 돌려드리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들이 하늘의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신이 잘 되었다고 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숨길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주시고 자신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심으로 주신 축복이요 은혜였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또한 고백하고 있습니다.

(9:13-15)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딤전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이 두 말씀을 종합해 보면 사도 바울이 사도의 직분을 받을 것에 왜 그렇게도 큰 감동받았던지 알 수가 있습니다. 자신은 살인자요 죄인 중의 괴수였으나 예수님은 그런 것 다 개의치 않으시고 자신을 그 고귀한 주님의 사로도 세워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고 그 감동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감사를 드리려면 사도 바울과 같이 정적인 감동을 느끼는 정서적인 능력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인격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감동을 받아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억지로 하는 것이니 하나님께 상달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감동을 감사로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영적인 인격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서 자신이 받은 직분에 대해 이렇듯 사도 바울과 같이 감동하며 감격하여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직분자들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이것은 진정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가에 대한 해답이 되는 만큼 매우 중요한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종이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경험해 온 바로는 현대교회에서 자신이 받은 직분에 대해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처지를 알고 또한 하나님께서 내리신 직분의 신비로움에 대해 감격하고 감동하는 직분자는 그렇게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제대로 된 감사 또한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마음으로 진하게 받은 감동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이 받은 직분에 대해 어느 정도 깊이 감격하고 또한 감사하고 있었던지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1-2)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고전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1:1-2)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이상에서 보신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그가 쓴 모든 편지 서두에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기 자신의 사도 직분에 감격하고 자부십을 가졌으면 이처럼 고귀하게 고백하며 만 천하에 선포하고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는 이렇듯 자신에게 사도의 직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축복이 많고도 많지만 그 중에서도 죄인 된 우리들을 다 아시면서도 신령한 직분을 주시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섬기게 하심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감사는 결단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선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나 다니엘과 같이 고귀한 생명을 초개 같이 내어 놓고 담대하게 결단한 인물들도 많이 있었지만 신약시대에 와서 이처럼 과감하게 자신의 생명을 과감하게 내어 놓고 하나님께 충성한 인물도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이렇듯 주님을 위해 고난과 죽임 당하는 것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결단하는 인물 정도이면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원망하는 자가 목숨을 내 놓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결단이 있을 때 비로소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신앙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영적인 인격인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적인 삶에 갇혀서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유익과 출세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더 많기 마련입니다. 그 누구도 그러한 사람의 편이 되어주거나 동행해 주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너 불행 내 행복인 처절한 경쟁사회이기 때문에 그 어느 곳에서도 진정한 감사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구원의 은총을 맛볼 수 없고 끊임 없이 욕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소중한 생을 마감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너무나도 많이 목도하고 경험하였던 하나님의 사람 아삽은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감사를 촉구하고 구원의 길을 찾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구원은 인간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하늘의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성도들의 신앙행위는 감사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 친히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보답하시는 축복으로 구원을 보장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로버트 슐러 목사는 매일 아침 4킬로씩을 뛰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한번은 유럽 여행길에서 너무 피곤해서 뛰지 않고 늦잠을 자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억지로 일어나서 뛰었는데, 그때 어느 발 없는 노인이 창가에서 자기를 부러워하는 모습을 발견했고, 호숫가에서 휠체어에 의지해서 산책을 하던 중년 신사가 선망의 눈초리로 자기를 보는 것을 발견하고서, 자신의 게으름과 또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잊었던 일을 뉘우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감사를 해야 합니까? 풍년 주신 것, 장사 잘되는 것, 합격된 것, 취직된 것, 진급된 것, 물론 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감사는 이방인도 드릴 줄 아는 감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일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결국 감사는 결단력이 있는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인격입니다!!

나이팅게일은 30세 되던 날 이런 일기를 썼습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그의 사명을 시작하신 나이이다. 주님, 오늘부터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 후 나이팅게일은 헌신적인 간호사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생활의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비결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신 그 뜻에 나를 맡기고 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생활과 나의 음성만을 듣는 생활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마음의 선택에서 한 발자국 전진하여 몸으로 행하는 선택, 즉 결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바로 이런 결단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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