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사랑 (2020년 12월 13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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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3 December 2020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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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의 사랑
12. 13, 2020
本文:사도행전2:37-42
說敎:崔仁根牧師
오래 전 시카고의 어느 상점이 화재가 나서 다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그 상점이 이제는 폐업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에 잿더미가 된 상점 앞에 안내판이 하나 나붙었는데,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상점의 모든 것은 다 타 버렸습니다. 그러나 제 아내와 자식들과 희망은 타지 않았습니다. 내일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고 정상적으로 영업을 계속 할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모든 사람이 실망하고 슬퍼할 때에도 성령의 사람들은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언제나 새로운 소망을 주시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믿음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령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의지하며 기대하는 성도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인본주의로 변화되었고 오로지 세상적인 것으로 만족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삶의 유익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키운 부모들이 가장 슬프고 외로울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더 이상 부모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고 할 때 부모는 가장 슬프고 외로운 것입니다. 비록 피곤하고 바빠도 달라고 하고 귀찮게 하고 찾을 때가 행복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찾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하고 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엄청난 것을 약속하시고 오늘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사람들은 이렇게 살지 않습니다. 구하지도, 두드리지도 않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잘 사니까요. 더 이상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풍성하게 잘 사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 때가 우리 영혼이 죽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똑바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왜 오늘 우리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소중하신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만 가지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영혼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의미를 가슴에 담고 “성령님의 사랑”에 대해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들어도 보았고 어느 정도 감이 잡히지만 성령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성도들이 무관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오늘 부디 마음 귀를 여시고 들어서 믿음을 만들고 그 믿음으로 하늘 복을 따내는 신령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회개하게 하십니다
(행2:37-3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시51:10-12)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오래 전 우리교회에 남의 부러움을 사는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잘 생긴 두 아들을 가지고 있었고 남편은 그로서리를 아내는 델리를 하면서 남부러울 것이 없는 멋진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남자들이 다 그렇듯이 돈께나 벌고 사회적인 명성이 생기게 되면 그것을 인생 최고의 성공인 줄 알고 거기에 깊이 빠지게 됩니다. 이 집사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한인대표로 한국을 방문하고 한인사회의 유지행세를 하면서 점차 사업에는 소홀히 하였습니다. 제법 잘 나가던 사업을 남의 손에 맡겨놓고 허구한 날 세상의 명예와 만족에 취하여 한국을 드나들다가 결국에는 사업이 망하고 말았습니다. 다운타운에서 부인이 하던 델리도 주변에 동종의 사업체가 들어서면서 서서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닥치니 자식들도 흩어지고 부부도 이혼을 하면서 가정조차도 흐트러지더니 급기야 맏아들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비보까지 들으며 옛 명성은 간데없고 초라하고 쓸쓸한 말년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이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근본은 영혼구원입니다. 이와 같은 본질을 제쳐두고 세상적인 부귀영화나 추구하고 인간적인 명예나 구하며 영혼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결국은 영혼이 파산 나고 마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에 전념하여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루고 사업을 성공적으로 성장시켜 나갈 때 비로소 자신의 명예도 있고 자녀들의 내일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영혼구원에 전력하여 천국 티켓을 확보해 놓은 다음 육진적인 안위를 추구하여야 안정된 영육간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믿음의 결국은 영혼구원이라”고 명료하게 선포해 두셨던 것입니다.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소중한 믿음의 최고봉인 영혼구원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 모두는 제아무리 잘나도 죄인입니다. 그것도 원죄와 자범죄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완벽한 죄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한 순간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들이 남을 비난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그 얼마나 남을 죽일 듯이 비난하고 자신은 완전한 듯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회개해야만 합니다. 그 죄를 용서 받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구원을 받으려면 이와 같은 회개 외에는 도무지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찔려 탄식하는 그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외쳤던 것입니다.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말입니다.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와 같이 회개는 천국문을 여는 가장 필수적인 열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천국으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잊고 살아왔던 회개가 영적인 삶에는 이렇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회개를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도 중요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님은 오늘 우리들의 영원한 사랑이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나 베드로는 동일하게 다 예수님을 배신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의 제자로 쓰임을 받았으나 유다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이 두 사람의 극명한 차이는 바로 회개에 달려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회개를 하였으나 가룟 유다는 불행하게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이토록 회개하며 구원의 기회를 얻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말씀이고 말씀이 또한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는 곧 우리들을 향하신 고귀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게 하십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들의 구원의 두 번째 단계는 회개한 깨끗한 영혼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들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행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곧 죽어도 부르지 못합니다. 아니 부를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부르는 “주님”이라는 이 한 마디가 우리들이 잘나서 그리고 너무나도 오랫동안 입술에 젖어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성령님께서 그렇게 부르도록 역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신앙생활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몰라서 그렇지 만 가지가 다 성령님의 도우심이요 역사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사가 잘 되어서 형통하여도 여러분의 공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들의 잘못 때문만은 아닙니다. 긴 인생 여정에서,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필요해서 잘 되게 해 주시고 필요해서 못 되게 하시는 줄을 알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며 인내하고 일어서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하나님의 때에 모든 힘들고 기쁜 일들이 합하여 선이 되고 축복이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는 약속의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소리 소문도 없이 안개와 같이 우리 곁에 머물러 주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구원을 완성하여 신자의 기본 축복인 하늘나라를 확보하는 신령한 성도들이 되어가야 합니다. 이 모든 역사가 오직 성령 하나님으로만 가능할 줄 믿고 그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늘 꿈이 있고 희망이 넘치는 내일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21세기는 Battery(배터리)의 시대입니다. 우리들이 들고 다니는 스파트폰으로부터 전기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만사가 움직이는 곳에는 몽땅 이 배터리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수명이 얼마나 오래가며 그것을 충전하는데 얼마나 짧은 시간이 걸리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됩니다. 이는 인간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에 따라 연봉이 달라지고 스카웃 조건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무능한 자는 그 어디에도 발을 붙일 수 없는 그런 능력 만능의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도 어느 나라 어떤 회사가 먼저 백신을 만들어 내느냐에 천문학적인 돈이 걸려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능력 있는 일꾼, 능력 있는 지도자, 능력 있는 직분자가 되지 못하면 스스로 낙오자가 되고 하늘상급을 상실하며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에 기록된 엘리야와 이방선지가 850명과의 대결 또한 누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능력을 행사 하느냐에 생명이 달려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놀라운 성도들의 능력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오순절에 강력한 성령 강림으로 세상이 온통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열다섯 개의 나라에서 모였던 그들이 한 언어로 소통이 가능하게 되었고, 죽을까봐 두려워 예수님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도망갔던 베드로가 그 예수님을 죽인 살인마들 앞에서 외치니 한꺼번에 3천 명씩이나 회개하고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렇게도 놀라운 능력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바로 성령님이셨습니다. 앞서 인용해 드린 말씀 가운데서도 명백하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능력입니다. 성령은 권세입니다. 이와 같은 능력과 권세는 연약한 오늘 우리들을 무섭도록 변화시켜 주십니다. 놀랍도록 새 역사를 만들게 하십니다. 그래서 연약하고 무능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시간적 제한이 있으므로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들의 삶에 어떤 역사를 만들어 주시는지, 두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명 곧 복음을 전하는데 나타나게 되고 다른 또 하나는 우리들의 개인 삶에 나타나는 위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무조건 하나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열정과 노력만으로는 죽어가는 세상 영혼을 결코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놀라운 능력은 오직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인의 가슴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고 성령님께서만 주시는 평안이라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다른 이름은 “보혜사”입니다.
(요14:16-18)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한 말씀 속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우리들을 위로하시고 외롭지 않게 하시며 모든 것이 다 형통하도록 하신다는 약속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나타는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은 평안 그 자체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행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이 종도 평생을 체험하고 확신하는 진리입니다. 20살부터 혼자서 걸어온 목회의 길은 외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힘들고 지칠 때마다 동행하시며 위로와 평안으로 이 순간까지 인도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성령님의 위로와 평안인 것입니다. 말세에는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말세에는 인간들이 자기 자신만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말세에는 환란과 고통이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우리들이 이처럼 살벌하고 악한 이 세상에서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면 가능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성령풍만으로 남은 삶이 평안하고 행복하시기를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