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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랑 (2020년 12월 20일 주일낮설교)

예수님의 사랑

성탄주일

12. 20, 2020

:마가복음10:45

說敎:崔仁

 

미국의 한 아파트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화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주검들 가운데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유독 안타깝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그 집에 아기와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소방대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방대원들은 그들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길을 다 잡고 난 소방대원들은 다시 그 집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아기와 엄마는 화장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기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기를 변기 속에 집어넣고 엄마 자신이 아기의 방패막이가 되어 타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위나 학력을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계십니까? "주님,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숭고한 사랑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느끼며 사십니까?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하는 유일한 사다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바로 그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예수님의 이와 같은 숭고한 사랑과 희생은 사라지고 오로지 인간들의 욕심만이 성탄절을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세의 불행이요 인본주의의 비참한 현실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잊어버린 자식은 효자가 될 수 없듯이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잊어버린 자들은 결코 제대로 된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2020년 성탄절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죄인 하나를 위해 성부하나님과 성령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은 참으로 우리들의 연약한 입술로는 결코 다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그 사랑에 감동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바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오늘은 하늘 보좌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 귀를 열고 주님의 사랑을 배우고, 사는 날 동안 그 사랑에 화답하며 살아가는 멋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바로 인간관계의 파탄입니다. 세상을 다 갖다 줄 것처럼 사랑하던 사람이 한 순간에 그 사랑을 배신하고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한 평생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미국에서는 100쌍이 결혼하면 50쌍이 헤어집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여 결혼까지 하였지만 그 사랑을 끝까지 지켜가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며 배신하고 돌아서는 것이 절반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완전한 인간들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모든 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 속에 있는 사랑 또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사랑에는 유효기간이 있다.’고 심리학자들이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예수님의 사랑에는 우리 인간과 다른 특별한 속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우리 예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의 특성을 요한복음 131절에서 간단하면서도 강력하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들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언제 변할지 모르는 인간의 사랑에 목을 매는 대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예수님의 사랑에 인생을 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배와 그물과 부모님까지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었던 그 예수님께서 악당들에게 붙잡혀 가시자 허망해졌습니다. 또한 자신의 스승님을 잡아간 그들이 자기도 잡아갈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상황이 거기에까지 이르자 그는 미련 없이 그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그 예수님께서 친히 보고 계시는 면전에서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최악의 경우가 배신입니다. 배신자에게 가질 수 있는 기대는 영원히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배신자 베드로가 원점으로 되돌아가 물고기나 잡고 있는 그 갈릴리 호수로 친히 찾아가셨습니다. 그것도 부활하시자 말자 곧바로 말입니다. 그리고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 빈 배를 만선으로 채워주셨습니다.

(21:5-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왜입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도 자신을 배신하고 원점으로 되돌아가버린 못난 이 베드로에게 이처럼 놀라운 기적으로 빈 배를 만선으로 채워주셨을까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허덕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배신자의 빈 배를 가득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밤새 허기지고 지친 그에게 예수님은 친히 떡을 굽고 생선을 구워 아침상을 마련하여 대접하셨습니다.

(21:9-12)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예수님은 바로 그 베드로에게 친히 물어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변절하였던 베드로의 사랑을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도 비록 변하는 한심한 사랑이지만 그래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사랑해야 하고 이웃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공감하는 사랑입니다

(11:35-36)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 하나만 들어보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긴 목회를 통해 하나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공감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가장 작은 단위로 연인에서 시작하여 가정을 만들고 가정에서 직장과 사회로 확장하여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을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해야만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서로 어우러지지 못하게 되면 관계가 깨지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곧 지옥이요 모든 것이 흐트러지는 인생의 최악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가는 것이 삶의 묘책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감능력입니다. 서로 공감하지 못하게 되면 관계가 점차 깨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공감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모처럼 의지하던 오라비 나사로가 죽자 마르다와 마리아는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들에게 찾아가신 예수님은 그들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시고 그들과 함께 울어주셨습니다.

(11:35-36)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슬픔 속의 마르다와 마리아와 같이 눈물을 흘려주시던 놀라운 공감능력을 지켜보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와 같은 공감능력을 사랑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바로 공감능력입니다. 서로 공감하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의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장례식장에서 웃는 사람, 결혼식장에서 우는 사람이라면 결코 공감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은 슬퍼서 우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리 슬퍼하느냐?”고 말한다면 그런 사람하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이 예수님께 올인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서로 따뜻하게 감싸주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상대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공감능력이 없는 안타까운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는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 생각지도 못했던 몸의 구석구석이 아프기 마련입니다. 마음조차도 약해져서 우울해지고 슬퍼집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기가 찹니다. “아빠, 엄마, 늙으면 다 그런 거야!”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 말이 위로가 될까요? 지가 언제 늙어보아서 인생을 잘 안다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그런 자식들 앞에서는 결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벌써 관계가 멀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의 고통과 눈물에 공감해 줄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반갑고 감사한 것입니다. 나와 공감하시려고, 나와 함께 울어주시려고 하늘보좌도 버리시고 이 땅에까지 내려오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만나는 기회가 성탄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은 함께 울어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눈물의 근원을 해결하심으로 근본적인 해답을 제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죽어 끊이지 않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심으로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성탄의 주인공이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험악한 세상은 이와 같은 놀라운 예수님을 자꾸만 지워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그 예수님을 다시 살려내야 하고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된 2020년도 성탄절에 이처럼 나와 함께 공감하시고 나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사랑의 예수님을 온 가슴으로 다시 만나게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풍성케 하시는 사랑입니다

(6:5-6)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6:12-13)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1990년 철의 장막이라고 하던 소련이 해체 되고 온 세상에 개방이 되었을 때 이 종은 바로 그 소련으로 들어가 21일 동안 노방전도도 하고 그곳에 한인 선교사들이 세워 놓은 교회를 탐방하는 귀한 기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정말 놀란 것은 교회가 문을 연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몇 천 명씩 미어터지게 모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인 것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할 일이 없었고 너무나도 가난하여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 그들의 한 달 배급은 미화 20불이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넘쳐나고 삶은 가난하고 비참하던 그들에게 선교사들이 베풀어 놓은 잔칫상은 너무나도 매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가면 선물도 주고 먹을 것도 주고 재밌는 것도 있으니 그들은 벌떼처럼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아마 요한복음 6장에 광경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신선한 한 사람 예수님이 나타나 이적도 행하고 기사도 행하며 평생 듣도 보도 못했던 역사를 베풀어 주시니 가난하고 할 일 없었던 그들은 그렇게도 많이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6장 하반절로 가면 예수님께서 비로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자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만 우두커니 남아 있을 뿐 그들은 다 떠나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셨고 배고픈 그들의 현실을 가슴으로 인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먹이실 방도를 찾으셨고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배부르게 먹게 하신 후 열 두 광주리 가득하게 거두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건을 보면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배고픈 자들의 빈속까지도 살피시는 공감능력으로 그들의 배를 만족하게 채워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남은 부스러기만도 열 두 광주리에 가득하게 된 사랑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지난 금요일 밤에도 말씀 드렸던 것처럼 말로만 하는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행동으로 이웃들에게 유익을 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죄가 됩니다. 예물로 감사를 드리며 예배로 헌신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죄인 된 우리들이 어떻게 감히 다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 분명한 것은 나의 굶주림을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몰라도 하늘의 예수님만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듯 관심입니다. 깊은 관심은 도울 일과 사랑할 일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의 생각까지도 다 아시고 도우시고 해결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들을 이렇게 섬기시려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예수님께서 성탄하시어 이 땅에 오시고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랑에 화답하여 힘차게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탄생하신 성탄절은 오늘 우리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1955년 쉰 살이 넘은 나이에 흑인 최초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관중을 열광시키며 감동적인 노래를 불렀던 여자 가수를 아십니까? 바로 마리아 앤더슨입니다. 공연 후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설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하고 말입니다. 그녀는 하늘을 응시하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일에 부닥칠 때마다 언제나 제 시선은 낮은 자와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께로 향했지요. 그때마다 주님은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하고 말씀하셨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리며 말로 다할 수 없는 희생을 당하시면서도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왜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도 우리들을 사랑하시는지 정확하게 그 해답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탄하시게 되었는지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랑의 주님이 우리들과 함께 하심을 믿고 그 주님을 의지하며 이 세상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굶주리는지, 외로운지, 어디가 아픈지, 과연 그 누가 알아나 줍니까?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의 아주 작은 것 까지도 다 아시고 해결하여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그 사랑을 잊지 말고 그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우리들의 힘겨운 현실을 이겨나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성탄절이 찾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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