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응답의 조건 (2022년 1월 23일 주일낮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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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3 January 2022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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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응답의 조건
1. 23, 2022
本文:야고보서1:5-8
說敎:崔仁根牧師
우리는 지난 주일에 “기도는 다 응답됩니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또 기도에 조건이 있다고 말씀하시는지, 조금은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드리면 조금은 이해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다 해 주신다고 하면 거의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능력이 안 되면 몰라도 넉넉하게 능력을 가진 부모라면 거의가 다 자녀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실 것입니다. 해 주실 뿐만 아니라 해 주면서 보람과 기쁨까지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라고 해서,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해 주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3살짜리 아들이 조각을 하겠다고 칼을 달라든지, 스무 살 먹은 아들이 카지노에 가서 놀고 싶으니 돈을 달라고 한다면 선뜻 내어 줄 부모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 주시지만 조건이 있다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 성도들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기도는 다 응답된다고 여러 차례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들을 조용히 살펴보면 틀림 없는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조건들입니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마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우리들의 기도를 하나님은 반드시 다 응답해 주시는데 일정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여야 한다는 것이나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들이 한결 같은 조건들인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이 기도 응답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어떠한 조건에 걸려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대충 성경에는 기도 응답의 조건이 17가지 정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세 가지만 찾아서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육신적으로 구하지 말고 영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롬8:6-8)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약4:2-3)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앞서 우리는 아무리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래서 자녀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주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해 주었을 때 그것이 자녀들에게 악이 되거나 독이 되는 경우는 결코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 응답을 친히 약속해 주셨지만 우리들이 드리는 기도가 영적이지 못하고 육신적인 기도일 때는 결코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두 기도를 비교하시면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친히 지적해 주셨습니다.
(눅18:10-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고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저런 사람들 앞에서 저절로 기가 죽지 않겠습니까? 일주일에 두 반씩이나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구별하여 바치며 토색이나 불의나 간음을 하지 않는 완벽한 도덕주의 자를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리는 어떻습니까? 너무나도 죄가 많아 감히 고개를 들고 하늘의 하나님을 처다 보기조차 민망하여 가슴을 치며 눈물로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판단은 어떠하였습니까? 그렇게도 잘난 바리새인이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초라하고 못난 세리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완벽한 도적주의자에다가 신앙적으로도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기도가 아니라 금식까지 하고 십일조까지 완벽하게 드리는 이렇게도 귀한 바리새인의 기도가 왜 하나님께 응답되지 못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친히 지적하신 대로 바리새인은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못난 세리와 차별화 하고 자신의 의를 너무나도 당당하게 드러내는 이 어리석은 자의 오만과 교만을 예수님은 보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할 한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완벽한 모습 보다는 차라리 부족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완전하고 깨끗하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러운 죄인들일 뿐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지 않고는 깨끗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며 스스로 의롭다 할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렇게 하는 자들의 기도는 결코 응답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적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천명해 두셨던 것입니다.
(딤후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딛3:5-7)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리새인과 같이 이 땅의 그 누구라도 비방하거나 무시하거나 욕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결코 그러한 자의 기도나 십일조나 의를 받아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는 행위가 육신적인 행위이니 이런 자는 기도 응답은 고사하고 사망이라는 끔찍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롬8:6-8)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기도 응답이나 요구사항을 허락 받기 위해서는 상식적으로 상대를 기쁘게 해 드려야 하는데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니 기도 응답은 고사하고 통째로 버림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늘 육신에 젖어 말하고 판단하고 바리새인들과 같이 믿는 척 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영적인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약1:5-6)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마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막9:22-24)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신자들에게는 무엇을 하든지 다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믿음이 없이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롬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단순하게 이 말씀을 기도에 대입시켜 보십시다. 만약 우리들이 믿음으로 좇아 기도하지 않는다면 기도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 나와 호소하던 믿음 없는 아버지가 예수님의 호된 책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막9:22-23)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에 믿음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버지는 당장에 선언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막9: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 아버지는 즉석에서 응답을 받고 귀신에 들려 고통당하던 아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기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도 오늘 본문에서 이것을 매우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1:5-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자신의 뜻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마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우리는 우리 예수님의 이 기도에서 중요한 기도 응답의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는 내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모질고 무서운 십자가를 앞에 두고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는 그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하였겠습니까? 그러한 경우에도 예수님은 무조건 자신의 뜻만 이루어 주기를 소원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내 뜻은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는 것이지만 그것이 만약 하나님의 뜻이 아니시면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하고 드리는 기도가 바로 예수님의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기도 응답을 위한 조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연약한 우리들은 특별히 고통과 시련을 당할 때 무조건 이런 것들이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고난이 지나가는 것이 현실에서 너무나도 절박하지만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이 계실지 모르니 묵묵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 보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전에 한 가난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학교에 갈 만큼 넉넉하지도 못했고, 어느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할 만한 기술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사진술을 배워 사진 기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진술을 엮어 놓은 책을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은 서점의 착오로 사진술에 대한 책은 오지 않고 발성법에 대한 책이 온 것입니다. 이 소년은 너무 가난하여 그 책을 돌려보낼 만한 우송료로 없었거니와 반송하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소년의 실망은 너무 컸지만 소년은 굴하지 아니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제 인생의 앞날을 저는 잘 모르겠으니 하나님께서 뜻대로 인도해 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진을 배울 수 있는 책이 없으니 그저 발성법에 관한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이 나중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인 성악가 ‘찰리 멕카시’였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멕카시의 성공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가난과 시련을 통해 사진 기사가 되기를 원했던 그를 하나님은 전혀 다름 방법으로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적인 우리들의 기도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기도를 드리되 어떻하든지 내 뜻만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줄 아는 기도 응답의 조건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 답답하고 힘들지라도 나중에는 더 좋고 귀한 것으로 응답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날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서도 끝까지 제고집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제 뜻을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로 가서 복음 전하기를 너무나도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늘 그렇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뜻밖의 사인을 주셨습니다. 그곳은 아시아가 아닌 마게도냐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생각으로 조차도 “왜 아시아가 아닌 마게도냐입니까?”하고 반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순종하고 따랐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교회가 바로 그 유명한 빌립보교회입니다. 자기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될 때 일어나는 역사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행16:6-10)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한다는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 하나는 지나치게 독단적이고 고집이 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진실로 알기 원하는 어떤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주님께 드렸기에 만일 주님의 뜻이라면 사람들의 눈에 가장 최고의 헌신적으로 보이는 선교사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청년은 그의 그와 같은 놀라운 헌신에도 불구하고 외부로 들어나지 않는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집이 매우 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각엔 반항도 아주 합당하게 여겨졌습니다. 적어도 그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정당하고 합당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이 젊은이는 그의 이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연세가 많으시고 지혜로운 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선교사가 되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나 저는 이 나라 안에서 일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할지 아니면 먼 외국에 가서 일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할지를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젊은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 젊은이는 먼저 순종의 선교사가 되어야겠네! 자네는 순종이 무엇인지를 먼저 배워야 하네."라고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과 어른들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내려놓고 겸손히 순종할 줄 아는 성품이 있어야 제대로 된 사명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 또한 이러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축복의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