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임재 (2021년 4월 4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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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04 April 2021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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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
부활주일
4. 4, 2021
本文:누가복음24:13-27
說敎:崔仁根牧師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2021년도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죄인들도 다시 사는 진정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 신자들도 다시 살 수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따르느라 희생한 우리들의 모든 삶은 결국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역설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습니다.
(고전15:17-22)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이와 같은 부활의 기본적인 진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와 같은 부활의 기본적인 진리를 중심으로 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들과 함께 거하시지 아니하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셨는가에 대한 또 다른 진리 하나를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 오직 40일만 이 땅에 머무시다가 하늘나라로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먼저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요16:5-8)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자 말자 우리들 곁을 떠나가셨는지에 대한 정학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성령으로 임하시고 영원히 함께 거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계셨던 예수님은 언제나 시공간에 제한을 받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고 나흘이나 지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마르다는 탄식어린 원망을 숨김없이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계셨더라면 우리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1:21)고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임재”라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에게 임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부활 승천하신 다음 예수님은 이렇게 임재하신 경우가 성경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몇 가지만 발췌하여 살펴보면서 임재에 관한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눅24:13-16)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절망과 슬픔에 빠진 제자들은 예수님도 돌아가시고 살벌하기만 한 예루살렘을 아예 등지고 엠마오로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뜻밖에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임하시고 함께 동행해 주셨습니다. 진리를 알지 못해 절망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바른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근심으로 눈이 멀고 절망으로 시야가 가리워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부활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은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큰 슬픔에 젖어버리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20:14-15)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그랬습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는 그 큰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듯 계속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시야를 막고 있으니 곁에 서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제자들도 마음의 눈이 어두워 근심과 슬픔에 잠겨 있었으므로 곁에 서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따뜻하셔서 그와 같은 그들을 이해하시고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자세하게 자신에 관한 성경의 진리를 풀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눅24:44-49)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슬픔과 근심에 사로잡혀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진리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그들에게 임재하시고 진리의 성경을 소상하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 복된 부활의 계절에 오늘 우리들에게도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말씀으로 돌아가는 은총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들의 시대는 양식이 없어 기근이 아니요 마실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이 없어 기근이요 기갈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암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주님을 버리고 물고기나 잡고 있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요21:1-5)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맡겨주신 그 고귀한 사명도 버린 채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때로 되돌아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선포한 이 어리석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왜 친히 임재하시고 그의 초라한 빈 배를 채워주셨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사명을 깊이 깨닫고 그 사명을 더욱 힘 있게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21:15-17)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놀라는 사실은 그렇게도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원점으로 돌아 가버린 이런 초라한 베드로를 단 한 마디도 책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밤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채 지친 그에게 만선의 축복과 친히 준비한 조반을 먹이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모범을 친히 보여주신 다음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사랑을 확인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제자들을 다시 사명자로 만드는 것도 사랑이고 버렸던 사명을 다시 짊어지는 것 또한 사랑입니다. 오늘 부활주일에 우리들도 이와 같은 주님의 사랑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사랑이 없는 모든 것은 다 거짓이고 이기적이고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을 잡아 죽이러 가던 사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행9:1-5)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살인마 사울을 찾아가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비참하게 돌로 쳐 죽인 사울은 피 맛을 본 하이에나처럼 스데반과 같은 극렬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급기야는 정식으로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챙기고 합법적으로 신자들을 잡아 죽이려고 나섰습니다. 바로 이 때 부활의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도 잔인한 살인마에게 임재하셨을까요? 그와 같은 자도 예수님께서 친히 쓰실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행9:10-16)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임재는 목적 없이 임하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뜻하신바 목적이 있었습니다. 살인마와 같은 사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선량하고 준비된 인물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을 텐데 하필이면 살인마 사울이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들과 달라서 친히 그와 같은 사울을 찾아가시고 기적 같은 역사로 하나님께서 친히 쓰실 그릇으로 구별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배워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사람을 보는 것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솔하게 사람을 판단하거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이 시대는 하도 악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도 가차 없이 판단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의 친구들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함부로 입을 놀리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살인마 사울을 비난하지 않을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같은 제자도 주님 앞에서 장황하게 사울을 비난하고 판단하지 않았습니까? 이 영광스러운 부활 주일에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도록 결단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예”만 할 것이요 “아니요”하지 말아야 할 것과 모든 것을 다 모르는 어리석은 자신을 인식하고 쉽게 사람을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결단하는 은총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을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 앞에서 이 정도는 해야 비로소 작은 영광이라도 돌려드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