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빌립보장로교회

-- 성령의 열매맺는 교회 --

Tue04162024

Last update12:00:00 AM

Font Size

Profile

Menu Style

Cpanel
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하나님의 희생 (2021년 3월 28일 주일낮설교)

하나님의 희생 (2021년 3월 28일 주일낮설교)

하나님의 희생

고난주일

3. 28, 2021

:출애굽기12:1-14

說敎:崔仁根牧師

 

최초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은 잘 알다시피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

dale)입니다. 영국의 경건운동과 개혁운동에 불을 당긴 그는 불행하게도 1536106일 금요일에 성경을 영어로 옮긴 업적 때문에 도리어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그 거룩한 성경을 속된 세상의 언어로 바꾸어 놓았다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75년이 지난 1611년에 그의 번역을 기초로 하여 흠정역(The Authorized Version)이 제임스 왕(King James)의 출판 인허에 의하여 발행되었습니다. 그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0개가 넘는 서로 다른 언어와 방언으로 성경이 번역 되고 인쇄되었는데, 이일에 있어 그는 선구자였던 것입니다. 비록 틴데일의 몸은 불태워졌으나 그의 사역은 축복의 성경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자기말로 번역하는 것이 불경의 죄가 되었던 시대에 그는 일찍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뜨고, 그것을 모든 신실한 성도와 또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불태웠던 것입니다. 태워 사그라진 잿더미 속에서 의롭게 피어난 장미처럼 그가 목숨을 버려 행한 일은 지금까지 살아 번역된 말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여전히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고 있습니다. 촛불의 희생처럼 말입니다!

(8:19-24)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라는 말씀과 같이 진정한 신앙인의 삶은 이렇듯 희생하며 진정한 미래의 꿈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2021년도 고난주일을 맞아 우리를 위해 소중한 생명을 희생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 모두 자기의 유익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삶을 떠나 주님과 이웃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소중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타락한 인생은 고난에 사로잡힌 채 죽어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5:7)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1:8-14)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를 엄하게 하여 고역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역사가 다 엄하였더라

출애굽의 역사는 단순한 히브리 민족들의 탈출 기록만이 아닙니다. 이를 영적으로 해석하면 바로 인생사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요셉의 덕분에 참으로 편안하고 풍요롭게 애굽에서 흉년의 위기를 넘기고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복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는 창조 이후로 낙원에서 복락을 누렸던 인류로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바로가 나타났을 때부터 평안은 사라지고 고통과 눈물만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기하급수적으로 번성하던 이스라엘 민족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박해를 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사탄 마귀의 유혹으로 넘어진 인생들이 이마에 땀이 흘려야 살아갈 수 있었고 해산의 고통을 당해야만 했던 형별과 맞먹는 내용입니다. 그러다 끝내는 죽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성경에 남겨 두셨는데 그것이 바로 욥기 5:7의 내용입니다.

(5:7)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낢 같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고생 한 번 안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이 땅에 태어나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는 사람 또한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인생들이 가지고 나온 원죄와 살아가면서 만드는 자범죄 때문이라는 사실은 이제 우리 모두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땅에 왜 오늘과 같은 고난주일이 존재하는 것입니까? 우리들을 위해 고귀한 살을 찢고 피를 쏟아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 고난을 가슴으로 되새기며 그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이 땅에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악한 죄인으로 심판하시는 대상은 바로 이와 같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죄인 것입니다.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고후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주일에 오늘 우리들이 가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교훈은 우리들을 위해 목숨도 내 놓으신 예수님을 얼마나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는지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와 같은 예수님을 자랑하고 전하지 않는 죄가 실로 크고 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모든 말씀 또한 그 초점이 여기에 맞추어져 있음을 우리는 또한 확실하게 알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그 놀라운 희생과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으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오히려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깨닫고 감사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변화되고 새로워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야 그토록 놀라운 희생과 사랑으로 우리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빛을 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십니다

(3:7-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소외 되고 고통의 늪에 빠져 있을 때 가장 힘들고 외로운 것은 그 누구도 우리들의 고통을 알지 못하고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많은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서 절망하고 급기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엊그제께도 택사스에서 단순하게 아시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산만한 등치의 흑인들에게 몰매를 맞고 꺼지라!”는 더러운 모욕을 받은 한인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지난 317일 휴스턴에서 미용용품을 운영하던 59세의 한인 여성은 여자 흑인 5명으로부터 온가 모욕과 폭행을 당해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고 가게 또한 진열대를 쓰러뜨리고 가발을 사방으로 집어 던져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가슴 아프지 않습니까? 누가 이런 아픔과 고통을 대신해 주고 위로해 주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외롭고 슬픈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의 눈을 열고 이런 때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인용해 드린 출애굽기 3장의 말씀을 곱씹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엄청난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친히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무슨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바로 성경에 정확하게 기록해 놓으시고 그대로 실천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를 보내시고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시려고 바로의 기를 꺾으시고 해방과 자유를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경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때 히브리 민족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과도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 때 바로의 기를 꺾으시고 히브리 민족들을 구원하여 주셨던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도 악한 세력들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을 믿고 이것을 확신하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올 해의 우리 교회 표어는 이와 같은 여호와를 기대하자!”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도와 줄 사람 없고 약하고 모자라서 설움도 받고 손해도 보지만 이 모든 것을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임하시고 히브리 민족들을 출애굽 시키시듯 오늘 우리들도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믿고 위로와 소망을 가지라고 오늘 본문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한 젊은 엄마가 선교사에게 외쳤습니다. “빨리 좀 와 주세요! 우리 아기가 죽어가고 있어요.” 게일 필드 여사는 이래얀 자야 지역에서 남편 필이 오르야 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할 수 있을 때마다 의료봉사도 겸하여 하였습니다. 말라리아에 걸린 아이를 들여다 본 게일은 자기에게 이 아기를 치료할 수 있는 마땅한 약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아기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어쩔 수가 없군요. 이렇게 작은 아기에게 맞는 약이 없어요.” 그러나 게일은 잠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위해서 기도는 할 수가 있지요.” “뭐든지 아기에게 좋은 것이면 다 해 주세요.”라고 아기 엄마가 부탁했습니다. 게일은 아기를 위해 기도를 한 후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얼마 후에 그 엄마의 부르짖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습니다. “선교사님, 빨리 와서 우리 아기를 좀 보세요!” 게일은 최악의 경우를 예상해 보며 아기에게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기가 많이 나아진 것이었습니다. 위험했던 열이 내렸습니다. 후에 게일은 말했습니다. “오르야의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 후로 자연스럽게 기도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응답 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나기를 기도했는데, 그 기도대로 자신들도 믿지 못할 일이 베드로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하나님은 어떤 방식이로든 우리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존귀하신 우리들의 아버지이십니다.

(12:2-5)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12:7-12)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라는 초자연적인 역사와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살려내시기 위해 예수님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2:5-7)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데는 하나의 거룩한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였습니다. 우리들은 몽땅 다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의 DNA가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전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질기고 무서운 죄를 해결하는 데는 오직 하나의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시대에는 양의 피였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피였습니다. 엄격하게 따지면 양의 피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피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아예 성경은 단언하고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9:22)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예수님을 피 흘림의 희생자로 세우시고 우리들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 악당들에게 잡히시고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죄가 있어서 그렇게 희생이 되신 것은 더 더욱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 우리들의 죄악을 씻어 없이 하시려고 대신 희생의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들을 억압하고 놓아주지 않는 바로를 치기 위해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죽이실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같은 해가 미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의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양을 잡고 그 피를 받아 문설주에 발라두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를 치시는 하나님의 사자가 그 집의 피를 보고 그 집에는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는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양의 피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장차 오실 예수님의 피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오셨던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자 그 첫 마디로 외쳤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1:29)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해 마땅히 죽어야 할 오늘 우리들이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들을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셨던 것입니다. 이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부탁을 하십니다. 우리들도 한 알의 밀알과 같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히라고 말입니다.

(12:24-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고 말입니다. 이 엄숙한 고난주일에 우리 모두 이와 같은 희생정신으로 우리 예수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한 알의 밀이 되는 고귀한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처럼 우리들이 스스로 잘 살려고 한다고 잘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죽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살리시고 더욱 풍성케 하시면 풍성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것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Add comment


Security code
Refre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