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7일 주일낮설교 (무릎으로 승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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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Friday, 02 August 2013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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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으로 승리하라!
7. 28, 2013
本文:사도행전9:36-42
說敎:崔 仁 根 牧 師
지난 달 6월 26일은 미국의 비극이요 이 땅의 비극이 임한 날이었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정통 결혼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었던 결혼보호법(DOMA, Defence of Marriage Acts)을 위헌이라고 판결하고 캘리포니아에서 '우리는 동성결혼 합법화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 동성결혼은 불법이다'며 주민 7백만 명이 벌떼처럼 일어나 개정한 주민발의(Proposition8)안을 위헌이라고 판결하였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들어와 이 땅을 건국하고 돈에까지도 "In God We Trust,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고 써넣었던 이 미국이 어쩌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반대하시고 성경에 기록하여서까지도 죄악이라고 선언하신 그 죄악을 연방판사들이 감히 옳다고 판단할 수 있단 밀입니까? 더욱 놀라운 사실은 결혼보호법은 지난 1996년 미 상, 하원에서 초당적으로 합의하여 절대다수로(하원에서 찬성 342, 반대 67, 상원에서 찬성 85, 반대 14) 결의하고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까지 하여 공포한 연방 법인데 이것을 몇 명의 판사들이 둘러앉아서 위헌이라고 판결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 처사인 것입니다. 미 상, 하원에서는 법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하는 곳이고 법원은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양대 의회에서 결의하고 대통령이 서명한 것을 9명의 대법관들이 옳다 그르다 판단해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바마를 등에 업고 오바마의 입김의 영향을 받으며 정치논리로 법논리를 풀어가는 미국은 이미 썩은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미국은 우리 워싱턴 주를 비롯하여 켈리포니아주까지 이미 13개의 주가 동성결혼을 합법화 하였고 이런 곳에서 사는 인구는 미국 전체 인구의 30%를 육박하고 있으니 참으로 미국은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죄악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들이 절망하지 않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정의가 강같이 흐르도록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종은 이와 같은 때에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우리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 남아 있기에 그것을 여러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며 신선하고 새로운 희망의 나라를 기대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무릎으로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그냥 기도가 아닙니다. 무릎으로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왜 그냥 기도가 아닌 무릎으로 하는 기도여야 하는지? 함께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릎으로 승리하라!
오늘 본문은 무능하고 허물 많았던 베드로가 엄청난 기적을 만들어 놓는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해 놓은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익히 잘 아는 바와 같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잡아가는 악당들이 두려워 예수님께서 친히 지켜보시는 면전에서 그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돌아섰던 연약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참으로 믿기지 않는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죽은 사람 다비다를 다시 살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행9:40-41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사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최고의 역사요 기적입니다. 어떻게 베드로는 이처럼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요? 이에 앞서 베드로는 에니아라는 사람의 중풍병도 단번에 고쳐주었습니다.
행9:33-34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 지 팔년이라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라는 말씀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렇게도 나약하고 두려워하고 인간적이었던 베드로가 이처럼 중풍 병자도 순간에 고쳐내고 죽은 사람도 거침없이 다시 살려내는 놀라운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놀라운 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요? 오늘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면서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못난 자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일생을 되짚어 보면 오늘 우리들과 너무나도 흡사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렇듯 인간적이라는 말이 막연하게 사람들과만 살아간다면 매력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같은 인간끼리 공감대도 형성되고 사람 맛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인간관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도 관계를 갖고 있는 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늘 문제를 야기시켰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인간적인 유익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마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 종은 지난 금요일 철야기도시간에도 말씀 드렸습니다. 이웃을 섬기도 대접하되 아무런 조건 없이 하라고 말입니다. 엘리사를 섬기고 대접하기를 즐겨하였던 이름 없는 수넴 여인은 실로 조건 없이 주님의 종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정성을 어여삐 여기시고 그 집에 가장 필요한 아들을 주시던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을 섬기면서도 엄청난 계산을 하고 있었고 무엇인가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인간적인 모습입니까?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나타내며 생색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형제가 잘못하면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할까요? 하고 주님께 여쭈어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하지만 그는 잠시 후 형제가 자신들에게 어긋나는 그릇된 행동을 꾀하자 거침 없이 분노를 표출하고 말았습니다.
(마20:20-24)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여기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형제가 자신에게 잘못하며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리이까? 하고 생색을 냈던 그가 지금은 지극히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인해 분히 여기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인간적인 모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결정적인 인간의 그릇된 모습을 만 천하에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2:11-14)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베드로는 이처럼 후배인 바울에게까지 책망을 받을 만큼 어리석게 외식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외식은 참으로 성도들에게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만큼 진실을 외면한 이방인과 같은 못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후배인 사도 바울이 대 선배인 베드로를 이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책망하였겠습니까? 베드로의 본 모습이 바로 이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인간적인 모습은 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주님 앞에서 결정적인 우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26:31-35)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여기에서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을 폄하하고 자신의 의만 내세우고 있는 그릇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감히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주님 보시는 면전에서 주님을 배신하고 맙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처럼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과감히 내려놓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그처럼 연약한 사람에서 그처럼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는 과감하게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주님 앞에 다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릎을 꿇는 기도인 것입니다.
(행9: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사람을 다 내어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적인 의나 자랑이나 자아를 다 포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가장 중요한 역사를 이루기를 원한다면 베드로처럼 과감하게 결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솔직히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고 하나님의 상급보다 인간의 상을 더 사모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능력은 나타날지 몰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들의 삶에 영원히 도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이름만 높여드려야 합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난 베드로는 엄청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려드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늘의 기적에 앞서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 준 기적을 베푼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무능하고 배신자였던 베드로에게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는 과감하게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행3:11-12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것을 우리는 단순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아무나 이렇게 자신의 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선포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면서 행동으로는 자신의 의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큰 맹점으로 남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로 막는 참으로 나쁜 습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베드로와 같이 그 대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인간의 어떠한 평가와 상급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입술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자신의 영광과 유익을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그 엄청난 능력을 베드로에게 주시듯이 우리들에게 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교만하여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망할 것을 하나님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 말입니다. 베드로가 오늘 죽은 다비다를 살린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드로는 인정하신 객관적인 증거입니다. 그를 통해 그 어떤 기적과 역사를 만들어 낸다 해도 베드로는 그것으로 자기의 유익을 삼고 자신의 의를 나타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인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와 같은 베드로를 통하여서 수많은 이적과 기적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의를 나타내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무엇을 하든지 오직 우리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오직 우리 예수님의 이름만 높여드려야 합니다. 베드로와 같이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것 같이 왜 우리들을 바라보느냐?"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과 같이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들도 베드로나 바울과 같이 놀라운 기적과 이적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백년에 한 번 들어볼까 말까한 유명한 흑인 가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 1902-1973)은 노래를 잘 부르므로 영광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23개국에서 명예학위를 받았으며 아이젠하워대통령,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 때 미국 국가를 독창했고 58년에는 아이크가 유엔대표로 지명까지 했으며 63년에는 존슨 대통령으로 부터 최고 훈장인 "대통령자유상패"를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40년간 성악활동을 마치고 은퇴할 때 하는 말이 "나는 보잘 것 없는 노예밖에 될 수 없는 인간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주셨으므로 유명해진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명예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연설하여 미국 모든 시민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인간이 사는 최고의 목적은 이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데 있음을 우리는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도로서 자신을 죽이고 연단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너무나도 자아가 강하게 살아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우리들이 손해를 보면 안 되고 조금이라도 우리들의 자존심이 상해서도 안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인정을 받아야 하고 유익을 더 얻어야 하며 남보다 더 나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러한 우리들을 위해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그렇게 오래 나오고 귀한 직분을 받은 지 그렇게 오래 되어도 안 믿는 사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그런 교인으로 남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자신의 연약함을 내려놓아야 하고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철저한 자기 관리가 없이는 결단코 주님의 능력을 덧입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단언하셨던 것입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잘 하지 못하는 가장 대표적인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처럼 우리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만 원할 뿐 하나님의 그 경이로운 기적을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역사를 조용히 살펴보면 기적을 만드는 멋진 비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연약하던 시몬이 베드로가 되어 죽은 자도 살려내는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놓은 이면에는 끊임없는 그의 기도가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고 그렇게 되도록 주님께서 또한 기도를 가르쳐주시고 독려해 주셨던 사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26:40-41)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행3:1-2)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기적이 나오도록 한 베드로의 비밀입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기도하라시는 분부를 받았었고 그는 훗날 그 분부를 순종하여 특별히 기도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비밀입니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순종의 역사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이 비밀이요 해답이요 진리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비극이 있다면 이처럼 아름다운 순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기도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 주님과 단 둘이 마주 앉는 기도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그 주님의 능력을 덧입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진리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 비밀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누가 뭐래도 주님과 만나는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교회에서 매 목요일 마다 기도하는 성도들이 모인다는 소식은 참으로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방언받기를 힘쓰지 말고 은사받기를 힘쓰지 말고 축복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베드로와 같이 조용한 기도 시간을 만들어 자신의 아집과 못난 죄악을 씻어내고 내 모든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소망해 보십시다. 방언보다 은사보다 더 놀라운 축복을 덤으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받기를 원해서 받아지는 것이 아니라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예비하는 것이 더 우선순위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1917년 혁명의 결과, 모스크바 크레믈린에 서 있는 화려한 금색 지붕의 대성당 (cathedral)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과 연주회장(concert hall)으로 바뀌었습니다. 공산주의 정부는 그들의 혁명 이념에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수단을 사용해 러시아 사람들의 삶에서 종교적인 측면을 없애려고 노력했습니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지난 70년 동안 억압해 왔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박해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잃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시작되고 1990년 9월, 크레믈린에 있는 15세기의 거대한 대성당이 성당으로서의 기능을 되찾았을 때, 그때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 날을 축하했습니다. 이 사건은 "비록 소련의 정치 세력이 종교를 비합법으로 공식 선언하고 박해와 억압을 가했다고 해서, 사람들의 영혼 깊숙히 자리 잡은 믿음이 뿌리 뽑힌 것은 아니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입증하는 웅변과도 같습니다. 기도하며 때를 기다리던 그들의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끝끝내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참으로 놀라운 역사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렇게도 못나고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던 시몬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려내는 놀라운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만 살려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더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어떻게 그는 그토록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못난 자아를 깨끗이 씻어내고 오직 주님의 이름만 높여드리는 멋들어진 신앙의 근본 가치를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놀라운 자아회복은 또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까? 꾸준히 기도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통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는 참으로 보통 사람이 쉽게 만들어 낼 수 없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도출해 냈습니다. 그러니 그가 사도 중의 사도 베드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천편일률적으로 교회에만 다니지 말고 베드로와 같은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하겠습니다. 그 길은 오직 우리들의 인간적인 모습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영적인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내는 놀라운 통로가 되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루에 단 한 번이라도 주님과 둘이서 조용히 대화하는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가지는 것보다 더 고귀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와 같은 복된 과정을 통하여서 오늘의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쪼록 오늘 하나님의 집에 올라와 하나님을 만나며 복된 예배로 영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와 같은 놀라운 말씀으로 신선한 변화를 만들고 기적 같은 역사를 만들어 내는 고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귀하신 우리 주님으로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 멘
주후 2013년 7월 28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