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5일 주일낮 설교 (인생의 뒷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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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Wednesday, 08 August 201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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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뒷맛
8. 5, 2012
本文:사무엘하2:24-28
說敎:崔仁根牧師
人生無常(인생무상)이라고 했던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어 이 세상의 첫 왕으로서 한 세상을 풍미했던 사울 왕이 그만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우습게 여기는 교만에 빠졌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갑자기 왕이 죽자 이스라엘 나라는 급격히 혼란에 빠져들고 맙니다. 사울 왕의 아들 이스보셋을 옹위하고 왕으로 세우려는 일단의 무리들과 다윗을 죽이려던 사울 왕에게서 돌아서 다윗을 중심으로 다윗을 왕으로 세우려는 무리들로 나뉘어 극렬하게 싸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의 상황을 요약하여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사무엘하서입니다.
삼하2:8-11 사울의 군장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 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서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 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더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비로소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 사십세며 두해 동안 위에 있으 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이 된 날 수는 일곱 해 여섯 달이더라
는 말씀과 같이 한 나라에 두 왕이 존재하게 되었으니 그 혼란이 어떠하였겠는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또한 두 나라의 두 군사들이 충돌하여 격렬하게 싸우던 중 발생한 한 사건을 기록해 둔 내용입니다.
삼하2:17 그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그들은 한 왕 밑에서 함께 충성하던 같은 심복들이었는데 이렇게도 격렬하게 싸우는 비운의 백성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을 따르던 용사들이 사울을 따르던 용사들보다 강하여 사울을 따르던 군사들이 점점 위축되고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다윗의 심복이던 요압장군 용사들이 사울의 심복이 되었던 아브넬과 그 용사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작은 산꼭대기로 몰아 붙였습니다. 독 안에 든 쥐와 같이 산꼭대기로 도망갔다가 포위를 당하게 되자 아브넬이 한 때 사울 왕 밑에서 동료 장수였던 요압 장군에게 하는 말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삼하2:26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가로되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 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
라는 말과 같이 아브넬은 참으로 동료 장수에게 비장한 한 말을 던진 것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많이 意譯(의역)이 되어 있어서 가슴에 와 닿는 말 같이 느껴지지 않지만 영어 RSV에서는 보다 더 알아듣기 쉽게 번역이 되어 있어 이해가 더 쉽습니다. 그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Do you not know that the end will be bitter. 이를 그대로 한국말로 직역하면 “그 마지막이 쓸 것을 알지 못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이 이렇게 같은 동족끼리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동료를 죽이게 되면 훗날 삶의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 는 뜻입니다. 그렇게도 치열하게 싸우고 끝까지 아브넬을 추격하여 독 안에 든 쥐와 같이 마침내 그를 잡아 죽일 수 있는 지경에까지 와 놓고도 요압 장군은 동료 장수 아브넬의 이 한 마디를 듣고 결국은 그를 죽이지 않은 채 거기에 두고 군대를 철수시키게 됩니다. 그 한 마디가 그렇게도 요압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한 시대를 위대한 장수로 왕을 모시고 살았던 아브넬의 이 한 마디, “인생의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는 이 한 마디를 중심으로 “인생의 뒷맛”에 관한 진리를 공부하면서 은혜와 깨달음의 시간을 맛보고자 합니다. 모쪼록 듣고 풍성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뒷맛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다 죽게 된다는 슬프지만 엄연한 진리를 우리는 이미 지난 주일에 배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도 단순한 진리를 한 순간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렇게도 단순한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악을 행하고 죄를 짓고 이웃들을 고통에 빠뜨리며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일 우리가 죽는다고 가정한다면 오늘 그렇게 이웃에게 악을 행하며 고통을 주며 살겠습니까? 결코 그렇게 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일 죽을 준비하기도 바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렇게도 악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이 왕위에 오를 그 때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울 왕을 따라야 하네, 다윗 왕을 따라야 하네 하며 목숨 걸고 싸웠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누가 지금 우리 곁에 살아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그들이 살고 간 삶의 흔적들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범위 내에서 깨닫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압니다. 다윗이 어떻게 살았고 사울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고 그들을 섬기던 장수 아브넬이 어떠하였고 요압이 어떠하였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의 발자취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뒷맛을 씁쓸하게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해 잘 살아야 합입니다. 요압은 아브넬의 인생을 논하는 그 멋진 충고를 받고 잠시 물러서기는 했지만 끝내 그 아브넬을 죽이고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맙니다. 그의 말년이 너무나도 비참하였기 때문입니다.
훗날 아브넬이 결국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추종하여 왕으로 세우고 사울 편에 섰던 것을 후회하고 다윗에게 돌아와 항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을 위해 충성을 맹세하고 다윗의 심복이 됩니다. 다윗 또한 흔쾌히 아브넬을 받아 줍니다. 그런데 다윗 몰래 다윗의 심복이었던 요압장군이 이와 같은 아브넬을 몰래 죽여 버리고 다윗의 가슴에 한없는 아픔을 안겨주는 배신자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죽을 때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와 같은 배신자 요압을 처단하라고 유언 하게 됩니다.
왕상2:5-6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넬 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저가 저희를 죽여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로 자기 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솔로몬은 아버지의 이 유언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두었다가 요압을 죽여 어리석은 그의 삶을 엄담하여 심판하므로 그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왕상2:31-34 왕이 이르되 저의 말과 같이 하여 저를 죽여 묻으라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나와 내 부친의 집에서 네가 제하리라 여호와께서 요압의 피를 그 머리로 돌려보내실 것은 저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 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곧 이스라엘 군대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 과 유다 군대장관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칼로 죽였음이라 이 일을 내 부친 다윗은 알지 못하셨나니 저희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 와 그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 다윗과 그 자손과 그 집과 그 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 저를 쳐 죽이매 저가 거친 땅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 우리는 아브넬의 한 말 “뒷맛이 쓰지 않겠느냐?”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요압과 같이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고 후세들에게 뒷맛이 쓴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도록 말씀을 듣고 깨닫고 새롭게 변화를 받는 진정 멋진 성도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인생이 한 없이 짧고 덧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인물들을 봅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왕을 섬겼던 용사들이었고 한 시대에 능히 그를 당할 자 없을 만큼 위대한 장수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벌써 수천 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난 고인들로 역사의 한 페이지나 장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리석은 삶을 살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잠깐 살다 갈 인생이라면 그처럼 비참하게 최후를 맞고 후세들에게 욕이나 듣는 그런 삶을 살지 말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하게도 눈앞에 있는 유익만 생각하고 훗날을 대비하지 못한 고로 그만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지금부터 1세기도 지나기 전에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요압과 같이 힘을 가졌다고 힘으로 이웃을 제압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자기가 모시고 있는 왕이라도 안중에 두지 않고 자신의 분노와 원수 갚는 일에 자신의 소중한 일생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책과 우리들이 알고 있는 역사 속에서 참으로 많고도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살았기에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추앙 받는 인물들이 되었고 수없는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욕을 먹고 있을까요?
우리는 소령 강재구씨를 잘 알고 있습니다. 육군사관학교까지 나와 장래에 별을 내다보며 가슴에 장군이 될 큰 꿈을 가지고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꽃같은 나이에 수류탄의 파편막이가 되어 전사하였습니다. 부하가 잘못하여 떨어뜨린 수류탄 때문에 부하 수십 명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위기 앞에서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고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온 몸을 내 던졌던 것입니다. 구굴에 들어가서 ‘강재구’를 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떠오릅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호국의 간성으로 각급 부대의 작전장교, 중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국군이 월남에 파병되자 1965. 8.31. 파월 맹호부대에 지원하였다. 맹호부대 1연대 3대대 10중대장으로 보직되어 1965.10. 4. 파월에 앞서 중대원들과 함께 실전훈련을 하는 도중 한 병사가 수류탄을 잘못 투척하는 실수를 범해 전 중대원이 위험에 처하자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부하들을 구하고 자신은 장렬히 산화하였다. 자신의 한 목숨을 희생하여 수십 명 부하의 생명을 구하고, 희생정신의 귀감이 된 강재구 소령은 제51묘역 2번 묘에 안장되어 있다.
라고 말입니다. 강재구소령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아름다운 삶의 뒷맛은 영원히 이 땅에 남아 있음을 실감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근한이라는 사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고문기술자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또한 구굴에서 치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저주가 쏟아져 나옵니다. 특별히 그가 목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네티즌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기독교까지 욕을 욕을 해 대고 있습니다. 그가 고문했던 김근태씨가 죽자 그에게 목사 안수를 주었던 군소교단에서는 결국 그의 목사직을 박탈하고 파면하였습니다. 한 번뿐인 삶을 한 번 잘못 살면 그 꼬리표가 평생을 따르고 죽고 난 다음에도 영원히 남아 있다는 끔찍한 현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장본인 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들의 인생의 뒷맛이 이처럼 쓰지 않도록 똑바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고 인간답게 신자답게 똑 바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면 복이 될 줄 믿습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 바르고 복된 삶이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당대의 최고 권력자였던 악한 헤롯에게 보낸 메시지를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눅13:32-33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 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 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당대에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그 어떤 사람들의 생명도 자신의 손 안에 있는 줄 아는 오만불손한 헤롯왕에게 주님께서 보내신 메시지는 참으로 놀랍고도 담대합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이 얼마나 주님다운 멋있는 확신입니까? 무엇입니까? 옳은 일을 하는데 인간들이 감히 막아 설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해답입니다. 우리들도 우리들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을 가는데 일시적인 어떤 감동이나 열정으로 그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죽음이 앞을 가로 막는다 할지라도 오늘과 내일과 모레 즉 꾸준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담대하게 할 일을 하겠다는 의지, 바로 그것이 우리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의 결단과 의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 니하노라
이것이 바로 주님을 쫓아가는 사도 바울의 의지요 결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자 굴에까지 들어가면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능력을 만 천하에 선포하였던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영원히 비취는 별과 같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며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상과 축복을 받는 그런 멋들어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인 것입니다.
1984년도 Book of the month라는 독서클럼에서 최우수 저자로 선택한 소설 [And Ladies of the Club 그리고 클럽의 여인들]이라는 책은 무려 1300폐이지나 되는 방대한 장편소설입니다. 작가인 Helen Hooven Santmyer는 1920년대에 이 소설을 시작하여 80년대에 가서야 마무리 한 60년 이상 걸린 놀라운 작품입니다. 당시 프트남 출판사에서 11만 불을 주고 계약하여 이 소설을 발표하였고 TV나 영화 제작사들도 너도나도 계약을 해와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정작 작가는 그와 같은 돈보다는 오직 그 작품에만 몰두하여 수정하고 또 수정하여 완벽한 한 권의 책을 이 세상에 내 놓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인생의 가치입니다. 속전속결로 끝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두고 삶의 소중한 시간을 투자하며 이 세상에 가장 값진 것을 남겨두려는 자세, 바로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예수님의 정신인 것입니다.
자기 이름에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이름이 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식물도 다 이름이 있고 동물도 다 이름이 있으며 사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이 저마다 다 복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은 조물주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도 소중한 것이고 우리 인생들의 이름은 부모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간직하는 것입니다. 이 종도 시민권을 받을 때 이름을 한국 이름 그대로 간직하려고 했었는데 제 영문 이름이 IN GUN이라 총기 사고가 날 때마다 좀 뭐하고 은혜롭지 못한 것 같아 할 수 없이 평소에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던 용맹과 믿음이 뛰어난 다니엘을 흠모하여 다니엘이라고 개명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외에는 저는 언제나 제 소중한 이름 석 자를 간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을 대변하는 가장 대표적인 명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물려주신 고귀한 이름을 온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그 이름 석 자가 영원히 빛을 발하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또 사울을 바울로 개명해 주시면서 그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변화를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이름이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생명록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이름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누구 하나 알아 줄 사람 없는 이름이지만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이름을 부르시며 생명록에 기록된 자로 인정하시고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 수 있도록 부르시는 이름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제 휘하에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형편없는 생활을 하면서 알렉산더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 대제는 알렉산더 병사가 있는 막사로 찾아가 그와 같은 알렉산더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을 했습니다. “자네 이름이 알렉산더라지? 그렇다면 자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자네의 생활 태도를 바꾸도록 하게!” 우리에게도 병사와 같은 모습이 있습니다. 즉, 이름은 그리스도인이지만 행동은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하는 것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자칭 그리스도인은 아니신지요? “주님, 저희는 스스로를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정작 저희의 삶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저희의 모습을 용서하시고 저희의 모습을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베드로와 같이 길이 그 이름이 빛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벧전3: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 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 라
빌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땅엣 것만 바라고 사는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이라 하고 하늘의 것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을 성도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진정 구원 받아 하늘을 사모하고 미래를 위해 사는 성도들이라면 우리들의 삶의 뒷맛이 아름답고 고상하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도 불사하는 하늘의 소망을 둔 사람들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어차피 잠시 살다 갈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의 삶에 우리들의 모든 것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늘에 소망을 두고 그 하늘나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도록 뒷맛이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아브넬과 요압장군을 비교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요압장군은 용사였고 장군이었고 한 나라의 왕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었지만 결국 인생의 머나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탓에 그 인생 뒷맛이 쓰고 아픈 안타까운 삶을 살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요압을 보면서 인생의 미래를 내다보고 뒷맛이 쓰지 않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 길은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요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름을 빛내는 길입니다. 지금 영국 런던에서는 나라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세계적인 인물들이 금메달을 향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30회 올림픽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하늘 상급과 하늘 금메달을 내다보며 최선을 다하는 멋진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 석 자를 부르시며 주실 그 상급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모쪼록 오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그렇게 천국 상을 받는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2년 8월 5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