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 (2021년 4월 18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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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8 April 2021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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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
4. 18, 2021
本文:욥기1:13-22
說敎:崔仁根牧師
《십계》(영어: The Ten Commandments)는 1956년 미국에서 개봉한 서사 영화입니다. 세실 B. 데밀이 감독을 맡았고, 파라마운트 픽쳐스와 세실 B. 데밀 프로덕션이 공동으로 제작했던 이 영화는 찰턴 헤스턴, 율 브리너, 앤 백스터, 에드워드 G. 로빈슨, 이본 디 카를로 등이 주연한 걸작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시내산에 머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는 명장면들로 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을 영화화 하였던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게 된 배경까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창세기는 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거의 완벽하게 기록하여 두고 있습니다. 우연히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으로 이주하여 간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숨은 계획에 따른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 사건의 주인공으로 선택된 인물은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취하였던 네 명의 아내들 중에서 가장 사랑하였던 아내 라헬이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그 아들을 다른 아내가 낳아 준 열 명 보다도 더욱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그것이 비극이 되어 배다른 형들이 시기하게 되었고 급기야 그들은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보부상들에게 팔아버리고 아버지께는 들짐승들이 먹어버렸다고 거짓말로 보고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는데 주인의 신용을 얻어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순진한 요셉을 유혹함으로 인해 요셉의 불행은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뿌리친 요셉을 분노한 여주인이 감옥으로 보내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던 중 왕궁에서 왕의 심판을 받고 들어온 죄수들이 두 사람 있었는데 그들의 장래를 예언해 준 한 사람이 다시 복권이 되어 왕궁으로 들어가고 그 사람의 소개로 왕 앞에 요셉이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왕이 꾼 꿈을 애굽의 모든 지혜자들도 해석하지 못하는데 오직 요셉이 해석하여 애굽 나라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면서 요셉이 순식간에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등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별한 그의 지혜로 7년 동안 극심하게 임하게 될 흉년을 미리 감지하고 풍년의 때에 흉년을 대비하여 비축한 양식으로 애급은 물론이고 고향의 부모형제까지 구원해 내는 기적을 이루게 되어 급기야는 왕의 선처로 아버지,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와 모든 가족 70여 명을 애굽으로 이주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430년 동안 애굽에서 거대한 이스라엘 민족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요셉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애굽의 바로 왕이 급성장하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말할 수 없는 노역과 핍박으로 일관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어 출애굽 시키셨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요셉의 행적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그를 애굽에 팔아버렸던 형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요셉 앞에 나타나게 되는데 그 때 요셉은 자신을 애굽으로 팔아버렸던 형들에게 충분히 보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을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형들 또한 요셉이 반드시 자신들을 보복할 줄을 알고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시자 두려움에 떨며 요셉 앞에 나아와 엎드려 용서를 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와 같은 형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연민을 가졌으며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까지 잘 섬기겠노라고 약속하며 형들을 위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어째서 요셉은 자신을 그렇게도 비참하게 만들어버리고 아버지 야곱은 사랑하는 자신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 속에서 세상을 살아나왔는데 그들을 보복하지 않을 뿐더러 용서하며 더 큰 사랑으로 거두어 주었을까요?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요셉의 진정한 믿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든 만사를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애굽으로 판 사람들이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 불러 위기를 넘기게 하시고 더 큰 민족을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45:4-5)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성도는 환경과 사람을 탓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힘든 일도 감사한 일도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신앙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진정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권자이십니다
(신10:14-17)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느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라합은 비록 여리고성에서 기생으로 살아가는 천한 여인이었지만 그의 가슴에는 귀동냥으로 들은 하나님에 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여리고성이 아무리 든든하고 철옹성 같아도 그 하나님께서 마음만 잡수시면 언제든지 무너뜨릴 수가 있고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곳을 정탐하러 왔을 때 그녀는 목숨을 걸고 그들을 숨겨주고 훗날을 보장 받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 라합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2:8-11)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上天下地(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만물을 만드셨고 친히 그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고 바꿀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권능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권세 혹은 권위”라는 뜻입니다. 한때 그릇된 시기와 질투로 하나님의 이와 같은 권위에 도전하였다가 땅이 갈라져 그 속으로 빠져 죽었던 고라자손들은 훗날 하나님께 대한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그와 같은 주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였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시89:11-13)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 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남북을 주께서 창조하셨으니 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을 인하여 즐거워하나이다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으시니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신자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을 노래하고 그 주권 앞에 굴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에 도전하고 망하지 않은 자가 없음은 우리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를 위해 만물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욥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도 그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렸던 것은 그가 당한 모든 일들이 가슴 아파도 친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최고의 믿음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주권자이십니다
(신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삼상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성군 다윗은 비록 자신이 이스라엘의 권세 높은 왕이었지만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엎드러지고 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생각으로도 토를 달지 않고 순종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아들을 낳았으나 웬일인지 그 아이는 병이 들었고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식음을 전패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아이를 위하여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신하들은 그러한 왕으로 인해 근심이 가득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끝내 그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모든 신하들은 더욱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왕이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도 식음을 전패하였는데 이제 그 아이가 죽었으니 왕이 어떻게 할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아들이 죽자 딴 사람같이 변화하였습니다. 식사 준비를 하라고 명하고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전에 없이 밝고 맑게 일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신하들이 물어보았습니다. 아이가 죽었는데 어찌 왕께서는 식사를 하시고 얼굴에 수색이 없으시냐고 말입니다. 바로 이때 다윗 왕이 대답한 내용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삼하12:21-23)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 인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죽이시고 살리심이 사람의 뜻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윗은 깊은 신앙심으로 인정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위대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 소중한 생명 줄을 쥐고 계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믿음이 있다면 이와 같이 생명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잘 보이고 사랑과 인정을 받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느브갓네살 왕과 다니엘의 관계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소중한 생명이 바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새삼 배울 수가 있습니다.
(단6:19-23)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가서 다니엘의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는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물어 가로되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느브갓네살 왕이나 다윗이 한결 같이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려고 해서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싸게로 생명을 보호하시면 이렇게도 기적 같이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생들은 생명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착각하고 그 소중한 것은 젖혀놓고 육신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권세와 재물을 얻기 위해 소중한 생명을 희생하는 우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은 아간이나 문둥병에 걸려 죽은 게하시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러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들은 깊은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루하루 그 소중한 생명을 연장시켜 주심에 감사드리며 그 소중한 삶을 값지게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삶을 주관하십니다
(욥1:21-22)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대상29:11-12)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는 욥이라는 사람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사실을 그의 고백에서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10남매를 다 잃어버리고 그 많던 재산을 또한 다 잃어버렸는데도 단 한 마디의 원망도 없이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렸다고 하니 오늘 우리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어떤 존재인지는 낳고 키워본 부모라면 다 알 것입니다. 열이 아니라 열 중에 하나만 죽어도 부모의 삶은 지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이 다 죽었다면 부모가 과연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와중에서 욥은 고백합니다.
(욥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고 말입니다. 참으로 욥은 오늘 우리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렇듯 욥은 삶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100% 인정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것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욥의 말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양말 한 짝도 신지 않고 맨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을 다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고백하며 감사드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때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주신 그것들을 다시 거두어 가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며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실제로 다윗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들판에서 양이나 치고 있던 작은 목동에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왕으로 군림하였으니 더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그가 말년에 다음과 같이 그 하나님을 노래하였습니다.
(대상29:11-12)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고 말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는 배경에는 자신이 모았던 재산 중에 금 3천 달란트와 은 7천 달란트를 하나님께 바쳐드리고 난 다음에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해 보면 자신이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셨기 때문이요,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며 자신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왔던 것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것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애틀에서 남보다 더 잘나고 누리며 살아도 그렇게 생색을 내고 사람 무시하며 설치고 다니는데 한 나라의 왕이 되어 평생을 살아온 다윗이 이렇게 모든 영광과 권세를 오로지 하나님께만 돌리고 있으니 그가 얼마나 위대한 신앙인이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믿음의 기초를 만드는 매우 소중한 가치관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바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정성을 모아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고 다윗과 같이, 욥과 같이 복을 누리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