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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3년 6월 8일 주일낮설교 (이 땅에서도 영원한 것)

2013년 6월 8일 주일낮설교 (이 땅에서도 영원한 것)

 이 땅에서도 영원한 것 

 

6. 9, 2013

本文:사무엘하23:13-17

說敎:崔仁根牧師

 

지난 주간 한국 중요 일간지 사회면에 등장한 한 사건은 요즘 세대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넘어 가슴이 아파옴을 느낍니다. 32살이나 먹은 아들이 재산분할에 불만을 품고 형과 부모님이 함께 살고 있는 집에 찾아가 휘발유를 쏟아 붓고 불을 질러 형과 형의 아이들 세 명(10살, 8살, 5살)이 불에 타 죽고 형수와 어머니는 중화상을 입고 생명이 위독한 상태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그 날 밤에 집에 계시지 않아 화를 면하였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처럼 오로지 자기의 유익과 돈에만 목을 매고 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가족들을 다 불에 태워 죽인 살인죄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억만금을 가져도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그토록 잔악하게 돈을 탐닉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 없는 이 세상 사람들의 허무하고 비참한 현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가르쳐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6월은 현충과 희생의 달입니다. 나라와 겨레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버린 잊을 수 없는 희생자들이 있었기에 오늘 대한민국이 이처럼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묘지에 가보면 “월남참전용사의 묘”라는 특별한 구역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끝이 없이 길게 늘어서 있는 비석들이 서 있습니다. 모두가 다 월남전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한 이들의 비석들입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월남전에 참전하였다가 전사 내지는 실종된 자만 4만 7천여 명이라고 합니다. 그 엄청난 젊은 용사들이 목숨을 담보로 보내온 달러로 우리 대한민국의 경제가 기반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단코 지금처럼 잘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지난 금요일 밤에도 이사야 53장 말씀으로 우리 주님의 소중한 희생을 공부하였지만 우리들이 이처럼 이 세상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안고 천국을 소망하며 값지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주님 예수님의 희생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맨날 말로만 희생하고 헌신하며 살아야 한다고 앵무새처럼 노래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종은 오늘 성경 속에 기록된 아름다운 희생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 시대를 새롭게 살아가야 할 바른 길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마음 귀를 열고 들어서 마음이 움직이고 삶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도 영원한 것

 

오늘 본문은 다윗 왕 때에 다윗에게 충성하였던 위대한 용사들을 열거해 놓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다윗을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를 위해 등장하는 용사들의 두목이 30명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戰果(전과)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참으로 놀랍습니다. 한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하23:11-12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이 떼를 지어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사람 앞에서 도망하되 저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을 친지라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이와 같은 30여 명의 두목들 중에 특별히 세 사람은 또 다시 빼어난 인물들이라 주군 다윗을 위해 한 목숨을 다 내어 놓고 충성하고 희생하는 위대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빼앗긴 옛 성 베들레헴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있는 우물의 물을 마시고 싶어 하자 목숨을 걸고 적이 차지하고 있는 베들레헴 우물에 가서 그 물을 길러다가 주군이신 다윗에게 바쳐드릴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것을 받아 든 다윗이 깊이 후회하며 결국 그 물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 앞에 부어드렸습니다. 그것은 물이 아니라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가지고 온 그들의 피와 같이 고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삼하23:14-17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는 말씀이 생생한 당시의 상황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희생이 무엇인지? 진정한 충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생명이라도 기꺼이 내어 놓는 그것이 바로 희생이요 충성인 것입니다. 이름도 없는 이렇게도 위대한 용사들의 아름다운 희생은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난 지 수천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성경에 기록되어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전파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도 영원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잊혀집니다. 하지만 이처럼 고귀하게 희생하며 살아간 삶의 흔적은 이 땅에서도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영원히 남아 있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신 뜻이고 우리들 또한 그렇게 보람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만이 짧은 인생 다 살고 나서 후회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을 수 있는 복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 여론조사 기관에서 95세 이상 된 어르신 50명을 살대로 특별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만약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어떻게 사실 것입니까?” 하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공통된 세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나왔습니다. 첫째, 내가 만약 다시 살 수 있다면 좀 더 생각하며 살고 싶다. 둘째, 너무 두려워하고 망설이며 살았던 인생을 새롭게 하여 좀 더 과감하게 모험을 하며 살고 싶다. 셋째, 이 땅을 떠나고 나서도 이 땅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그런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해 놓고 싶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연세 높은 어르신들의 견해를 가슴에 새겨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땅에서 비록 죽어 몸은 떠나도 자신이 해 놓은 일들은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대목에 오늘 우리들의 관심이 모아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 이웃을 위해 희생하며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목숨을 걸고 주군 다윗을 위해 희생한 세 용사의 아름다운 모습을 함께 생각하면서 우리들의 삶도 뭔가 새롭게 변화 될 수 있도록 신선한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헌신과 희생이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난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성경에 기록되어 남아 있고 모든 성도들의 삶에 복된 귀감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소원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다윗은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마음을 열고 마음속의 소원을 탄식하며 표현해 냈습니다.

 

삼하23:15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용사들과 용사들의 두목들 가운데서도 다윗의 이와 같은 소원을 가슴으로 받아 화답한 사람은 오직 세 용사뿐이었습니다.

 

삼하23:16

세 용사가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종은 이것을 막연하게 그냥 셋이라고 하고 넘어가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는 정확히 30명의 두목 중에 10%에 해당하는 작은 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은 비단 오늘 본문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10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셨으나 주님께 돌아와 감사드린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즉, 10%뿐이었기에 이와 같은 수치는 서로 공통분모가 있다고 판단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눅17:15-19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직 10%밖에는 희생하고 감사하고 선하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없다는 현실은 참으로 오늘 우리들이 눈여겨 볼만 한 일입니다. 이 종이 총신대학원에 다닐 때 서울 시내에 있는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설문조사를 하여 논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그 당시 서울 시내의 대형교회 교인들 중 십일조를 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하는 부분이었는데 거의 10%뿐이었습니다. 만 명의 교인들이 출석한다면 그 중에서 천여 명 밖에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10%를 오늘 우리들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들은 이 10%에 속하고 있는지? 아니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이 10% 안에 들어오는 참신한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을 새롭게 결단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게 길지를 못한 채 마땅히 해야 할 일조차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10%에 들어가려면 우리 주인 되시는 주님의 소원을 분명하게 읽을 줄 알아야 됩니다. 다윗의 소망어린 탄식을 듣고 일어나 희생의 제물이 되겠다고 결단한 용사는 오직 세 용사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눅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인하여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죄인 하나가 우리들의 전도로 인하여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있는 아흔 아홉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하시니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소원을 성취해 드리는 소중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다윗 곁에서 다윗의 소원을 알아차리고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갔던 다윗의 세 용사들과 같이 오늘 우리들도 우리 하나님의 소원을 알고 그 소원을 성취해 드리기 위해 세상으로 목숨 걸고 달려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아예 내 놓고 우리들에게 이에 관한 명령을 주셨던 것입니다.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윗의 소원을 듣고도 못들은 척 했던 27명의 두령과 같은 인물이 되겠습니까? 오직 10% 밖에 되지 않지만 목숨을 걸고 일어났던 세 사람의 용사들과 같은 신자가 되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들의 결단과 선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과감하게 결단하였습니다

 

이름 없는 세 용사는 다윗의 소원을 듣는 순간 한결 같은 마음으로 같이 손을 맞잡고 결단하였습니다. “주군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자!”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군 다윗이 원하는 우물은 베들레헴에 있었고 그곳은 불행하게도 적군인 블레셋 군대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적이 진치고 있는 진지 속에 있는 우물의 물을 길으러 간다는 것은 곧 목숨을 적의 손에 내주는 일이나 진배없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세 용사는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주군 다윗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겠다는 일념으로 마음을 결단하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저미는 충성이요 헌신입니까?

 

삼하23:16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진실로 그들은 용사 중의 용사였습니다. 그들이 다윗의 수십 만 군인들 중에서도 빼어난 30명 중의 세 사람이었기에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진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목숨을 내어 놓는 비장한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죽기로 각오하고 그들은 적진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기 전에는 이처럼 비장한 결단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 종은 초등학교 6학년 때 고 강재구 소령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월남전에 파병하기 위해 훈련을 하던 중 부하가 떨어뜨린 수류탄을 온 몸으로 덮쳐 자신은 산산조각이 나 죽었지만 대신 부하들을 죽지 않도록 구해냈던 강재구 소령의 이야기는 참으로 눈물 나도록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는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마음을 결단하고 자신이 죽어 희생되더라도 부하들은 살려야 한다는 최후의 살신성인으로 대한민국 군대의 영원한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로서 이처럼 비장한 결단과 남다른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95세 이상 된 어르신들이 지나간 긴 인생 여정을 되돌아보고 다시 한 번 더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땅에 자신들이 떠나가도 이 땅에 남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고백한 것은 참으로 귀담아 들어 볼 가치가 있는 말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한 번은 죽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죽는 그 길을 아무런 일 하나 해 놓지 못한 채 혼자 떠나 없어지느니 무엇 하나라도 인류를 위해 그리고 주님을 위해 삶의 흔적을 남겨 놓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세 용사들이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현충일 때마다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잊혀지지 않고 떠오르는 또 다른 한 위대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ROTC 출신 권영주 중위입니다.

1955년 전북 무주군 설천면 심곡리에서 6남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권 중위는 1979년 충남대 정밀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ROTC 17기로 임관했습니다. 육군 전차대대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권 중위(당시 25.소위)는 1980년 2월9일 오전 3시40분께 동계전투 사격 훈련을 마치고 주둔지로 복귀하던 중 조종수의 판단실수로 전차가 교량 난간을 들이받고 3m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전차는 추락과 함께 전복됐고 전차 내부는 전원이 차단된 채 화재로 유독가스가 스며들어 숨쉬기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소대장이었던 권 중위는 사고로 기절한 포수와 탄약수 등 4명의 부하를 필사의 노력으로 전차 해치(출입구) 밖으로 내보내고 자신은 연기에 질식해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 전복된 전차에서 흘러나온 연료가 과열된 머플러에 닿으며 불이 났고, 결국 권 중위는 불길에 휩싸인 전차 속에서 장렬히 산화하고 말았습니다.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던 25살의 청년을 우리는 그렇게 잊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희생은 이렇게 값진 것이고 그 사랑은 영원히 강물처럼 도도하게 역사 속에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값진 희생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 놀라운 출발점은 바로 세 용사와 같이 순간의 과감한 결단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행동하는 용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세 용사가 어떻게 그토록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냈는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군의 마음을 읽었고 그 주군을 위해 희생할 것을 결단하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기까지는 다가갑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돌아서고 맙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엄청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자신의 목숨을 쉽게 내 놓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결단까지는 했으나 끝내 행동하지 못하여 불발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름 있는 좋은 브랜드의 자동차라도 움직일 수 없다면 그것은 고철이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마음속의 소원을 감지하였다고 해도 그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행동하는 믿음으로 역사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크리스챤 신문에 교회에 중직을 맡고 있다는 한 사람이 상담을 해 왔습니다. 자기는 성경을 읽어야 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 성경이 그렇게도 읽혀지지 않아 결국은 성경을 읽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성경을 읽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제 아무리 인류 역사상 가장 고귀한 책이고 해마다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가 된다고 해도 그것을 읽지 않고 덮어 둔다면 그것은 만화책만도 못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행동하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한 세 용사는 그곳이 죽음을 부르는 적진이라 할지라도 개의치 아니하고 담대하게 뛰어드는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결국 그 물을 마시지 못한 채 하나님께 부어드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물이 아니라 세 용사의 목숨과 같은 피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삼하23:16-17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선포해 두었습니다. “행동하지 못하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 가지 놀라운 확신을 또한 전파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깨닫고 행동하고 실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약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일이 때로는 세 용사들과 같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일일지라도 말입니다. 그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요 축복을 보장하시는 길이기에 우리는 망설이지 말고 담대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현충과 희생의 달 6월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덧없이 세월만 보낼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행동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면서 주님 가신 그 길을 우리도 따라 나서야 하겠습니다. 어차피 한 번은 다 죽을 몸인데 그렇게 망설이고 계획만 세울 것이 아니라 다윗의 세 용사들과 같이 과감하게 몸을 던져 희생의 역사를 만들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영원한 주군이신 우리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녕 그 일이 주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과감하게 결단하고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만 품을 것이 아니라 일어나 행동하는 놀라운 헌신자로 거듭나야 되겠습니다. 참으로 이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다윗의 세 용사들은 해내고야 말았습니다. 얼핏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성경책에 기록하여 수 천대를 이어가며 전파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면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무엇인가 이 세상을 살다 간 흔적을 이 땅에 남겨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웃들과 하나님을 향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윗의 세 용사들과 같이 과감하게 행동하며 적진을 향하여 뛰어드는 용기 있는 삶으로 새롭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귀한 날 아버지 집에서 정성을 모아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복된 빌립보의 권속들은 오늘 받은 말씀처럼 깨닫고 결단하고 행동하여 헌신자로서, 또한 희생자로서 이 땅에 길이 남는 진정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3년 6월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이 땅에서도 영원한 것

 

6. 9, 2013

本文:사무엘하23:13-17

說敎:崔仁根牧師

 

지난 주간 한국 중요 일간지 사회면에 등장한 한 사건은 요즘 세대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넘어 가슴이 아파옴을 느낍니다. 32살이나 먹은 아들이 재산분할에 불만을 품고 형과 부모님이 함께 살고 있는 집에 찾아가 휘발유를 쏟아 붓고 불을 질러 형과 형의 아이들 세 명(10살, 8살, 5살)이 불에 타 죽고 형수와 어머니는 중화상을 입고 생명이 위독한 상태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그 날 밤에 집에 계시지 않아 화를 면하였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처럼 오로지 자기의 유익과 돈에만 목을 매고 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가족들을 다 불에 태워 죽인 살인죄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억만금을 가져도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그토록 잔악하게 돈을 탐닉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 없는 이 세상 사람들의 허무하고 비참한 현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가르쳐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6월은 현충과 희생의 달입니다. 나라와 겨레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버린 잊을 수 없는 희생자들이 있었기에 오늘 대한민국이 이처럼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묘지에 가보면 “월남참전용사의 묘”라는 특별한 구역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끝이 없이 길게 늘어서 있는 비석들이 서 있습니다. 모두가 다 월남전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한 이들의 비석들입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월남전에 참전하였다가 전사 내지는 실종된 자만 4만 7천여 명이라고 합니다. 그 엄청난 젊은 용사들이 목숨을 담보로 보내온 달러로 우리 대한민국의 경제가 기반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단코 지금처럼 잘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지난 금요일 밤에도 이사야 53장 말씀으로 우리 주님의 소중한 희생을 공부하였지만 우리들이 이처럼 이 세상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안고 천국을 소망하며 값지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주님 예수님의 희생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맨날 말로만 희생하고 헌신하며 살아야 한다고 앵무새처럼 노래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종은 오늘 성경 속에 기록된 아름다운 희생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 시대를 새롭게 살아가야 할 바른 길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마음 귀를 열고 들어서 마음이 움직이고 삶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도 영원한 것

 

오늘 본문은 다윗 왕 때에 다윗에게 충성하였던 위대한 용사들을 열거해 놓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다윗을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를 위해 등장하는 용사들의 두목이 30명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戰果(전과)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참으로 놀랍습니다. 한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하23:11-12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이 떼를 지어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사람 앞에서 도망하되 저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을 친지라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이와 같은 30여 명의 두목들 중에 특별히 세 사람은 또 다시 빼어난 인물들이라 주군 다윗을 위해 한 목숨을 다 내어 놓고 충성하고 희생하는 위대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빼앗긴 옛 성 베들레헴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있는 우물의 물을 마시고 싶어 하자 목숨을 걸고 적이 차지하고 있는 베들레헴 우물에 가서 그 물을 길러다가 주군이신 다윗에게 바쳐드릴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것을 받아 든 다윗이 깊이 후회하며 결국 그 물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 앞에 부어드렸습니다. 그것은 물이 아니라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가지고 온 그들의 피와 같이 고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삼하23:14-17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는 말씀이 생생한 당시의 상황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희생이 무엇인지? 진정한 충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생명이라도 기꺼이 내어 놓는 그것이 바로 희생이요 충성인 것입니다. 이름도 없는 이렇게도 위대한 용사들의 아름다운 희생은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난 지 수천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성경에 기록되어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전파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도 영원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잊혀집니다. 하지만 이처럼 고귀하게 희생하며 살아간 삶의 흔적은 이 땅에서도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영원히 남아 있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신 뜻이고 우리들 또한 그렇게 보람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만이 짧은 인생 다 살고 나서 후회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을 수 있는 복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 여론조사 기관에서 95세 이상 된 어르신 50명을 살대로 특별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만약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어떻게 사실 것입니까?” 하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공통된 세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나왔습니다. 첫째, 내가 만약 다시 살 수 있다면 좀 더 생각하며 살고 싶다. 둘째, 너무 두려워하고 망설이며 살았던 인생을 새롭게 하여 좀 더 과감하게 모험을 하며 살고 싶다. 셋째, 이 땅을 떠나고 나서도 이 땅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그런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을 해 놓고 싶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연세 높은 어르신들의 견해를 가슴에 새겨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땅에서 비록 죽어 몸은 떠나도 자신이 해 놓은 일들은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대목에 오늘 우리들의 관심이 모아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 이웃을 위해 희생하며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목숨을 걸고 주군 다윗을 위해 희생한 세 용사의 아름다운 모습을 함께 생각하면서 우리들의 삶도 뭔가 새롭게 변화 될 수 있도록 신선한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헌신과 희생이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난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성경에 기록되어 남아 있고 모든 성도들의 삶에 복된 귀감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소원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다윗은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마음을 열고 마음속의 소원을 탄식하며 표현해 냈습니다.

 

삼하23:15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용사들과 용사들의 두목들 가운데서도 다윗의 이와 같은 소원을 가슴으로 받아 화답한 사람은 오직 세 용사뿐이었습니다.

 

삼하23:16

세 용사가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종은 이것을 막연하게 그냥 셋이라고 하고 넘어가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는 정확히 30명의 두목 중에 10%에 해당하는 작은 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상은 비단 오늘 본문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10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셨으나 주님께 돌아와 감사드린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즉, 10%뿐이었기에 이와 같은 수치는 서로 공통분모가 있다고 판단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눅17:15-19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직 10%밖에는 희생하고 감사하고 선하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없다는 현실은 참으로 오늘 우리들이 눈여겨 볼만 한 일입니다. 이 종이 총신대학원에 다닐 때 서울 시내에 있는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설문조사를 하여 논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그 당시 서울 시내의 대형교회 교인들 중 십일조를 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하는 부분이었는데 거의 10%뿐이었습니다. 만 명의 교인들이 출석한다면 그 중에서 천여 명 밖에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10%를 오늘 우리들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들은 이 10%에 속하고 있는지? 아니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이 10% 안에 들어오는 참신한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을 새롭게 결단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게 길지를 못한 채 마땅히 해야 할 일조차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10%에 들어가려면 우리 주인 되시는 주님의 소원을 분명하게 읽을 줄 알아야 됩니다. 다윗의 소망어린 탄식을 듣고 일어나 희생의 제물이 되겠다고 결단한 용사는 오직 세 용사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눅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인하여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죄인 하나가 우리들의 전도로 인하여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있는 아흔 아홉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하시니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소원을 성취해 드리는 소중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다윗 곁에서 다윗의 소원을 알아차리고 목숨을 걸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갔던 다윗의 세 용사들과 같이 오늘 우리들도 우리 하나님의 소원을 알고 그 소원을 성취해 드리기 위해 세상으로 목숨 걸고 달려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아예 내 놓고 우리들에게 이에 관한 명령을 주셨던 것입니다.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윗의 소원을 듣고도 못들은 척 했던 27명의 두령과 같은 인물이 되겠습니까? 오직 10% 밖에 되지 않지만 목숨을 걸고 일어났던 세 사람의 용사들과 같은 신자가 되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들의 결단과 선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과감하게 결단하였습니다

 

이름 없는 세 용사는 다윗의 소원을 듣는 순간 한결 같은 마음으로 같이 손을 맞잡고 결단하였습니다. “주군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자!”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군 다윗이 원하는 우물은 베들레헴에 있었고 그곳은 불행하게도 적군인 블레셋 군대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적이 진치고 있는 진지 속에 있는 우물의 물을 길으러 간다는 것은 곧 목숨을 적의 손에 내주는 일이나 진배없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세 용사는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주군 다윗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겠다는 일념으로 마음을 결단하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저미는 충성이요 헌신입니까?

 

삼하23:16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진실로 그들은 용사 중의 용사였습니다. 그들이 다윗의 수십 만 군인들 중에서도 빼어난 30명 중의 세 사람이었기에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진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목숨을 내어 놓는 비장한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죽기로 각오하고 그들은 적진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기 전에는 이처럼 비장한 결단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 종은 초등학교 6학년 때 고 강재구 소령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월남전에 파병하기 위해 훈련을 하던 중 부하가 떨어뜨린 수류탄을 온 몸으로 덮쳐 자신은 산산조각이 나 죽었지만 대신 부하들을 죽지 않도록 구해냈던 강재구 소령의 이야기는 참으로 눈물 나도록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는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마음을 결단하고 자신이 죽어 희생되더라도 부하들은 살려야 한다는 최후의 살신성인으로 대한민국 군대의 영원한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로서 이처럼 비장한 결단과 남다른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95세 이상 된 어르신들이 지나간 긴 인생 여정을 되돌아보고 다시 한 번 더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땅에 자신들이 떠나가도 이 땅에 남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고백한 것은 참으로 귀담아 들어 볼 가치가 있는 말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한 번은 죽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죽는 그 길을 아무런 일 하나 해 놓지 못한 채 혼자 떠나 없어지느니 무엇 하나라도 인류를 위해 그리고 주님을 위해 삶의 흔적을 남겨 놓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세 용사들이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현충일 때마다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잊혀지지 않고 떠오르는 또 다른 한 위대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ROTC 출신 권영주 중위입니다.

1955년 전북 무주군 설천면 심곡리에서 6남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권 중위는 1979년 충남대 정밀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ROTC 17기로 임관했습니다. 육군 전차대대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권 중위(당시 25.소위)는 1980년 2월9일 오전 3시40분께 동계전투 사격 훈련을 마치고 주둔지로 복귀하던 중 조종수의 판단실수로 전차가 교량 난간을 들이받고 3m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전차는 추락과 함께 전복됐고 전차 내부는 전원이 차단된 채 화재로 유독가스가 스며들어 숨쉬기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소대장이었던 권 중위는 사고로 기절한 포수와 탄약수 등 4명의 부하를 필사의 노력으로 전차 해치(출입구) 밖으로 내보내고 자신은 연기에 질식해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 전복된 전차에서 흘러나온 연료가 과열된 머플러에 닿으며 불이 났고, 결국 권 중위는 불길에 휩싸인 전차 속에서 장렬히 산화하고 말았습니다.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던 25살의 청년을 우리는 그렇게 잊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희생은 이렇게 값진 것이고 그 사랑은 영원히 강물처럼 도도하게 역사 속에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값진 희생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 놀라운 출발점은 바로 세 용사와 같이 순간의 과감한 결단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행동하는 용사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세 용사가 어떻게 그토록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냈는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군의 마음을 읽었고 그 주군을 위해 희생할 것을 결단하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기까지는 다가갑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돌아서고 맙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엄청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자신의 목숨을 쉽게 내 놓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결단까지는 했으나 끝내 행동하지 못하여 불발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름 있는 좋은 브랜드의 자동차라도 움직일 수 없다면 그것은 고철이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마음속의 소원을 감지하였다고 해도 그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행동하는 믿음으로 역사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크리스챤 신문에 교회에 중직을 맡고 있다는 한 사람이 상담을 해 왔습니다. 자기는 성경을 읽어야 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 성경이 그렇게도 읽혀지지 않아 결국은 성경을 읽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성경을 읽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제 아무리 인류 역사상 가장 고귀한 책이고 해마다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가 된다고 해도 그것을 읽지 않고 덮어 둔다면 그것은 만화책만도 못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행동하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한 세 용사는 그곳이 죽음을 부르는 적진이라 할지라도 개의치 아니하고 담대하게 뛰어드는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결국 그 물을 마시지 못한 채 하나님께 부어드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물이 아니라 세 용사의 목숨과 같은 피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삼하23:16-17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선포해 두었습니다. “행동하지 못하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한 가지 놀라운 확신을 또한 전파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깨닫고 행동하고 실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약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일이 때로는 세 용사들과 같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일일지라도 말입니다. 그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요 축복을 보장하시는 길이기에 우리는 망설이지 말고 담대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현충과 희생의 달 6월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덧없이 세월만 보낼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행동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면서 주님 가신 그 길을 우리도 따라 나서야 하겠습니다. 어차피 한 번은 다 죽을 몸인데 그렇게 망설이고 계획만 세울 것이 아니라 다윗의 세 용사들과 같이 과감하게 몸을 던져 희생의 역사를 만들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영원한 주군이신 우리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녕 그 일이 주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과감하게 결단하고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만 품을 것이 아니라 일어나 행동하는 놀라운 헌신자로 거듭나야 되겠습니다. 참으로 이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다윗의 세 용사들은 해내고야 말았습니다. 얼핏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성경책에 기록하여 수 천대를 이어가며 전파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면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무엇인가 이 세상을 살다 간 흔적을 이 땅에 남겨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웃들과 하나님을 향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윗의 세 용사들과 같이 과감하게 행동하며 적진을 향하여 뛰어드는 용기 있는 삶으로 새롭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귀한 날 아버지 집에서 정성을 모아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복된 빌립보의 권속들은 오늘 받은 말씀처럼 깨닫고 결단하고 행동하여 헌신자로서, 또한 희생자로서 이 땅에 길이 남는 진정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3년 6월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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