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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사랑입니다! (2020년 11월 8일 주일낮설교)

감사는 사랑입니다!

11. 8, 2020

:시편136:1-4

說敎:崔仁根牧師

 

독실한 크리스챤인 한 농부가 지방의 유명인사들과 향께 초청을 받아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농부는 으레 하던 대로 음식을 앞에 놓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앞에 앉아 있던 한 유명인사가 하는 말이 "허허, 구식이군요. 요즘 교육받은 사람은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지 않아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농부는 "저는 기도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늘 감사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농장에도 식사 전에 기도드리지 않는 이들이 있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명 인사는 ", 그래요, 그것 참 지각 있고 품위 있는 사람이로군요.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하고 묻자, 농부는 "우리 집에서 기르는 돼지들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미국인들은 참으로 감사합니다. Thank you."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 나라가 감사로 시작한 퓨리탄들(청교도들)이 만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달 11월을 맞아 감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감사는 인격입니다.”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감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가슴에 풍요로운 감격과 감동이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드릴 수 있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이처럼 아는 것과 느끼는 것과 결단이 있는 사람을 인격자라 부르니 결국 감사는 인격인 것입니다. 오늘은 감사는 사랑입니다!”는 제목으로 감사에 대한 의미를 배워보려고 합니다. 실로 감사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나오는 고백입니다. 사랑을 내면적인 덕이라고 한다면 감사는 그 내면적인 덕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가슴에 사랑이 있고 삶의 현실에서 사랑을 풍성하게 받는 사람이라야 자연스럽게 감사를 드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불행하게도 이 소중한 사랑이 메말라버렸습니다. 너도나도 오로지 물질만 쫓아 사는 삶의 현실에서 가슴이 메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인기 코미디언이었던 박지선씨가 36살의 꽃 같은 나이에 자살을 하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따뜻한 사랑으로 서로 기댈 수 있었다면 결코 그렇게 허망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듯 사랑이 말라버리면 감사도 마르게 되고 사랑과 감사도 없는 세상은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감사는 늘 함께 공존하는 관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감사하라!”고 명령하시는 것도 감사를 받으실 만큼 끔찍이도 우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는 이 짧은 한 마디는 참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바 교훈이 크고도 놀랍습니다. 그러면 함께 사랑과 감사에 관한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흥망성쇠에서 얻는 교훈

(1:2-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신 역사를 보면 범상한 오늘 우리들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하나님께서 야곱을 특별하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8:10-15)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이 말씀은 야곱이 그의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 챈 후 그 형이 잡아 죽이려 하자 몰래 외삼촌댁으로 도망가던 그 첫 날 밤에 일어난 사건을 요약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이와 같은 사기꾼은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하나님은 그와 같은 야곱에게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시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이 외삼촌댁에서 모든 외삼촌의 재산을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또다시 외삼촌을 속이고 야반도주하여 올 때에도 하나님은 추격해 오는 라반을 막아주시고 마주 내려오는 형 에서 또한 막아주셔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를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기꾼이라는 뜻을 가졌던 그의 이름 야곱을 버리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놀라운 의미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32:27-28)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되었고 결국 야곱의 후손들이 오늘의 이스라엘 민족을 만들어 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야곱이 받은 축복은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사랑하셨다는 고백입니다.

(1:2-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했던 야곱의 후손들이 그처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을 떠나고 배신함으로 수많은 전쟁과 질병과 숱한 고통으로 징계를 받았던 것입니다. 특별히 지도자도 없이 자신들이 왕이 되어 자기 소견에 맞는 대로 살았던 그들의 모습을 하나님은 사사기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증거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말입니다.

(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감사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곧 사랑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감사와 사랑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신약시대에 사도 바울과 같이 감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조금은 놀란 것이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에 관한 예수님의 사랑은 실로 특별하였습니다. 세 번씩이나 자신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도망 가버린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책망조차 하지 않으시고 부활하시자 말자 그가 물고기를 잡으며 원점으로 되돌아가 있는 현장으로 달려가셔서 그의 빈 배를 만선으로 채워주시고 밤새 허기진 배를 친히 생선과 떡을 구워 조반을 만들어 먹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주님의 이와 같은 놀라운 사랑을 받은 제자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에게 친히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그에게 다시금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부여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다. 행여 베드로가 쓴 베드로전후서나 그의 사역의 결정적인 기록이 담긴 사도행전에 그런 그의 감사가 남아 있나 싶어 꼼꼼히 다 살펴보아도 베드로가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드렸다는 기록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쓴 성경에서 그가 사용한 감사라는 말은 49번이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 감사한 사람이었고 자신 뿐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가 느끼고 고백하고 사용하였던 감사를 똑부러지게 권면하고 또한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다가 발견한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사도보다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았고 더 많이 고백하고 있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신구약 66권 중에 사랑장을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또 얼마나 우리들을 사랑하시는가를 이처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 앞에서 우리들이 사랑이 없이 산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고귀한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제아무리 천사 같은 기도를 하고 전 재산을 다 바치며 헌신하고 끝내 목숨까지 드린다고 하여도 그 중심에 사랑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헛것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무장하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결국 감사는 이와 같은 사랑으로 무장되었을 때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있을 때 그가 하는 모든 것에 감사를 드릴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나이만큼 살아온 경험으로 볼 때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결코 감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래 전 미국의 미시간 호수에서 배 한 척이 침몰된 일이 있었습니다.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배의 침몰과 함께 호수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북서부 대학의 한 학생이었던 수영 선수 한 사람이 사력을 다하여 23명을 구출해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R. A. 토레이 박사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집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토레이 박사는 그의 설교 가운데서 오래 전 미시간 호수에서 있었던 배의 침몰 사고에 대하여 얘기하면서 그때 젊은 대학생이었던 수영 선수의 용기와 인간애를 극구 칭찬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그때의 그 젊은이가 노인이 된 채 앉아서 그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토레이 박사는 그 장본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사건을 통하여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그 노인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단 한 사람도 감사하는 자가 없었습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사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명령하십시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 말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너희들아 그 하나님께 너도 사랑으로 화답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결국 사랑인 것입니다.

성군 다윗의 감사와 사랑

(18: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18:49)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감사를 많이 한 한 사람을 들라고 한다면 주저함 없이 다윗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다윗이 하나님을 그만큼 많이 사랑하였다는 말과 같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또 사랑한 인물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전쟁에 나가면 백전백승 할 만큼 용맹이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그는 가슴에 그 어떤 여자보다도 더 섬세한 감성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오늘 본문에서 잠시 고백한 내용만 보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특별히 구별하여 사랑해 주셨고 다윗은 그 사랑을 잊지 않고 가슴에 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18:46-48)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도다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실로 나를 대적하는 자의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이렇게 고백하고 난 다음 다윗은 그와 같이 자신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열방 중에서 감사드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18:49)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고 말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감사는 결국 사랑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상대에 대한 사랑이 없는 한 사람은 결코 감사드리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원망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영국 트렌취 감독의 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마한 구렁텅이만 있어도 벌써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마한 빛만 비추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비로우신 빛이라 생각하고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도 생이란 왜 이리 괴로우며, 기쁜 일은 하나도 없느냐고 얼굴을 찡그려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며, 게딱지같은 오막살이에 살면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늘 아버지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입니다. 똑 같은 은혜를 받은 자 중에도 감사하는 자는 실로 얼마 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기록된 열 명의 문둥병자의 사건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열 명이 예수님으로부터 기적 같은 사랑을 받고 고침을 받았으나 주님께 돌아와 감사 드린 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만큼 주님보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랑이 결핍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화인데, 독일에서 혀 암에 걸려 혀를 잘라야만 하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의사가 혀가 잘리기 전에 최후로 한마디를 하라고 했습니다.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한 채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주위에 둘러 서 있던 사람들도 과연 마지막 한마디는 무엇일까 생각하며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지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떨리는 입술로 그 마지막 한 마디를 내 놓았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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