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빌립보장로교회

-- 성령의 열매맺는 교회 --

Sat11232024

Last update12:00:00 AM

Font Size

Profile

Menu Style

Cpanel
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3년 3월 24일 주일낮 설교 (헛된 고난은 없습니다)

2013년 3월 24일 주일낮 설교 (헛된 고난은 없습니다)

헛된 고난은 없습니다

 

고난주일

3. 24, 2013

本文:마가복음15:16-32

說敎:崔仁根牧師

 

인생을 살다보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전혀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고난을 당하거나 불 유익을 당할 때가 바로 그러한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진정 억울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두 분의 주인공을 만나게 됩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주님은 너무나도 억울하신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죄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었던 빌라도조차도 죄를 찾아 내지 못했는데도 십자가를 지고 못 박히시기 위해 골고다로 가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구레네에서 올라 온 시몬이라는 인물입니다. 그 사람은 우연히 그 고난 받는 주님 곁에 머물고 있다가 붙잡혀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가야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우리 주님이나 시몬 모두 헛된 고난을 당하게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종은 주님께서 고난당하신 2013년도 고난주일을 맞아서 이처럼 헛되지 않는 고난에 대해 말씀을 상고하면서 고난을 넘어 축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짧은 우리 인생을 뒤돌아보더라도 고난당할 그 때는 참으로 싫고 억울하고 원망스럽지만 지나고 보면 결코 그렇게 싫은 일만은 아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한창 나이에 군대에 끌려가서 매를 맞으며 호되게 훈련을 받을 때는 나중에 결혼해서 절대로 아들을 낳지 않을 것이라고 이를 악물고 다짐하지만 남자들이 모이면 가장 열을 올리면서 이야기 하는 것이 군대 이야기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결코 그때 당한 고난이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참으로 어렵고 힘든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날마다 개스 값은 올라가고 있고 경기는 좀처럼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영적으로는 동성결혼과 마리화나 등 우리들의 영혼을 해치는 일들이 줄줄이 합법화 되어가고 있으니 이 모양 저 모양 우리들의 삶의 현실은 참으로 어렵다고 할 것 밖에는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결코 “헛된 고난은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고 공의롭게 판단하시고 양과 염소를 가려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찬송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예배와 헌신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 성도들의 믿음을 하나님은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헛된 고난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쪼록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반드시 전화위복의 축복을 우리들이 누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말씀에 귀를 모으고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는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시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헛된 고난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은 한결같이 고난 속에 짓눌린 참담한 현실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악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하고 십자가에 못 박기를 아우성치는 것과 무고한 시민을 협박하여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지우고 가는 모습 등은 인격을 가지고 인권을 누리며 살아야 할 지극히 상식적인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죄악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처럼 억울한 죽음도 있었고 억울한 희생도 자행되어졌던 것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잔인한 죄인들의 횡포로 인해 억울하게 고통당하신 우리 예수님과 시몬에 관한 말씀을 중심으로 그분들의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앞으로 우리들의 삶에서도 공의로운 하나님은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을 헛되게 지나지 않도록 간섭하시고 섭리하실 것을 믿는 신선한 소망으로 내일을 기대하는 축복을 만들어 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마음 귀를 모우고 이 엄숙한 고난주일에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은혜와 변화와 결단을 만들어 내는 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소망하는 영혼을 살리는 삶으로 새로운 열매를 맺고 우리들의 작은 노력으로 죽어가는 불쌍한 이웃들이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 교회로 힘차게 몰려오게 해야 하겠습니다. 함께 이와 같은 거룩한 소망을 가슴에 품고 오늘의 말씀에 귀를 모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헛되지 않은 고난

 

이 종은 오늘의 말씀의 제목을 “헛된 고난은 없습니다”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서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신 우리 예수님이나 구레네 사람 시몬의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먼저 내렸습니다. 지금 이 종은 그 말씀에 관한 증거를 내 놓고 그 두 분의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 예수님의 고난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고난이 헛되지 않은 이유

 

우리들이 지금까지 배우고 아는 바와 성경에 기록된 바를 종합해 보면 우리 주님은 아무런 잘못도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음이 명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유부단한 빌라도는 민중들의 봉기를 더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저울질 하다가 결국은 악한 바나바는 놓아주고 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내 주고 말았습니다.

 

막15:9-15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 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 겨준 줄 앎이러라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 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시 소리 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 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 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 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가슴을 치고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빌라도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모든 선악을 분별하고 판단해야 할 자신이 오히려 군중들에게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는 이 한 대목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우유부단한 인물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죄 없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 주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우리는 사도신경 신앙고백에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디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말입니다. 그는 이처럼 영원한 저주거리로 성도들의 고백 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 주님은 말할 수 없는 억울한 고난을 당하시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주님의 이와 같은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 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 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말씀은 단적으로 우리 주님의 고난이 우리 성도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죄악의 고통에서 나음을 입고 우리들이 험악한 이 세상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은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들의 모든 죄악을 친히 몸으로 담당하셨기 때문에 가능해 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고난은 우리 주님께서 힘이 없어서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고난은 주님께서 잘못하셔서 당하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고난은 오직 목적 있는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나음을 위해서 또한 우리들의 평화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인 것은 다음 말씀 속에서 해답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26:53-54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 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 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이 두 말씀이 왜 우리 주님께서 그토록 무서운 고난의 형벌을 받으셔야만 했던가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을 우리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고 해방시키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그 거룩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희생 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증거가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져 있습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 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4천 년 전에 기록된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고난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또한 헛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된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비록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으나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다시 살려내심으로 주님의 고난이 헛것이 아니었음을 만 천하에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행2:23-24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 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 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고난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2) 구레네 시몬의 고난이 헛되지 않은 이유

 

이제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대신하여 골고다로 올라갔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억울한 고난에 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레네는 원래 리비아 근처에 있는 아프리카 지역의 한 시골이었습니다. 그는 왜 당시 예루살렘으로 나왔는지? 그가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알렉산더와 루포였다는 사실만 나타나 있습니다. 추측컨대 그의 두 아들은 일찌감치 도시인 예루살렘에 나와 생활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명절로 지키고 있던 때라 아버지 시몬이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를 방문하고 명절을 함께 누리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 왔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의 여행길은 희망과 꿈이 있던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칼과 몽치를 든 악한 로마병정들에게 붙잡혀 상상도 못했던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까지 가야만 했던 억울한 희생자요 억지로 진 고통의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졌던 십자가와 고난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길로 인하여 예수님과 동행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끝내 예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그만의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 두 아들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가슴에 품는 놀라운 신자로 변신하였고 당시 가장 박해가 심했던 로마에서 지하교회의 기둥 같은 성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롬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전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특별히 로마 교인들에게 잊지 못하고 부탁을 한 시몬의 가족들 특별히 그 아들 루포와 그 아내를 기억하고 문안하라고 부탁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 즉, 구레네 시몬의 아내를 “내 어머니”라고 까지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목숨을 내 놓고 사도 바울과 로마교회를 위해 헌신하였으면 당대 최고의 사도였던 바울이 “내 어머니”라고까지 불렀겠습니까? 이로 미루어 볼 때 구레네 시몬의 가족들이 엄청난 변화를 입고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처음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질 때는 억울하고 힘들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이 그와 그 가정에 엄청난 축복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고난이든 고난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반드시 체험하게 됨을 우리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현재에 당하는 고난은 장차 받을 상급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기꺼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사도 바울과 같이 힘을 다해 오늘의 고난을 감내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차피 믿음은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고 내일과 미래를 사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고난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우리는 우리 주님 예수님과 구레네 사람 시몬의 고난을 통해 분명한 한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어떤 고난이든 헛된 고난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고난을 대하는 자세부터 달라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고난을 주실 때는 그것을 통하여 주실 또 다른 축복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렘29:11-1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 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 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 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엿보게 됩니다. 이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들이 고통당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기를 원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까지 내어 주신 사랑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고통당하고 망하기를 원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고난을 통하여 낙심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 머물고 계시는 우리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신앙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엄청난 고난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26:53-56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 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 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 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 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 리고 도망하니라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고난당하시는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과 섭리 안에 주님께서 고난 당하셔야 할 예정이 숨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단적인 증거가 바로 다음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마26: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 중에서도 밑줄 친 말씀을 한 번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코 주님께서 당하시는 고난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이 당하는 고난은 결코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 사람을 원망하거나 고난의 화살을 이웃에게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고난 가운데 구레네 사람 시몬과 같이 곁에 선 우리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한 쪽 강도와 같이 고난 중에 오히려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의 은총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시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 게 되었나이다

 

시140:12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신원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이다

 

사49:13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

 

는 말씀들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고난주일에 이처럼 놀라운 진리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당하는 그 억울한 고난이 억울함으로 남지 아니하고 오히려 축복으로 되돌아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음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질병으로 반신불수 상태였습니다. 질병치료를 위해 많은 돈을 빌렸으나 이를 갚지 못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 절망적인 순간에 그는 악보를 펴놓고 창작에 몰입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세계적인 음악가 헨델. 그리고 감옥에서 만든 작품은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 '할렐루야'입니다. 또 다른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소년은 학교에 결석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체육시간이면 운동장 한편에 앉아 친구들이 뛰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구경하거나 책을 읽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소년은 몸이 약한 대신 달변가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야기선생님'으로 불린 이 사람의 이름은 스티븐슨. 소설 '보물섬'의 작가가 되었습니다. 악성 베토벤과 발명왕 에디슨도 농아였습니다. '실낙원'을 쓴 밀턴은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예술가들 중 '고난의 강'을 건넌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역경은 위대한 창조의 초석이 된다는 교훈을 던져 주는 귀한 역사적인 반증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3년도 고난주일입니다. 매년 당하는 연례 행사정도로 보지 않도록 우리들의 마음이 진정 우리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로 연결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의 그 고귀한 고난 때문에 우리들이 나음을 입고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이 엄청난 진리를 가슴으로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비록 억지로 당하는 짐이라도 기꺼이 지고 주님 곁으로 갈 수 있다면 거기에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축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날들이 비록 고난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들이 당하는 그 고난을 하늘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알고 보상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배워서 묵묵히 이겨 내는 멋진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지금은 견디기 힘들고 무겁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조차도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것으로 믿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거룩한 성도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독생자 예수님 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결단코 망하도록 버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이처럼 굳건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아름답고 벅찬 계절에 우리들의 믿음과 축복도 새봄의 새싹과 같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그런 멋들어진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3년 3월 24일

고난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Add comment


Security code
Refre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