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0일 주일낮 설교 (영혼 없는 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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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Friday, 15 March 2013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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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몸이라면!
3. 10, 2013
本文:야고보서2:14-26
說敎:崔仁根牧師
영혼 없는 몸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엄청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시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행동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믿음을 이렇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행동하지 못하는 믿음이 이렇게도 끔찍하거늘 우리는 아무런 도전도, 충격도 없이 그냥 그대로 식물인간과도 같이 신앙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오신 듯 오늘 부족한 이 종을 통하여서 경고하고 계십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행동하라”고 말입니다.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 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놀라운 경고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세상을 향하여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변 교회는, 그리고 소위 믿는다는 성도들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놀라운 경고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한 나라의 위정자에서부터 말단 공무원들까지, 부모에서부터 어린 자녀들까지... 그 누구도 하나님의 ‘행동 하라’는 경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대표적인 기독교 국가로서 전 세계의 돈인 달러에 "In God We Trust"(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고 새겨 놓고도 입으로, 또 행동으로 하나님을 밀어내고 하나님의 가슴에 못질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미국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변 국가들이 너도 나도 미국을 본받아 영국과 프랑스 등 전 세계 11개 국가가 정식으로 동성결혼을 합법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래도 오늘 우리는 우리 아이들만 잘 되면 되고 우리 가게에 장사만 잘 되면 되고 우리교회만 부흥되면 그만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 끔찍할 만큼 무서운 말씀으로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들을 위해 이 땅에 보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의 고난도 마다 않으시고 친히 고통을 감내해 주셨습니다. 우리 이제 비장한 각오로 말씀으로 돌아가서 그 말씀이 무엇이 되었든 지간에 순종하고 실천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도록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경청하시고 어떻게 무엇을 행동해야 할는지 스스로 그 해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영혼 없는 몸이라면!
뉴저지 밀알에서 단원으로 봉사하고 있는 이한창이라는 성도님이 밀알지 2월호에 게재한 글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옛날 부산에서 살고 있던 그는 처음으로 서울에 볼 일을 보러갔다가 서울역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통일호의 기차표를 사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두 사람의 말쑥한 신사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소위 전도를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기차 시간도 많이 남았고 지루하던 차에 그 사람들이 전하는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열정적으로 이웃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원수라도 기꺼이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창 전도를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지팡이를 짚은 소경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곤 시계를 내밀면서 그 시계를 좀 사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뜻밖에도 그분은 장님들만 전용으로 사용하는 듯 한 이상하게 생긴 시계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 시계는 초침도 없고 시침과 분침을 손으로 만져 시간을 알아내는 참으로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장님에게 있어서는 매우 소중한 물건 같아 보였는데 그것을 팔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아 물어 보았습니다. “그 시계는 댁에게 매우 귀중한 물건 같은데 그것을 왜 팔려고 하느냐?”고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연은 참으로 딱했습니다. 부산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 장애인들을 위한 특별한 직장에 취직이 되어 올라왔는데 갑자기 부산에서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내려가 봐야 하는데 직장에서 모아 두었던 돈을 내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곳을 나와 갑자기 부산으로 가려고 하니 차비가 없어 급히 이 시계라도 팔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딱해 시계를 사드리려고 호주머니를 뒤져 보았으나 가진 것은 단 돈 2천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앞에 서 있는 전도하던 분들에게 부탁을 드려보았습니다. “이 분의 사정이 이처럼 딱하니 시계를 좀 사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그러자 그들은, “원래 서울역 부근에는 이렇게 생긴 장애인들이 이상한 물건을 들고 나와 돈을 뜯어내는 일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물건을 사주면 안 된다.”며 단숨에 거절을 하였습니다. 할 수 없어 다시 지갑을 뒤져 보았더니 마침 전화 카드가 한 장 있어 그것을 들고 주변 에 있는 가게로 가서 다시 돈으로 바꾸어 기차표를 사드리고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광경입니까? 사랑을 들고 전도하던 분들은 이렇게도 불쌍한 사람을 보고 외면하였는데 아직 예수님도 믿지 않던 이 낯선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이 불쌍한 이웃을 도와주었으니 말입니다. 과연 이것이 서울역에서 전도하던 그 사람들만의 문제일까요? 오늘 우리들은 과연 이렇게 하지 않고 따뜻한 사랑으로 행동하는 신앙생활을 지금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 엄중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말만으로 전도하고 말만으로 예수님 믿고 말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들은 불행하게도 영혼이 없는 몸과 같은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조용히 본문으로 돌아가 그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행히 오늘 본문에는 3가지 뚜렷한 행동해야 할 모델이 기록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 그것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들이 행동해야 할 목표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웃을 돕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행동하지 못하는 믿음의 뇌사 상태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약2:14-16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 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 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행동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구체적인 대상은 바로 우리들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무관심 하는 것은 믿음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하나님은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모습은 바로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나는 여호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이웃이라고 할 때 우리들이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아는 사람들로 잘 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평소에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실례로 들어주셨습니다. 여행을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상처 입은 사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바로 이웃이라고 정의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이와 같은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힘을 다해 그들을 섬기고 돕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늘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지난 2월 22일 자 ‘크리스챤 저널’은 서울역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참한 생활을 하는 그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북한에서 굶주리고 있는 어린 아이 돕기에 동참하고 있다는 아름다운 미담을 보도하였습니다. 참으로 가슴이 뭉클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형편이 다 어렵고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아무리 어려워도 따뜻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리고 끼니는 굶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그들보다는 우리들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웃을 돕는다면 당연히 우리들도 도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도울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매우 강하게 질타하십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바로 우리들의 따뜻한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의 소외된 이웃입니다.
최호섭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시민으로 그렇게 주어진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길을 건너다 50마일로 달려오던 자동차에 치어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몸은 치료를 받고 상처가 아무는데 두 눈이 충격으로 실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늘이 내려앉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 같은 방에 입원하고 있던 7살 난 정혜라는 아이가 이 사람에게 다가 왔습니다. “아저씨는 왜 그렇게 눈에 붕대를 감고 있어요?”, “아저씨는 왜 그렇게 화만 내고 있어요?”, “우리 엄마가 그러던데 마음을 예쁘게 먹고 이웃 사람들에게 착하게 굴어야 병도 빨리 낫는다”고 말이에요. 그러자 아저씨는 왕짜증을 내면서 어린 아이에게 고함을 지르며 야단을 쳤습니다. 그래도 이 어린 아이는 아저씨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이든 조잘대며 아저씨의 환심을 샀고 결국은 병원생활을 바꾸어 놓을 만큼 서로 의지하며 친해졌습니다. 운동을 해야 할 때는 이제 7살밖에 안 된 어린 소녀가 아저씨의 손을 잡고 두 눈이 되어 운동을 시켜 주었고 하늘처럼 맑은 목소리와 친절로 아저씨의 무너진 마음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와 같은 덕분으로 아저씨는 이제 퇴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가 그렇게 아쉬워하고 헤어지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저씨는 퇴원하였고 소녀는 병원에 남았습니다. 그 이후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안구 기증자가 나왔으니 빨리 병원에 와서 안구 이식 수술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할렐루야였습니다. 순식간에 눈을 잃고,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빨리 안구를 기증하는 사람이 생겨 잃었던 시력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거짓말처럼 두 눈은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순간 누가 이렇게 귀한 두 눈을 기증해 주었는지 그 주인공을 알고 싶었습니다. 병원을 통해 수소문 한 끝에 눈의 주인은 어린 7살짜리 정혜였던 것을 알았습니다. 그 소녀는 백혈병 말기를 앓다가 결국은 하늘나라로 간 것입니다. 그녀가 마지막 남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저씨, 저 오늘 마지막 수술 받으러 가요. 제가 만약 수술실에서 다시 나오지 못하면 제 눈을 아저씨께 드려서 아저씨랑 함께 영원히 살 거예요. 하지만 제가 수술실에서 나와서 건강해 지면 저는 아저씨랑 결혼해서 오래오래 함께 살 거예요.]
비록 철없는 어린 7살의 소녀에 불과하지만 이 소녀는 두 눈을 잃고 절망하던 한 이웃에게 한없는 희망과 삶의 의지를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데 정혜라는 7살 난 아이는 엄청난 돈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값비싼 선물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 정감 넘치는 다정한 미소 하나가 이렇게도 큰 역사를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제 이렇게 행동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따듯한 말과 행동 하나를 통해 누군가가 죽어가다가 다시 소생할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이웃들에게 소망을 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우리들의 믿음 또한 죽은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가장 소중한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또 하나 우리들이 담대하게 행동하며 하나님께 기쁨을 드려야 하는 일은 우리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바로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그것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2:20-24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 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 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우리는 위의 이 말씀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과연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창세기 2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나이 100살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번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각을 뜨려던 순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 행동으로 인정하시던 사건입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은 나이 백 살에 얻은 그 소중한 독자라도 하나님께서 달라시니 미련 없이 갖다 바칠 수 있었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무리 귀한 아들이라도 그 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것이요, 두 번째는 비록 내가 아들을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분이시니 어떻게든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이렇게 보아도 믿음의 행도이요 저렇게 보아도 믿음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토록 아브라함의 믿음에 감동하셨고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축복으로 보상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 수천 년이 지난 후에 야고보 사도가 또 다시 그의 아름다운 믿음의 역사를 이렇게 기록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전수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배우고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믿음이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우리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결국 우리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것도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서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많이 경험해 본 일이 있습니다. 할머니께서 맛동산 한 봉지를 손자에게 사주시고 하나만 달라고 손을 내 밀면 그것을 거절하던 어리석은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다소 실망하시는 표정을 지으시던 것을 또한 기억합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선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싶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반문 하십니다. “너희가 가진 것 중에 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빈손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가진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들에게 만약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그것으로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헌신을 모델로 들고 우리들을 교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또 다시 올 때와 똑 같이 빈손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지극히 옳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을 중심으로 엄청난 축복을 보장해 주십니다.
잠8:21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 니라
고 말입니다. 참으로 깊이 생각해 볼만 한 말씀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물로 인생을 풍요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약속에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재물을 주셔서 그 곳간에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는지는 사도 요한이 이미 그 해답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엄청난 위험이 따를지라도 행동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속 드는 행동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상급이 있고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신앙에는 엄청난 결단과 모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오늘 본문에 기록된 기생 라합입니다.
약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 이야기는 여호수아 2장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정복을 앞두고 정탐꾼들을 여리고성에 들여보냈을 때 불행하게도 그 정보가 여리고 왕에게 들어가서 이들을 추격하게 됩니다. 그때 기생 라합이 이들을 몰래 숨겨주고 미래를 보장 받습니다. 즉, 훗날 여리고가 정복될 때 그와 그 모든 가족들의 목숨을 구해달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미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셨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 목숨을 내놓고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놀라운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행동은 그냥 장난삼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목숨을 건 놀라운 결단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행동하는 신앙이라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비록 기생이었지만 라합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왕명도 어기고 적군을 숨겨주는 놀라운 행동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2:8-11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 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 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 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라합의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은 믿음이 있어야 결단할 수 있고 결단할 수 있어야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우리들의 믿음 있음을 행동으로 보이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동은 서로 깊은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동하게 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믿음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믿음 있음을 놀라운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자니 기생 라합과 같이 어떠한 두려움과 위험이 닥친다 할지라도 과감하게 행동할 줄 아는 놀라운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난번 한국의 거의 모든 일간지 사회면에 보도된 내용인데 서울 잠실대교 부근 한강 고수부지에서 20대 계모가 초등학생을 한강에 밀어 넣어 수장을 기도했으나 시민이 깊이도 모르는 물속에 뛰어들어 어린이를 구출했다는 소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용감한(?) 시민은 서울 언약교회(당회장 이정수 목사) 주일학교 지도교사인 장종태씨(28)였습니다. 장종태 교사를 비롯한 10여명의 교사들은 수요예배를 마친 후 기도회를 갖기로 하고 한강 고수부지로 나갔다가 마침 이 일을 목격하고 한 생명을 구해내게 된 것입니다. 교사들은 이날 기도회를 갖기 위해 고수부지로 간 것도 재미있거니와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도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남을 구하려는 이들의 미담이 가뜩이나 각박한 소식만을 전해주던 교계에 훈훈함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캄캄한 밤에 시커멓게 흐르는 강물 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보통의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쉽게 생동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행동하는 이와 같은 용기와 결단으로 결국 소중한 한 생명을 건져냈고 사회에 아름다운 믿음의 미담을 남기게 되었으니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오늘날 행동하는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이웃들에게는 소망이 되며 우리들 자신들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되는데 이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행동하는 믿음으로 이처럼 멋들어진 열매를 맺혀나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3월도 아름답게 깊어가는 두 번째 주일인 오늘은 행동하는 신앙에 관한 말씀을 증거해 드렸습니다. 영혼 없는 몸을 상상해 보신다면 행동하지 못하는 믿음 또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행동하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가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동하는 믿음의 증거를 가질 수 있을까요? 가장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행동은 바로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을 이웃들에게 보여주어야 비로소 믿음 있음을 인정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소중한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바치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믿음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할 행동인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어떤 위험이나 모험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것은 결국 결단인데 이와 같은 결단이 바로 믿음에서부터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희생도 없이 믿음을 증거하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불신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생 라합은 비록 여인의 몸이었지만 그 어떤 사내보다 더 놀라운 결단으로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기적을 맛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바로 이와 같은 준비와 자세로 행동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행동 없는 믿음 또한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일지라도 행동하며 믿음을 객관적으로 입증시켜 나가려는 우리들의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 우리 모든 예배자들은 단순한 예배를 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하는 신앙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리고 이웃들에게는 희망을 심어주며 우리들의 내일에는 풍성한 축복을 만들어가는 그런 멋쟁이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쪼록 소중한 날에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시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3년 3월 10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