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2021년 1월 17일 주일낮설교)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1. 17, 2021

:창세기28:10-15

說敎:崔仁根牧師

 

인생수업이라는 책을 쓴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여사는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상실감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 버리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을 했을 때 가장 고통이 극심하고 그 고통은 삶의 의지를 잃어버릴 만큼 공허하다고 하였습니다. 백 번 공감하는 진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나와 공부하기 위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부모형제를 떠나 생활하였는데 그 때의 그 외롭고 허전함이란 평생을 두고도 잊지 못할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정든 부모형제를 떠나 외로운 타향과 타국에서 살다보니 가슴이 거의 텅 비워버린 듯한 허전함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은 그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를 떠나 머나먼 타향으로 가야만 했으니 그리고 남의 집 종으로 살아가야 했으니 그 외로움과 아픔이 오죽하였겠습니까? 그리고 그 어린 아들을 멀리 떠나 보내버린 부모의 아픔은 또 오죽하였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렇게도 씻을 수 없는 큰 아픔을 부모도 야곱도 가슴으로 겪어야만 하였는지, 그 이유부터 살펴보고 그러한 그들을 하나님은 또 어떻게 케어하셨는지 살펴보면서 우리 인생여정의 아픔과 축복을 하나님과 결부시켜 그 해답을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2021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가 여호와를 기대하라!”는 것이니 말씀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기대하지 않도록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믿음의 세계로 돌아오는 계기로 삼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뜻하지 않는 하나님의 출연으로 이해하기 힘든 야곱의 축복을 엿보게 됩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의 행위가 결코 아름답지 않거늘, 그래서 형과 부모님을 떠나 타향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그와 같은 그에게 나타나시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으로 역사해 주셨는지, 이에 대한 진리를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사는 인생

(25:29-34)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27:34-36)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 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27:41-44)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왔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하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 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야곱은 그 이름 그대로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형 에서의 장자권과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이었습니다. 장자는 인간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아닙니다. 이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같은 어머니의 배속에 머물렀으면서도 찰나의 순간에 먼저 나오지 못하고 나중에 나옴으로 장자권을 형에게 빼앗긴 것을 못내 아쉬워 하다가 결국에는 한 그릇 팥죽으로 장자권을 사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또한 그와 다를 바 없어서 에서보다는 야곱을 편애하고 적극적으로 그 야곱의 속셈을 부추기며 야곱과 같은 방법으로 형의 축복을 가로채는데 일조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이 가정의 불행을 엿보며 어떻게 가족들이, 어떻게 형제들이 저럴 수가 있을까, 하고 비난하거나 판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기꾼이라는 뜻을 가진 야곱은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욕심에 한이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크고 작음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모두가 다 야곱과 같은 모습들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재물의 노예가 되어가고 그렇게 해서 남보다 더 가지게 되면 그것으로 갑질하며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학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욥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면 누릴 수 있고 또한 도로 가져가시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는 부지런히 다니지만 도토리처럼 자신을 허물지 못한 채 욕심이라는 자아 속에 깊이 갇혀서 야곱과 같이 인본주의적 가치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우리들을 라반의 집으로 보내시고 그곳에서 고생하며 스스로를 깨닫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따라오는 고통과 죽음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우리 자아에 대한 대가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속의 야곱을 통해서 오늘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회복의 길을 찾는 참 지혜와 믿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야곱과 같은 인본주의적인 삶의 현장에는 다음과 같은 처절한 인간 본성의 추악한 모습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