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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3년 8월 11일 주일낮설교 (새 힘을 얻으리라!)

2013년 8월 11일 주일낮설교 (새 힘을 얻으리라!)

새 힘을 얻으리라!

8. 11, 2013

本文:이사야40:27-31

說敎:崔 仁 根 牧 師

어제는 우리 시애틀기독교회 연합회에서 조국의 8.15 광복절을 기념하여 교회대항 배구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많은 팀들이 참가하였지만 1등은 하나였습니다.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실력이 있는 자는 1등을 하고 승자가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폐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현실입니다. 지고나면 이런 저런 핑계도 많고 아쉬움도 많지만 결국 폐자는 폐자 일 뿐입니다. 개인이든 단체든 더 나아가서 나라이든 이기는 자가 있으면 지는 자가 있는 법입니다. 왜 집니까? 왜 폐합니까? 왜 전쟁에 폐하고 조공을 바치며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됩니까?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역사적인 한 사건을 조용히 묵상해 보신다면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왕하18:13-16)

히스기야 왕 십 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취하매 유다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로 내게 한지라 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또 그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앗수르 왕 산헤립 앞에서 당하는 히스기야 왕의 모습은 차라리 왕으로서의 존엄보다는 너무나도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 그 자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적국의 왕이 요구하므로 왕궁 곳간에 모아 두었던 모든 재산을 다 털어 내어주고 하나님의 성전 문에 입혀 두었던 금까지 벗겨서 갖다 바쳐야 하는 그 비참함이 피부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왜 히스기야 왕은 이 지경에까지 처하게 되었을까요?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을 대항 할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전 문에 입혀 놓았던 금까지 벗겨 앗수르 왕이 요구한 대로 금 30달란트를 만들어 바쳤던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온스로 환산하면 3만 6천 온스이니 당시 삶의 환경으로 볼 때 엄청난 액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종은 "피곤한 손을 일으켜 세우고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난 주일에 전해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새 힘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힘이 없으면 지배를 받게 되고 자유를 상실하게 되고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놀라운 새 힘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 소개해 드리며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이 임하시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새 힘을 얻으리라!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없고 연약하게 되면 주어진 인생을 활기차게 살아갈 수 없고 소중한 자유를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야곱은 이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40: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면 자심감이 넘치고 감사와 확신이 넘치는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을 그렇게 살았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이처럼 아름답게 승리할 수 있도록 "새 힘을 얻으리라"고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처럼 놀라운 새 힘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으며 그렇게 새 힘으로 충만하게 되면 어떠한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지? 계속해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신선한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새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 인생들에게 필요한 힘의 원천이 오직 돈에만 있는 줄 알고 목숨을 걸고 돈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들이 대한민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의식구조 조사"를 위해 설문을 돌렸는데 "돈은 많을수록 좋고 돈이 힘의 원천이다"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과연 돈이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 한국인들의 가치관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돈이 좋고 돈이 일정부분 힘을 과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돈 앞에 모든 사람들이 굴복하고 돈 앞에 항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뉴욕타임즈가 "돈과 행복에 관한 함수관계"에 대한 연구들을 정리해서 보도했는데 결코 돈과 행복은 함수관계가 성립하지 않았다고 보도했습니다.  칼 융 연구소장인 John Lavy도 돈이 많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조사를 했는데 오히려 그들은 Affluenza(풍요증, 부자병)란 병을 앓고 있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들이 앓고 있는 병의 증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의욕이 약해져가고 어디에든 헌신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2) 부가 더해질수록 점점 더 남을 의심하게 되며 진정한 친구를 가지지 못한  다

3) 삶의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돈으로 여행, 파티, 놀이 등으로 소일하지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인생을 지루하고 무료하게 느끼게 된다.

4) 자신의 노력과 땀으로 얻은 돈이 아닐수록(유산, 복권 등) 죄책감과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돈은 많으나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고 오히려 풍요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고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돈으로 권세를 삼고 돈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의 현실에는 그러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속출하고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8월 6일) 31살 난 로스쿨을 다니는 부인이 자살을 하여 한국사회를 또 다시 놀라게 하였습니다. 동갑내기 남편도 사법연수원생으로 두 부부가 앞으로 법조계에 두각을 나타내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있었던 터라 그 충격은 더욱 더 큽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돈이었습니다. 앞으로 판검사가 될 남편에게 시집오면서 결혼 예물을 마음에 들게 해 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외국계 은행에 근무하는 박 모(여·29)씨는 2년간 연애했던 김 모(30·대기업 연구원)씨와 약혼까지 했으나 올해 4월 파혼했습니다. 결혼 준비 과정에서 김씨 측이  "시어머니와 시누이 2명 등 총 7명에게 1000만 원대인 에르메스 가방을 혼수로 줘야 한다"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박씨는 "신랑 신부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품도 아니고 친척들 가방을 최고급 명품으로 해오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작년 12월 변호사인 장모(34)씨와 결혼한 이모(여·28)씨는 결혼 과정에서 지출했던 혼수 비용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결국 건강까지 악화돼 다니던 회사를 그만둬야 했습니다. 항공사 승무원이었던 이 씨는 아파트(2억9000만원)·자동차(5000만원)·기타(5000만원) 등 3억9000여억 원을 혼수 비용으로 썼습니다. 이 씨의 아버지는 변호사인 사위와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큰돈을 들였지만, 막상 결혼 후에는 "변호사 사위 보자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여자가 몇 억 원을 써야 하느냐"며 후회했다고 합니다.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2013년도 결혼 비용은 약 2억 808만원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돈의 힘을 엉뚱한데서 찾고 있는 현실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코 이와 같은 돈이 진정한 삶의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위에서 생생하게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은 살 수 없다던가, 돈으로 좋은 선물은 살 수 있지만 사랑은 살 수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우리 인생의 원동력인 새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 힘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40:3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의 이와 같은 능력을 알았던 다윗은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 못해 다음과 같은 시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오늘 우리들에게 깨우침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과연 체험한 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놀라운 고백이요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시103:1-5)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이렇듯 하나님이 바로 우리들 삶의 힘의 원천이심을 알고 고백할 수 있을 때만이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위해다신 능력을 기대하고 또한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18: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새 힘은 결코 돈이나 이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절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인생들에게는 지속적인 새 힘아 필요합니다

성군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를 역으로 보면 하나님이 목자로 우리들을 인도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인생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그리도 유명한 것은 왕이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힘과 능력을 필요로 하고 있는 다윗의 신앙이 너무나도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을 가졌기에 그는 강성한 나라의 강력한 왕이면서도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시16:1)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라는 기도와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와 같은 모습에서 하나의 소중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들이 가진 육신적인 힘이나 영적인 힘을 중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한결같이 제한적이고 유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새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새 힘을 주시되 어쩌다 한 번만 주고 마는 분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시는 너무나도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시84:5-7)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 나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은 결코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새 힘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지속적으로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새 힘이 없다면 비록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연약한 인생들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40:30-31)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우리 인생들의 힘은 언제나 제한적이고 유한한 것임을 우리는 순간이라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새 힘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공급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들의 육신에 갇혀서 하나님은커녕 우리들의 육신적인 삶마저도 복되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육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은 결코 산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숭이를 생포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목이 좁은 항아리에 넣어두고 기다리면 원숭이가 그 바나나를 가지기 위해 항아리에 손을 넣는데 그때 그에게 다가가 잡으면 된다고 합니다. 원숭이는 바나나를 얻기 위해 목이 좁은 항아리에 손을 넣어 바나나를 잡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잡으러 와도 그 바나나를 놓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나나를 쥐고 있으면 항아리에서 손이 빠지지 않아 도망조차 못하는데도 그 바나나에 혼이 빼앗겨 자신이 붙잡혀 죽는 줄도 모르고 그 바나나를 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자신만을 위해 사는 데는 실로 새 힘이 필요하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여기 선교사님들의 순교 이야기를 들어보신다면 왜 오늘날 우리들에게 지속적인 하나님의 새 힘이 필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호주 근처에 유 헤블리지스 제도(3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 진 제도)라는 원주민촌이 있습니다. 이곳에 영국 선교사이며 학자인 쟌 윌이엄즈가  처음으로 들어가 믿음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 상륙하는 즉시 해변에서 처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해리스 목사가 들어갔는데 이곳에 당도한 지 사흘도 되기 전에 또 다시 살해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쟌 골든 내외가 들어가 원주민과 사귀는데 겨우 성공하였지만 역시 백인들을 증오하는 세력들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네 번째로는 맥 네어 선교사가 들어갔으나 1년도 채 버티지 못한 채 살해되었습니다. 다섯 번째로 들어간 선교사는 골든이었는데 원주민들과 잘 어우러져 신약성경 번역에 착수하여 원주민들이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번역하는데 혼신을 다 바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시 괴한이 침입하여 성경 번역작업을 하던 골든을 살해하였습니다. 그의 피가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장면을 번역한 부분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일곱 번째 선교사로 로버트슨 목사가 상륙하여 원주민들을 복음화 시켰으며 그 이후 40년 뒤에는 유 헤블리지스 제도 30개의 모든 섬이 복음화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힘이 이토록 잔인하게 선교사들을 살해하는 이런 처참한 곳으로 쉬지 않고 상륙하고 들어가도록 만들었을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새 힘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힘과 전혀 다른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새 힘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바로 이와 같은 새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처럼 놀라운 새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새 힘을 얻으려면...

오직 우리 하나님으로 부터만 나오는 이처럼 소중한 새 힘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한 해답 또한 성경에 기록하시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죽어가는 불쌍한 생명을 살려 낼 수 있는 그 놀라운 새 힘이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임을 하나님은 우리 보다 먼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소중한 방법을 함께 찾아 가슴에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을 믿고 바라면 받을 수 있습니다

(40:30-31)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얻는 소중한 해답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이처럼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仰望(앙망)”이라는 말은 믿고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한 하나님을 기대하는 자는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만 의지하고 잠잠히 기다리면 받을 수 있습니다

(30:15)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새 힘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평생을 전쟁하고 승리하다가 끝내는 왕이 되었던 다윗은 하나님의 이와 같은 놀라운 약속의 비밀을 잘 알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가 전 삶을 통하여 체험한 이와 같은 하나님을 오늘 우리들에게 소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37:5-7)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께 우리들의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잠잠하게 저를 의지하며 어떤 경우에도 길이 참고 인내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반대로 사람을 보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인간적인 방법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잠잠하고 신뢰한다는 말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기대한다는 뜻이니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기다릴 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은 새 힘을 주시어 승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22:42-43)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로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승리할 수 있도록 친히 사자를 보내시어 예수님께 새 힘을 공급해 주셨다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 길은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이처럼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복된 길을 가슴에 품고 끝끝내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받아 누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시대는 참으로 무능의 시대요 절망의 시대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희망의 소리보다는 탄식의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겠습니까? 다행히도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이처럼 새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길을 친히 소개해 주셨으니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고매한 선배가 가르쳐 주어도 마땅히 따라 갈 것인데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축복인데 우리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헛된 세상에서 힘을 구하지 말고 친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신선하고도 소망이 넘치는 새 힘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일용 할 양식이 필요하듯이 험한 이 시대를 싸워 이기려면 날마다 새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 힘을 날마다 누리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잠잠하게 인내하고 기다려야 하며 촌각을 다투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처럼 놀라운 약속을 가슴에 품고 우리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새 힘을 받아 우리 자신도 이기도 세상도 이기는 능력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와 같은 복된 새 힘으로 날마다 천국을 맛보는 진정 복 받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3811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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