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7일 주일낮설교 (자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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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07 July 201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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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하라!
7. 7, 2013
本文:이사야61:1-3
說敎:崔仁根牧師
뉴저지에서 살고 있는 한호남이라는 성도가 크리스챤저널에 기고한 글을 읽으면서 좋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뒤뜰에다 작은 텃밭을 일구고 상치를 심었는데 어느 날 토끼가 나타나 다 뜯어먹어버리자 2피트 가량 철망을 사다가 우리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창밖을 내다보다가 텃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광경 하나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나무 위에서 놀고 있던 청설모 새끼가 상치 밭에 떨어져 철망으로 인해 도망을 가지 못하게 되자 어미 청설모가 찾아와서 우리 바퀴를 도는 것입니다. 행여나 울타리에 작은 구멍이라도 있는가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울안에 갇힌 새끼도 어미랑 같이 울타리를 따라 도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한 열 바퀴 이상 하다가 결국은 새끼가 나올 구멍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청설모 어미는 이제 바깥에서 뛰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울안에 갇혀 있던 새끼도 어미랑 같이 뛰었습니다. 2피트 가량 높은 울타리를 넘을 수 있도록 뛰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청설모가 그 높이만큼 뛰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둘이서 한참을 뛰다가 새끼가 지치게 되자 어미는 바깥에서 새끼는 안에서 서로 마주보며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필자가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사람을 본 어미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습니다. 그 때 새끼도 깜짝 놀라 일어나더니 있는 힘을 다 해 어미가 있는 쪽으로 점프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런 다음 어미는 새기를 데리고 쏜살같이 살아졌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어미가 울안에 갇힌 새끼를 자유케 하려고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을까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평범하게 누리고 사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또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을 이토록 자유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 주님은 또한 청설모 어미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더 애쓰고 희생하셨다는 사실에 이르게 되자 가슴이 찡하게 울려 왔습니다. 지난 목요일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된 독립기념일이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수많은 독립군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자유는 결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귀한 계절에 “자유”에 대해서, 그리고 “독립”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 가슴을 열고 오늘 우리들이 누리는 이 엄청난 자유를 위해 얼마나 많고 많은 소중한 분들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유의 소중함을 가슴으로 깨닫고 사는 날 동안 우리들을 자유케 하신 예수님과 이웃들을 생각하며 우리 또한 누군가를 자유케 하는 그런 멋들어진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이를 위해 주시는 소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받고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자유하라!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의 신분을 죄인이라 규정하고 그 죄 때문에 사탄 마귀의 종노릇 하며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던 것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엡2:1-3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의 본질입니다. 제아무리 잘나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였다 할지라도 그의 본질은 이처럼 눈에도 안 보이는 사탄 마귀를 따르고 추종하며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비참한 인생일 뿐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사탄 마귀의 권세인 사망에 눌려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우리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엡2:4-6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처럼 놀라운 자유와 권세를 누리며 험한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이처럼 놀라운 축복과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감격과 감사가 넘치지 못하다면 이는 진정한 신앙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 종은 오늘 이처럼 소중한 자유를 어떻게 누리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와 같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해답을 찾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모쪼록 복된 말씀을 통해서 신령한 변화와 감격으로 넘쳐나는 풍성한 축복을 다시 한 번 더 누리시기바랍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인권을 주장하며 삶의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가 바로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미국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미국에도 감옥이 있습니다. 감옥은 죄인들을 가두어 놓고 죄인들이 지은 죄 만큼 자유를 빼앗고 철장에 가두어 두는 곳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보고 있고 겪고 있는 삶의 현실입니다. 그렇게도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타인의 자유를 이렇게도 박탈하고 감금하여 몇 년 혹은 평생을 철장 속에 갇혀 있도록 할 수가 있습니까? 거기에는 오직 하나 이 나라가 제정해 놓은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법을 어기면 누구나 그와 같은 감옥에서 자유를 박탈당해야 된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만들어 놓은 형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도 죄를 범하면 그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억압과 징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하나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의 대통령이 사면을 해 주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이 지은 죗값을 다 치루기 전에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구속이요 억압이요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이와 같은 죄를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7:15-17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23-24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이 자기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죄 때문에 탄식하는 내용들입니다. 대 사도였던 바울이 이 정도였다면 오늘 우리들이야 얼마나 더 죄의 종노릇을 하며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죄는 우리들로 하여금 진정한 자유를 박탈하고 종의 비참한 삶을 살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이었던 4일은 미국이 독립을 맞은 지 237주년이 죄는 독립기념일이었습니다.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여야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영국이 징수해 가는 세금이 더는 인내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였고 인디언보호 구역 선정이라는 명분으로 군대를 주둔시키고 주거의 자유를 박탈하였으며 급기야는 보스턴에서 시민학살 사건이 터지자 온 미국인들이 봉기하고 일어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촉발된 전쟁은 1775년 4월 19일부터 계속되어 1783년 9월 3일에야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계속된 8년 5개월간의 전쟁에서 아까운 생명 7만 7천여 명(아군-5만, 적군-2만 7천)이 희생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억압된 자유를 되찾는 소중한 희생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는 결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는 소중한 생명이 희생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값진 것이요 영적으로는 우리 예수님의 희생으로만 얻어질 수 있는 소중한 축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얻은 소중한 자유는 아무런 우리들의 공로나 희생 없이 얻어진 것이기에 사도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선물 곧 은혜라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 예수님은 보다 더 알아듣기 쉽도록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말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진리는 곧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배우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진리를 모르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소중한 은혜를 모르니 결국 구원을 모르게 되고 구원을 받지 못했으니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금요일 밤 정성구교수님을 통해서 동국대학교 총장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은혜, 은총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이 세상에 노력 없이 받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강연했다는 말씀 말입니다. 그렇게 많은 지식을 가지고 대학교의 총장까지 되었으나 그 많은 지식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는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셔서 우리들이 죄악의 종노릇하고 그 죄 때문에 상실해버린 자유를 되찾아 주시려고 어미 청설모보다 더 안타깝게 우리들을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님에게 우리들이 당해야만 했던 그 모든 죄악을 대신 지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죗값을 치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므로 오늘 우리들을 그 무서운 죄의 형벌에서 자유하게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53:4-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죽음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가장 안타까운 일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어제도 연휴를 즐기던 26살 난 여자 청년이 물놀이를 하면서 물속으로 다이빙을 하였는데 다시 물 밖으로 나타나지 않아 해가 저물도록 수색하였으나 찾지를 못했다는 안타까운 뉴스를 들었습니다. 어제 7월 6일에는 한국 전 동아그룹 회장 최원석씨의 둘 째 아들(36세)도 별장 앞 가평 홍천강에서 물놀이를 하다 익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6월 29일에는 세계적인 천재학자라 불리우던 서울대학교의 서갑양교수(41세)가 하와이 학회에 참석하러 왔다가 아직 원인도 모른 채 이 세상을 떠나 한국 뿐 아니라 세계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제는 아시아나 항공기가 한국을 떠나 센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착륙하다가 지상과 꼬리부분이 충돌하면서 화재가 발생해 307명 중에서 2명이 죽고 한 명은 실종되었으며 82명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큰 사고를 내 많은 이들의 근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순식간에 바람처럼 찾아오는 죽음은 부모도 자식을 어쩌지 못하고 자식 또한 부모님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 사도 바울도 이를 깊이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고 말입니다. 이러한 죽음 가운데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보다 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무서운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소중한 축복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장해 주셨습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우리들이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인생들이 다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는 죽음이 없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죽음도 친히 해결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이처럼 물으시는 주님 앞에 당당하게 믿음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요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 이후 마르다는 참으로 거짓말 같이 죽어 썩은 냄새가 나던 오라비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경에 기록 되어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마르다처럼 예수님을 똑바로 믿고 고백하면 훗날 나사로처럼 다시 살아난다는 예증으로 보여주신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고전15:55-58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망이 왕노릇 할 수 있는 것은 사망이 잡고 늘어지는 죄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난 성도들은 더 이상 사망 앞에서 겁내며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죄를 거두어 내시고 사망조차도 이기게 하시는 우리 주님께서 바로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스스로 죽으시고 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장본인이십니다. 할렐루야!
행2:23-24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는 말씀과 같이 우리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실 만큼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전능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사망에 매여 허덕이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그 사망을 이기고 영원히 살아갈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진정한 자유인들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생활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에서 가장 무서운 죄와 사망의 문제를 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공부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은 현실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실에는 의식주를 비롯하여 온갖 문제들이 가득합니다. 그 중에는 질병의 문제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인간관계의 문제 또한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삶의 현실에 묶이어 진정한 자유를 상실한 채 고통과 번민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 엄청난 죄 문제나 죽음의 문제보다 사사롭게 다가서는 우리들의 삶의 현실적인 문제가 더 크게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이라면 이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였기 때문이라는 진리가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약4:1-3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이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보면 인생의 문제가 어디에서 오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싸움, 다툼, 정욕, 욕심, 살인, 시기... 우리 인생의 문제가 모두 이와 같은 단어들과 연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두가 육신적이요 세상적이요 이기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이런 것들 때문에 바로 우리들의 삶의 현실이 고통과 눈물과 슬픔에 젖어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보니 가장 영적이라 할 수 있는 기도까지도 육신적으로 자신의 욕심이나 채우려고 하게 되니 진정한 자유도 만족도 감사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의 현주소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거니와 자유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덕목이 아닙니다. 자유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매우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비범한 자유하는 삶의 지름길들입니다. 잘 듣고 가슴에 새겨 놓고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반드시 자유라는 엄청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마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7:1-3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상의 말씀들을 역으로 말씀드리면 모두가 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 요인들입니다. 염려와 근심, 비판과 미움들은 우리들의 심령 골수를 상하게 하는 매우 악한 요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단어와 연관된 삶을 살아간다면 자유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진정으로 자유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이와 같은 진리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들을 곁에서 지켜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오로지 오늘처럼 잘 듣고 순종하여 실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자유라는 선물로 평안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신선한 여름을 선보이는 7월을 맞았습니다. 뜨거운 태양만큼이나 우리들의 영혼도 뜨겁고 열정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시려고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자유에 관한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하게 배웠습니다. 청설모의 어미처럼 불쌍한 새끼를 구해보겠다고 백방으로 애쓰고 힘쓴 결과로만 얻어지는 고귀한 것이 바로 자유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유능한 젊은 변호사 Patrick Henry가 버지니아 식민의회에서 영국 지도자들 앞에서 행한 명연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독립을 이루기 1년 2개월 전인 1775년 4월 23일 그는 자신들을 식민지화 하고 날마다 자유를 박탈해 온 의회 지도자들 앞에서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나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고 외쳐 미국 독립운동의 도화선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인간에게 죽음같이도 소중한 것,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이와 같은 소중한 자유를 주시려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자유를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죄와 죽음을 넘어 우리들의 삶을 가장 아름답고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오늘 말씀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려고 예배당에 모여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자유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귀하신 우리 주님으로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 멘
주후 2013년 7월 7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