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31일 주일낮 설교 (주님 곁에 머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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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Monday, 01 April 2013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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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곁에 머문 사람들
부활주일
3. 31, 2013
本文:요한복음20:1-10
說敎:崔仁根牧師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부활의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주님 곁에 머무른 특별한 한 인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의 입 맞추는 신호에 따라 예수님을 잡으려고 칼과 몽치로 무장한 자들 앞에 당당히 서서 칼을 휘두르기까지 하였지만 결국 주님을 악당들 앞에 남겨 두고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칼로 일어나는 자는 칼로 망한다”며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스스로 순순히 그들 앞에 잡히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더 이상의 희망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때의 상황을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다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26:55-56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 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인생들의 현주소입니다. 3년씩이나 따라다니며 보고 듣고 배우고 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위협과 고난에 봉착하시게 되자 미련 없이 버리고 도망 가버리는 사람들,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은 그러한 주님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따랐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그 아름다운 모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19:25-27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 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여기에 기록된 제자가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목숨이 떨어지기 직전에 힘이 없이 겨우 하시는 말씀조차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주님의 십자가 밑 최악의 고통의 자리에까지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 곁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말합니다. “고통의 때에 진정한 사람과 진정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명세기 수제자라 불리웠던 베드로조차도 잔인한 악당들에게 주님께서 잡히시자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주님을 멀찍이서 따라 갔고, 그러다가 결국은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취급되었기에 모든 사도들이 훗날 이를 대서특필하여 성경에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마26:58 베드로가 멀찍이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 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막14: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하 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눅22: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쌔 베드로가 멀찍이따라 가니라
는 말씀들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그만큼 당시 주님을 곁에서 따르는 것이 너무나도 위험하고 힘들었던 일이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은 주님의 십자가 바로 밑에까지 따라갔으니 참으로 놀라운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사도 요한을 중심으로 부활의 영광을 맛볼 수 있도록 말씀으로 돌아가 은혜 받고자 합니다. 모쪼록 귀하신 말씀으로 새롭게 변화 받는 축복된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곁에 머문 사람들
그렇게 춥고 비바람 치던 날씨도 이젠 제법 초여름을 느끼게 할 정도로 온도가 올라가고 가리웠던 햇빛도 찬란하게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시는 봄이 오지 않은 채 겨울만 계속 될 것 같았는데 어김없이 봄은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지구가 멀어져 있던 태양과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태양과 더 가까워지면 더워서 땀을 흘려야 하는 여름이 올 것입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도 우리들의 삶의 중심이요 주인이신 예수님과 가까워진다면 실로 엄청난 역사와 변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님을 베드로처럼 멀찍이서 따른다면 결국은 그 주님께서 보시는 면전에서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게 되고 맙니다. 이는 태양 없이 따뜻할 수 없고 주님 없이 은총을 누릴 수 없다는 너무나도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가까이서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십자가가 먼저 있어야 하고 죽임 당하는 고통을 먼저 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지 않는 사람이 부활할 수 없고 아프지 않은 사람이 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지난 주일에 “헛된 고난은 없습니다”는 대 전제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죽음과 부활, 고난과 축복을 대비시켜 신선한 변화의 은총을 누릴 수 있도록 말씀으로 돌아가 진리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위에서 사도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렇게도 사랑하는 예수님이 칼과 몽치를 든 악당들에게 붙잡혀 가시는데 멀찍이서 따라갔겠습니까?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위협과 공포를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틈만 나면 믿음을 가지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빠뜨리라 해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이 시대에 믿음이 귀하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만약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믿음만 가졌었더라도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져 주님께서 친히 보시는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평안할 때 위협에 처할 때를 대비해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준비해야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저녁 찬양예배 때 보여드릴 동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다섯 명의 젊은 청년들이(사실은 결혼하여 자식까지 두고 있었으니 청년이라는 호칭 보다는 젊은이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의기투합하여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오지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 다섯 명은 다 거기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원주민들의 대창에 찔려 죽은 그들의 손에 권총이 들려있었습니다. 그들은 최후의 순간에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손에 권총을 들고 갔었지만 자신들을 공격하는 그들에게 총을 겨눌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히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믿음이 강하면 자신들을 향해 죽창을 들고 공격해 오는 그들에게 대항하지 아니하고 죽임 당하는 순간까지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너무나도 가슴 뭉클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믿음은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저자는 사도 요한의 이와 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여과 없이 그대로 기록하여 남겨 두었습니다. 동료 모든 제자들은 너무나도 두렵고 무서워 주님을 버려두고 다 도망가 버렸지만 그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 골고다 언덕 십자가 밑에까지 쫓아가 주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었고 그 어떤 위험도 감내하겠다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이요 이와 같은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거나 고통을 무서워한다면 결단코 사도 요한과 같이 처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님을 주검에서 부활시킬 만큼 놀라운 능력을 가지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가슴으로 믿고 그 어떤 환난과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열정적인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을 향한 열정적인 사랑을 가진 제자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의심 없이 발견하게 됩니다.
요20:1-3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 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 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베드로와 그 다른 제 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이 말씀 속에서 사도 요한의 주님을 향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한 말씀으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평생을 두고 친 어머니처럼 모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말로만, 형식으로만 사랑하는 채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과 힘든 일이 있더라도 일관된 정성과 자세로 남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처럼 모셨던 것입니다. 그 원동력은 바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았던 그가 훗날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진정한 충고와 명령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고 말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이는 이 시대를 미리 내다보시고 선험적으로 전해준 진리로 오늘 우리 모두가 가슴으로 받아야 할 사랑에 대한 정확한 해답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말과 혀로만 사랑합니다. 행함과 진실은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이처럼 거짓되고 말았으니 이 시대가 말세의 징조 그대로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진실된 사랑이 사라진 처지에 예수님의 고난을 아무리 외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아무리 전파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우리들이 고난주일과 부활주일을 수도 없이 많이 지켜왔지만 지금껏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요한과 같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없는 한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예배를 드린다 해도 그것은 다 자신의 의와 유익을 위한 거짓된 행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오늘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 앞에서 불을 본 듯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지극하고 진실된 사랑만이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핍박 속에 살아가는 한 유대인 아내가 고된 삶을 탓하며 남편에게 이런저런 불평을 합니다. 그러자 남편은 잠자코 듣고 난 뒤 한 마디 묻습니다. “당신 날 사랑하오?” 아내는 질문에 대꾸도 하지 않고 시집 와서 25년 동안 아이 낳고 어려운 살림살이를 해온 것을 계속 한탄합니다. 남편은 묵묵히 듣고 나서 다시 묻습니다. “그건 다 내가 알지. 그런데 당신 정말 나를 사랑하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숱한 고생과 봉사를 했어도 후회요 불평뿐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진실로 사랑했다면 불평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사랑했으면 억울하지 않습니다. 불만이 없습니다. 물론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사랑했다면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바로 이 행복한 수고, 자랑스러운 고생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죽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여도 우리들을 향한 사랑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았던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감동어린 말씀을 성경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말입니다.
주님과 함께 함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주님께서 극심한 고난을 당하실 때도 그리고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무덤에서 나오셨을 때도 늘 주님과 함께 했던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그 놀라운 일을 오직 사도 요한은 해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었고 또한 그에게 다시없는 축복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한 인생이 이 땅에 태어나 죽기까지 가장 복된 일이 과연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많이 배우고 좋은 배경을 가진 당대의 최고의 인물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모든 배경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데 거리낌 없이 헌신하였습니다. 그가 만약 그렇게 끝까지 주님을 모른 채 살았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그 아름다운 배경으로 세상에서도 별 부러움 없이 잘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누구의 가슴 속에 살아남아 있을까요? 그 누구도 모르는 한 사람으로 지구상에서 살아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20억이 넘는 기독교인들의 가슴 속에 우상처럼 살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거룩한 순교자로 가장 멋들어진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아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놀라운 인간으로 변화를 만들어 주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예수님 곁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을 바라보면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이기에 우리 하나님께서도 모든 좋은 말씀 가운데 우리들과 함께 하신다는 이 놀라운 약속을 심심찮게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수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 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 때문에 삶의 소망을 가지는 사람을 우리는 성도라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 우리 하나님의 이와 같은 약속을 믿읍시다. 부활절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 땅에 이루어진 가장 대표적인 약속 이행의 징표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우리들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우리 남은 삶을 승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복된 부활절의 메시지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3년도 부활주일입니다. 고난은 단순한 말도 단순한 일도 아닙니다. 인생에게 주어진 짧은 삶이 계속되느냐 끝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이와 같은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고 감히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우리 주님을 고귀하게 여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들을 선택하시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단순하고 쉬운 일이 아니기에 우리는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하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므로 하늘의 하나님께서도 친히 일어나셔서 죽음에 머물러 두지 않으시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 주님을 다시 살아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 당해보신 주님께서 다 아시니 때가 되면 반드시 해결해 주실 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은총을 덧입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가슴으로 진실된 사랑을 주님 앞에 내 놓아야 합니다. 사랑 없는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위해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시어 우리들의 영원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주신 주님 곁에 머물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이고 그것이 생명 그 자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된 부활 주일을 하나님께 바쳐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바로 이와 같은 믿음과 가치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그런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3년 3월 31일
부활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