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는 믿음입니다! (2020년 11월 22일 주일낮설교)

감사는 믿음입니다!

추수감사주일

11. 22, 2020

:다니엘6:10-23

說敎:崔仁根

 

추수 감사절은 항해술이 취약했던 1620년에 오직 신앙의 자유만을 찾아 극심한 기아와 병고에 시달리면서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싣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간 102명의 청교도(the Puritan)들이 그로부터 1년 후 낮 설고 물 설은 개척지에서 갖은 풍토병과 각종 생활의 질고에 시달리면서 거의 절반이 죽고 겨우 53명이 남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한 해 농사를 수확한 후 얻은 새 땅에서의 첫 결실을 감사하여 드린 감사 기념 예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실로 눈물과 감사가 뒤범벅된 벅찬 감동의 예배를 드렸던 그들이 바로 현대 미국을 탄생시킨 선조(the Pilgrim Fathers)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드렸던 첫 추수 감사절의 벅찬 환희는 단순히 한 나라의 건국 일화나 한 해의 추수의 감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자유의 존엄성을, 그리고 개척자 정신의 고귀함을 보여 주는 산 실례로서 모든 인류의 가슴속에 진한 감동을 전해주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감사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먼 항해를 믿음으로 출발하였고 사랑하는 고귀한 가족들과 이웃들을 절반이나 잃었지만 절망하지 아니하고 굳건하게 일어나 결국에는 추수의 감격을 맛보게 되었고 거대한 미국을 건립한 초석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믿음이 없이 고통과 역경을 이겨낼 수는 결단코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감사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2020년 고통의 한 해 속에서 맞이하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코로나 바이러스로 1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속에서 25만 명이 넘는 이웃들이 사망을 하는 끔찍한 고통을 겪어내고 있습니다. 사업이 망하고 직장이 사라지고 긴 시간 사회생활을 온전히 하지 못하는 초유의 고통으로 심신이 피폐해 가고 있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들에게 믿음이 있기에 그래도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욱 고귀한 믿음으로 끊이지 않는 감사로 남은 우리들의 삶을 승리로 마감할 수 있도록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풍성한 위로와 도전과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입니다.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감사는 성도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선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소중한 감사도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못하고 믿음을 따라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는 말씀은 참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엄청난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주일이니까 그저 몇 푼 감사예물을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한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비 신앙적인 가치를 지양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우리들에게 마음을 다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되 사람에게 하듯 변덕부리며 정성 없이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무성의 한 것을 매우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1:11-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감사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감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겠다고 까지 하셨으니 말입니다.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소중한 감사도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끔찍한 일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감사라는 미명아래 자신들이 중심이 되고 기복적인 신앙인으로 전락하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거짓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21:12-1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예물을 바쳐드리려면 집에서부터 정성껏 준비를 하고 정성을 들여야 하는데 그것을 들고 성전까지 걸어오는 것이 불편하니까 성전에 장사치들이 파는 것을 즉석에서 쉽게 구비하여 바치려는 성의 없는 행위를 규탄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1장의 말씀이나 마태복음 21장의 이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아무리 감사드리고 예물을 드린다고 해도 정성과 믿음에 입각한 것이 아닐 때는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고 아프게 해 드리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입각한 감사가 아닌 것은 오히려 죄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 60만 명이 왜 그렇게도 비참하게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친히 인도해 가겠다고 약속하시고 온갖 이적과 기사로 그들에게 친히 보여주셨으나 그들은 눈앞에 있는 현실만 바라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능을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14:1-5)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이 사건을 돌아보면 그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육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세우신 하나님도, 온갖 능력과 권능으로 그들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도 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가나안에 살고 있는 무시무시한 일곱 족숙들과 거기에 갔다가 죽임을 당하게 될 사랑하는 자식들과 가족들만 존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모세를 돌로 쳐 죽이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아우성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도무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 소용없는 그들을 그곳에서 다 죽이시고 자신을 믿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이끄시고 계획대로 가나안으로 입성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문제는 이처럼 안타까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저렇게도 옹고집적인 비 신앙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 마음먹은 유익해 보이는 일은 그 누가 말해도 듣지 않고 끝까지 고집부리며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인생의 결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제고집대로 하는 자는 끝끝내 그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고집쟁이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회에 직분자들을 세울 때에도 이처럼 제고집대로 하는 자는 절대로 세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감독은 바로 오늘 교회의 장로를 뜻합니다. 제 고집대로 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예 세우지도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너무 눈앞의 유익만 추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발 부보님과 목사님의 말씀을 좀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는 자식들이 잘 되기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원하는 분들이시고 목사는 여러분들의 앞을 내다보는 선견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까지 감사주일을 지켜왔고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감사예물을 바쳐왔습니다. 한 해에 천불씩만 드려도 우리 교회 역사만큼 드렸으면 37천불이나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의 삶은 그 때나 지금이나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감사로 제사를 드리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들의 삶에 구원을 보여주시겠다고 친히 약속해 주셨는데 말입니다.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즘에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행여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믿음이 없는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마치 사신우상 앞에 복채를 주고 축복을 기대하듯이 하나님께 감사예물을 드리고 나에게 복을 주십시오!” 하는 자세로 감사예물을 드린 것은 아닌지, 한 번 쯤은 생각해 보고 회개하는 기회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감사는 저 혼자서 감사가 되지 않습니다. 태양이 있어야 달이 빛나는 것과 같이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감사가 빛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을 기초로 한 진정한 감사를 드려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리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축복이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다니엘의 감사와 믿음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6: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우리는 다니엘의 사자 굴 사건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 넣기 위해 가진 중상과 모략을 다 꾸미던 인간들은 결국 그들의 뜻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미련할 정도로 그 빌미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그 악랄한 인간들이 자신을 사자 굴에 넣기 위해 자신이 늘 드리는 기도의 일을 이용하기로 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피하지도 않았고 기도를 중단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 보란 듯 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와 같은 자신의 현실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과연 이와 같은 끔찍한 위기 앞에서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인물은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하지만 다니엘은 바로 이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사자 굴에 던져졌고 순교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굶주린 사자가 이처럼 먹이가 들어왔는데 어떻게 외면하겠습니까? 하지만 하늘의 하나님은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자의 입을 봉하시고 다니엘을 그 참담한 죽음의 현장에서 보호하시고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다니엘의 믿음이 묻은 감사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다니엘 610절과 23절 말씀이 이에 대해 정확히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6: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이렇듯 감사는 믿음을 동반할 때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냥 습관적으로 연례행사의 하나로 감사주일을 보내고 감사를 드려서는 안 됩니다. 믿음에 기초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고 그 감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도록 항상 믿음으로 무장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말세를 맞은 지금 진정한 믿음을 보기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말세에 처한 우리들의 현실을 눈물겹도록 안타깝게 예언해 두셨겠습니까?

교회에는 나오는데 믿음이 없다고 말입니다.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지금은 마치 그 옛날 사사시대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모두가 제 소견에 유익한 대로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의 마지막 때의 예언을 말입니다.

(1:4-6)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는 말씀을 말입니다. 긴 세월 코로나바이러스로 우리 성도들은 참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고통의 때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알곡과 같은 심령들이 될 수 있도록 선용하여야 하겠습니다. 마세에 하나님은 고난의 바람으로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