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 (2021년 2월 28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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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8 February 2021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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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2. 28, 2021
本文:로마서5:6-11
說敎:崔仁根牧師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핍박 속에 살아가는 한 유대인 아내가 고된 삶을 탓하며 남편에게 이런저런 불평을 합니다. 그러자 남편은 잠자코 듣고 난 뒤 한 마디 묻습니다. “당신 날 사랑하오?” 아내는 질문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시집 와서 25년 동안 아이 낳고 어려운 살림살이를 해온 것을 계속 한탄합니다. 남편은 묵묵히 듣고 나서 다시 묻습니다. “그건 다 내가 알지. 그런데 당신 정말 나를 사랑하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숱한 고생과 봉사를 했어도 후회요 불평뿐이라면 사랑이 아닙니다. 진실로 사랑했다면 불평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사랑했으면 억울하지 않습니다. 불만이 없습니다. 진실로 사랑했다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바로 이 행복한 수고, 자랑스러운 고생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이와 같은 사랑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오고 희생이 지속되거나 마음에 아픔이 남으면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끊임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사랑을 통해서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측량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일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4:11-12)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단순하게 이웃에게 유익을 주고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해야 하나님을 알고 사랑을 해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계신다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제대로 된 신자들이라면 제대로 된 사랑부터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진정한 신자임을 입증하는 객관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들을 먼저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공부해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 받고 우리들의 삶에도 뜨거운 사랑의 봄기운이 깃드는 축복이 함께 하도록 말씀을 증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불행하게도 너무 큰 것이나 너무 작은 것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볼 수가 없고 지구가 돌아가는 엄청난 소리 또한 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상적이고 외형적인 것만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또한 너무 크면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머리로는 알 것 같은데 실제로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고 근심과 걱정을 끼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로는 알 것 같은데 실제로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해 두시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들을 사랑하시는지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요한복음 3:16의 말씀이나 로마서 5:8의 말씀이 그래서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고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귀하게도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와 같은 하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생명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세상의 이치는 몰라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만큼은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깨닫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구원자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보내 주신 것은 독생자 예수님보다 죄인 된 우리들을 더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험악한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렇게도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17세기의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그 구멍은 세상적인 쾌락이나 물질로, 명예나 권세로 채울 수 없다. 그럴 경우 오히려 실망과 불만족과 허무만이 남게 된다. 오직 그 구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끝없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실 때에만 진정한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충만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 그 자체가 바로 선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가슴처럼 넓은 가슴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슴은 열려진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적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미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기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삶에서 사랑하는 모습보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은 달리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도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복음은 바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잘못 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없으며 성도는 사랑의 역사를 남길 사명을 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저절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거운 대가를 내가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셨고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은 자기 자신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은 희생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이야기는 바로 희생의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에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희생의 가장 귀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말세는 사랑이 없는 시대라고 했습니다. 말세는 자기를 사랑하는 시대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자기 사랑은 참 사랑의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즉 희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자기희생을 바탕 하지 않는 사랑은 남의 희생을 강요하는 자기 사랑의 길로만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두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사명을 감당하라는 사랑의 의무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성도는 사랑이 식어져 가는 이 시대에서 사랑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요 사랑하는 마음이 넓어서 원수까지 사랑한다면 복되고도 복된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성장해야 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먹고 사랑하기 위해서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말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만나야 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살고 사랑하기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도록 사랑만 하다가 사랑의 주님 앞에 서야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는 사랑의 이력서를 주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일생을 이력서로 만든다면 바로 사랑의 이력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짧은 생애가 그토록 감동을 주는 것은 주님은 사랑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성도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본 받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갈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없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마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랑을 더듬어 보면 한 마디로 용서의 사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한 여자 때문에 당하신 예수님의 고역은 참으로 進退兩難(진퇴양난)이었습니다. 돌로 쳐 죽이라고 기록된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면 평소에 늘 사랑을 실천하라고 가르쳐 오신 예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요 그렇다고 용서해 주어라고 하면 자신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해 놓고 스스로 율법을 어긴다고 비난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게 한 그 여인이 예수님은 얼마나 얄밉고 원망스러웠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심으로 지혜롭게 대처하셨고 마음에 가책을 받은 잔인한 자들이 다 떠나간 자리에서 그 여인과 둘만 남게 되자 예수님께서 따뜻한 음성으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타일러 보냈습니다. 이 광경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의 따뜻한 사랑이 온 몸으로 덮어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보는 면전에서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떠나버린 베드로도 예수님은 용서하시고 사랑하시어 “내 양을 먹이라”고 또 다시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던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용서하시며 우리들을 사랑하시겠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의지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요 사랑이 있다면 그 어떤 잘못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하지 못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원수를 갚고 앙갚음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마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이웃을 부모에 버금가는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중하게 또 경고하십니다.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입니다.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소중한 삶을 원수 갚는데 허비하고 망가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차원 높은 명령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이렇게 원수 갚다가 자신의 삶 또한 비참하게 망가져버린 불행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잘 압니다. 결국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자신이 복되게 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짧은 인생에서 최고로 잘 사는 길은 이처럼 사랑하고 사는 길임을 하나님은 정확하게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리챠드 범브란트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나타내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루마니아의 어느 교도소에서 약 30명의 그리스도인과 함께 지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새로 죄수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감방의 어둠 속에서 그가 누구인가를 알아보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를 알아보고 나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꽤 알려진 비밀경찰의 우두머리로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고 감옥에 집어넣은 악질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왜 이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말했습니다. 어느 날. 근무 중이던 한 군인이 그에게 와서 열두 살 먹은 소년이 꽃을 들고 와서 그를 만나고자 한다고 전했답니다. 그래서 그는 호기심에 그 소년을 들어오게 하자 소년은 들어와서 수줍게 말했답니다. “대령님. 대령님은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체포했어요.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이에요. 생신 때마다 저는 어머니께 꽃을 드리곤 했지요. 그러나 오늘은 대령님 때문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가 없게 되었어요.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이세요. 항상 저에게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그리고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어머니를 만날 수가 없으니 이 꽃을 대령님의 아이들의 어머니에게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사모님에게 전해줄 수 있으세요?” 대령은 꽃을 받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 소년을 껴안았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고 더 이상 무죄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고통을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는 자가 되어서 우리와 함께 감옥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상대를 존귀하게 여겨줍니다
(사43:1-4)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모든 성경 말씀이 다 감동을 주지만 이 말씀처럼 가슴이 저리도록 감동을 주는 말씀도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죄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의 피를 지불하시고 구속하시어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시기까지 사랑해 주셨다는 하나님의 고백이 가득 담겨진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귀하게 여기시고 물도 불도 우리들을 해하지 못하도록 지켜주겠다는 약속까지 겸하고 있으니 더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감동적인 것은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까지 하셨던 하나님 편에서 보신다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들과 같이 초라한 죄인들을 “보배롭게 존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시니 숨이 턱 막힐 만큼 감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들과 같은 허물투성이인 죄인들을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표현하실 수가 있을까요? 그 대답은 의외로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이쁘게 보이나 미워하면 모든 것이 밉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미국이란 거대한 땅에서 살고 있는 한국 이민자들입니다. 객관적으로 우리들의 외모나 지식이나 매너에 있어 우리들의 위치는 미국 백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와 있을까요? 동양 특유의 모습과 냄새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마이너리티(Minority)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은 하늘 같은 땅에 살아도 이렇거늘 하늘의 하나님의 편에서 본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초라하고 못난 존재들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하나님은 이와 같은 우리들을 “존귀하고 보배롭게 여긴다.”고 하시니 눈물 날 만큼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상대를 존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반대로 미워하면 함부로 대하고 하대하게 됩니다. 과연 어떤 것이 아름다운 인간관계와 행복을 만들어 가는데 더 유익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서로 사라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이 땅에 함께 살아가고 있을 동안 서로 존귀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철없을 때는 자기 잘난 맛에 살고 남보다 더 누리는 것으로 자만하며 살지만 결국 늙어서 이 세상을 떠나갈 때에는 그런 것들이 다 부질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는 서로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많이 있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고 최고의 인생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인생이 바로 이렇게 살아야 함을 아시기에 “서로 사랑하라!, 서로 존귀하게 여기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겸허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조금은 바보처럼 상대를 높여주고 귀하에 여기며 살아가는 진정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