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 (2021년 2월 21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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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1 February 2021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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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
2. 21, 2021
本文:에베소서2:1-10
說敎:崔仁根牧師
오래전 워싱턴 D.C. 의 어느 신문에 이런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레티 그랜트라는 여자는 소아마비로 전신이 마비되었습니다.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말하고 듣는 것뿐이었습니다. 자살하려고 해도 어린 딸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좌절 중에 살다가 자신이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발가락 한 개를 가지고 전화국에 전화를 걸어 자신을 전화국의 교환수로 취직시켜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녀는 16년 동안을 전화 교환수로 일을 했습니다. 그녀는 딸을 대학에 보내고 은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은퇴 석상에서 그녀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마지막 말을 “나의 하나님,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녀는 저주스러운 삶 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일생을 생산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변덕도 잘 부리고 겁이 많아 두려움에 떨면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속에서도 교회의 반석을 발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번개의 아들이란 별명까지 붙은 거칠고 급한 성격을 가진 야고보와 요한 속에서 교회의 기둥을 발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나 의심부터 하는 졸장부 도마 속에 역사의 빛을 발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착취와 배신을 일삼던 삭개오 속에서 재생의 희망을 발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잔인한 살인마 바울 속에서 교회의 터전을 발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인간 속에서도 틀림없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받을 아무런 자격도 없는데 갚을 길 없을 만큼 풍성하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쓸모도 없는 죄인을 불러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고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오늘 우리 모두가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사람이나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진리를 공부해 보면서 한 발작 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은총을 사모해보려고 합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엡2:1-3)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하나님의 은혜를 논하기 전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목회를 하면서 참으로 숱하게도 많은 교인들을 만나보았습니다. 잘나지 않은 사람이 없고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녀도 변한 것은 단 하나도 없는 절절히 자신밖에 모르는 그런 교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는커녕, 부모님의 희생과 목사님들의 헌신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자기 자신만 잘나서 끝없이 자신들의 의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모르니 감사가 없고 이웃의 허물과 부족한 것만 보여서 이웃을 판단하고 원수 맺으며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진노의 자식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실을 성경에 기록하시고 오늘 우리들 앞에 내 놓으신 것입니다.
(엡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겸손히 살 길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러질 수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와 같은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그 예수님은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요약해 두었습니다.
(엡2:4-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영육 간에 누리는 것이 결코 우리들의 공로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이와 같은 은혜를 온 몸으로 깨닫고 사랑하는 제자 앞에서도 자신의 신분을 거리낌 없이 쏟아 놓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딤전1:12-14)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보면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깨닫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자신을 씻어 정결케 하시고 불러 사도 삼아주신 것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노의 자식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존재임을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70년대의 한 인기 가수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대마초 사건에 걸려 감옥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3개월가량 징역을 살았는데 거기서 어느 사형수로부터 전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형수의 진지한 전도에 감동을 받아 그는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때 사형수가 “당신은 곧 나가게 되겠지요. 나가면 내가 세상에서 예수님을 위해 못 다한 몫까지 합해서 해주시오.”라고 하더랍니다. 그 가수는 대마초 사건으로 인해서 감방에 들어와 있을 때만 해도 자기가 아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형수 앞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는 자리에 이르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를 모든 악과 고통에서 건져내 주었다고 합니다. 대마초에서 해방을 받았던 것입니다. 출감한 후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왜 사형수가 판사보다 구원받기 쉬운지 압니까. 사형수는 자기에게 대해 절망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 감방 밖에 있을 때 보다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 믿기가 쉬운지 압니까. 감방 안에 들어가면 자기에게 절망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시는 그분의 말씀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는 진지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손을 붙들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이 절망에서 건질 수 있는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들의 죄를 벗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추악한 죄를 씻어내기 위해 예수님은 그렇게도 모진 십자가를 지시고 피와 눈물로 고통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의 근본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은혜의 원천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엡2:4-7)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엡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앞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우리 자신의 본질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다윗은 특별히 이 부분에 매우 민감하였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없으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그렇게 자신의 죄에 절망하였을 때 비로소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먼저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 절망하게 될 때 비로소 그 죄를 대신하여 해결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격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하심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 준 인물이 고통의 사람 욥입니다. 그는 워낙에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긴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극한 고통의 세월을 보내기 전에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다음에서 그의 고백을 먼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욥42:1-6)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이와 같은 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그는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욥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했던 인물이었지만 그가 언제 제대로 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고 나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솔직히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약속도 믿지 못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도 감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난을 다 싫어하지만 고난당하는 것이 축복임을 욥과 같이 깨닫고 고백하게 될 때 비로소 천금보다 더 귀한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진정한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고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음을 선포하고 난 후에 비로소 하나님에 대해 분명한 진리를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엡2:4-7)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이치를 다 모른다고 해도 우리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만은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는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와 같은 긍휼과 사랑으로 진노의 자식들에서 축복의 자녀들도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께 충성되고 이웃들에게 빚 갚는 자세로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의 삶은 모든 것을 거저 받았기에 거저 주는 삶으로 거듭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은혜 받은 자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나이가 채 30세도 되지 않아서 모교의 신학부장이 되었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의 기쁨에 잠겨 있던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침의 밝은 햇살에 눈을 떴다. 내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나는 결코 이것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죄악이다.” 감사하고, 역사 앞에서 은혜 받은 자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조지 이스트만 씨는 유명한 코닥회사의 창업자인데, 아버지를 너무 어려서 여의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남의 집 파출부 노릇을 하면서 자기와 여동생 둘을 키웠는데,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일하러 가실 때에도 아이 셋을 맡아 줄 사람이 없어 늘 데리고 다녔는데, 어린 조지의 기억에 남은 것은 다음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첫째는 잠시도 쉬지 않고 남의 집 마루를 닦고 빨래를 하는 어머니의 근면한 모습이었고, 둘째는 어머니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신 한 마디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을 위해 일한다. 너희들도 크면 너희들 자신을 위해 일하지 말고 남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 되라.” 그래서 조지 이스트만은 책상머리에다가 다음과 같이 적어 놓고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라고 말입니다. 이 두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화답하는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로만 고백할 것이 아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 헌신적으로 거저 주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렇다면 죄로 영원히 죽어야 마땅한 우리 죄인들에게 하나님은 왜 그렇게도 놀라운 은혜로 끊임 없이 베풀어주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들의 구원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지시는 관심은 오직 하나 우리들의 구원입니다.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성도들의 관심은 이 구원이 아닙니다. 오직 이 세상에서 잘 되고 부자 되고 출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적인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영혼입니다. 다음과 말씀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뜻을 정학화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나님은 우리들의 영혼이 잘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에서 해방 되고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무런 공로 없는 우리들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죽을 수밖에 없는 무서운 죄를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이처럼 영혼구원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시고 오래오래 건강하고 장수하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를 바로 알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 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에 화답하는 진정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한 소년이 길을 가다 기진맥진한 흑인 노인을 만났습니다. 그 노인은 숨을 불규칙하게 몰아쉬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집이 어디세요?” 하고 소년이 묻자 노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힙 없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집도 자식도 없다네. 고향은 있지만 그곳에 가도 옛 친구들이 다 세상을 떠나서 만날 수도 없어. 내가 갈 곳은 오직 한 곳 천국뿐이란다.” 라고 말입니다. 세월이 흘러 소년이 청년이 되었을 때도 그는 어릴 때 만났던 그 흑인 노인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그 때를 회상하며 불후의 명곡을 지었습니다. 그 곡이 바로 오늘 우리들도 너무나도 잘 아는 “올드 블랙 조”입니다.
미국 민요의 아버지인 포스터(1826-1864)의 이야기입니다. 몸은 병들었고 고향의 친구들은 이미 세상을 다 떠나버렸고 가진 것도 없이 이 세상에 몸뚱아리 하나만 가련하게 남아 있어도 천국에 소망이 있는 것은 그 영혼이 구원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 돌아갈 천국만이 커다랗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 천국 티켓을 마련하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