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는 가치관입니다! (2020년 11월 15일 주일낮설교)

감사는 가치관입니다!

11. 15, 2020

:욥기1:13-21

說敎:崔仁根牧

 

영국 트렌취 감독의 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마한 구렁텅이만 있어도 벌써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마한 빛만 비추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비로우신 빛이라 생각하고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도 생이란 왜 이리 괴로우며, 기쁜 일은 하나도 없느냐고 얼굴을 찡그려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며, 게딱지같은 오막살이에 살면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늘 아버지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인생의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감사도 나오고 원망과 불평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불행하게도 제대로 된 가치관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오로지 인간의 외모와 돈이 세상을 지배하고 그것만 있으면 인생이 저절로 행복하게 될 줄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희생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 받고 한 알의 밀과 같이 땅에 묻혀 썩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자기 자신의 유익과 행복만을 추구하고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있기에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으며 친구도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 앞에서 눈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이야기기 하니 소귀에 경 읽는 것보다 더 무관심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없는 한 그 어떤 이야기에도 감동을 받거나 움직이지 않는 세태가 바로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가치관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감사하라는 말은 강아지에게 주기도문을 외워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은 감사의 달 11월에 배우고 있는 진정한 감사의 의미감사는 가치관입니다!”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배워보려고 합니다. 잘 안 되겠지만 제대로 된 가치관으로 제대로 된 감사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제대로 된 성도들로 거듭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욥의 가치관과 감사

(1:20-22)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구약 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고난을 극복한 위대한 인물의 대명사로 교회에 다니는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선 그에 대한 성경의 증거부터 다시 한 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1-3)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 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그랬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10남매를 둔 아버지요 재산을 많이 가진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대 동방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한 순간에 재난을 당하여서 그 사랑하는 10남매를 다 잃어버렸고 그 많던 재산을 송두리 채 다 잃어버렸으며 자신의 몸마저도 병이 들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경에 처한 그의 태도를 성경은 아주 담담하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날뛰며 난리법석을 떨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살아왔는데 어떻게 이렇게도 잔인하게 나에게 고통을 주실 수 있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렸습니다. 어떻게 그는 이처럼 놀라운 처신을 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 놀라운 이유는 오직 하나 그의 삶의 가치관이 그를 그렇게 굳건하게 붙잡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놀라운 절대적인 믿음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렇듯 욥의 가치관은 아주 분명하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결국은 그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이 바로 그의 가치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욥만의 가치관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자베스 퀴불러박사는 그가 쓴 책, “인생수업에서 이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당하는 고통 중에 가장 극심하고 이겨내기 어려운 고통은 상실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품고 있었던 소중한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거나 없어져버릴 때 그 상실의 고통을 극복하기란 인간의 의지가 너무나도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잃어버린 상실감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하거나 채워지지 않는다고도 하였습니다. 욥은 지금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자녀들을 한 명도 아닌 열 명을 몽땅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람이 미치지 않고 정상적으로 존재한다는 자체가 비현실적입니다.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이처럼 엄청난 상실을 어떻게 극복해 낼 수 있단 말입니까? 바로 여기에서 엘리자베스는 말합니다. 모든 것이 오늘 우리들이 가시고 있는 소중한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결국에는 그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가치관은 우리들을 조금은 초연하게 만들어 주고 조금은 위로를 받게 해 준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믿음의 제대로 된 가치관을 정립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독생자 예수님을 주실 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목적 없이 우리들에게 상실의 아픔을 주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욥기서는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분명한 이해가 없으면 백이면 백 모두가 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 하나님을 떠나고 맙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놀랍게도 욥은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부가해서 더 이해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더 나아가서 범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원망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그 수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다 죽이셨던 것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60만 명이 한꺼번에 죽은 사건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사랑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원망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고전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처럼 원망하지 아니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아 그렇게도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으로부터 망하지 않으려면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결코 우리들의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욥의 깊은 가치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놀랍게도 어린 아이들을 보면 두 가지 양상으로 다르게 나타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친구 집에 놀러가서 친구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 한 아이는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고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가겠다는 아이이고 다른 하나는 잘 놀았지만 집에 올 때는 미련 없이 그 장난감을 그 집에 놓고 오는 아이가 바로 그렇습니다. 누가 가르치거나 시키지도 않았는데 후자는 어떻게 그런 기특한 행동을 할 수가 있을까요? 바로 그 부모들의 가치관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진정한 가치관의 피가 흐르든지 아니면 아직 어리지만 제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할 줄 아는 분별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오늘 우리들도 이 땅에 살면서 그 어떤 것도 영원한 내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분명한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욥이라고 가슴이 아프지 않았겠습니까? 왜 가슴을 후벼 파는 극심한 고통이 없었겠습니까? 열 아들딸을 한 순간에 다 잃어버렸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찬송으로 감사를 드리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과연 그로 하여금 이렇게도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놓게 하였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갑절의 축복을 다시 받는 놀라운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가치관과 감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가장 감사를 많이 드린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는 어떻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런 놀라운 감사를 몸소 드리고 또한 그의 성도들에게 가르칠 수 있었을까요? 역시 그의 분명한 가치관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가친 감사의 원천이 되는 가치관은 바로 고난이었습니다. 믿음이 없고 제대로 된 인생의 가치관과 철학이 없는 사람들은 고난이라는 위기를 만났을 때 거의가 다 삶을 포기하거나 극심하게 자신에게 고통을 제공해 주었다고 믿는 사람과 환경에 대해 원망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살인을 저지르게도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망하고 고통에 빠지게 되면 더 이상 소망이 없고 두려울 것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대전에서 36살 먹은 30년지기 절친들이 여자 하나를 놓고 싸움이 붙어 살인을 저지른 끔직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둘은 다섯 살 때부터 친구였고 31년을 친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냈는데 여자 하나가 그 둘 사이게 끼이게 되자 그만이야 이처럼 끔찍한 사고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제대로 된 가치관이 없으면 고통과 고난의 때를 결코 지혜롭게 넘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들에게 아주 실제적인 진리 하나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고 그곳에서 영원히 잘 살기를 원한다면 이 땅에서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과 축복만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고난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가지고 있었던 사도 바울이었기에 그는 평생을 통해 소나기와 같이 쏟아지는 고난의 순간들을 그는 아주 잘 이겨내고 오히려 그와 같은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께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감사를 드리는 성숙한 하나님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후11:22-33)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 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사도 바울이 스스로 고백한 고통만 보아도 가히 원망할 만하고 불평할 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일을 하는데 오히려 자신이 겪어야 하는 현실은 이토록 놀라운 고통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고백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일컬을 때, “영원히 찬송 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찬송이 바로 감사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처럼 초인간적인 놀라운 감사의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오직 하나 그에게는 남다른 영적인 가치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을 보는 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악하고 험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코로 숨을 쉬는 것과 같이 당연하다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왜 나만 이런 고난을 당하느냐?”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훗날 천국에서 면류관과 하늘 상을 받으려면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고 당연하다는 깊은 영적 가치관을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한층 업그레이드 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생후 6개월 만에 장님이 되어버린 안타까운 크로스비 여사는 평생토록 9천여 편의 찬송시를 쓴 위대한 인물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찬송가에도 434장을 비롯하여 이 분의 찬송이 23편이나 실려 있습니다. 평생을 장님으로 살면서도 그녀는 늘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두 눈을 번쩍 뜨고 하나님을 뵈올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분이야 말고 고난을 호흡처럼 생각하는 위대한 가치관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크로스비와 같이 고난을 천국을 사모하는 징검다리로 삼고 초연하게 잘 이겨내고 감사드릴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영적인 가치관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내공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쇠는 뜨거운 풀무불과 차가운 물을 끊임 없이 오갈 때만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축복과 고난의 길을 끊임 없이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질 줄 믿고 고난이 오면 조용히 기도하고 축복이 오면 두 팔 벌려 찬송하면서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요나의 가치관과 감사

(2:1-9)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우리는 요나의 이야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도 거역하고 제멋대로 고집을 부리다가 끝내는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배속에까지 들어가야만 했던 비운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왜 이 세상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그 무서운 심판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야만 했을까요? 바로 그의 잘못된 가치관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요나는 어떤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그 지엄하신 명령도 불순종하였을까요?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1-2)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3:1-2)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니느웨와 같은 범죄한 도시는 결코 구원 받아서는 안 되고 망해야 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렇게도 분명하게 명령하셨으나 그는 끝내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아예 니느웨와 다른 방향인 다시스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4:1-2)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음이니이다

이것이 바로 요나의 숨김없는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들은 망하여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겠다고 하니 아예 다른 곳으로 달아나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물고기 배속에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그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모순투성이였던가를 말입니다. 자기는 나름대로 니느웨를 피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으니 이제는 됐다고 안심했는지도 모릅니다.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는 말씀과 같이 요즘도 타이밍을 맞추기 힘은 배 시간이 그렇게도 딱 맞아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너무나도 쉽게 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안심하고 배 밑층으로 내려가서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5)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는 말씀처럼 그가 얼마나 만족하고 평안하였으면 깊이 잠이 들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까지만 그의 뜻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는 배 밑층에서 갑판까지 끌려왔고 결국은 깊은 바다로 던져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그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이 그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초라하고 헛된 것이었음을 말입니다.

(2:8)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요나가 스스로 회개하고 초라한 자신을 고백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버린 자들은 자신과 같이 허망하고 거짓된 자신의 주장과 가치관과 확신 속에서 어리석게 살아가게 됨을 만 천하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그는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감사제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나의 감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진정 하나님께서 물고기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바다 밑에서 죽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의 진정한 감사는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에 그 기초가 놓여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준비하시고 요나의 생명을 건져주셨던 것처럼 우리들의 험악한 인생 여정에도 시시때때로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준비하시고 우리들을 받아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가치관이라고 다 감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이고 바른 가치관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요나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은 스스로를 죽이고 마는 무서운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같이, 욥과 같이 제대로 된 영적 가치관으로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리는 살아 있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축복 합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