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8일 주일낮설교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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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8 August 2013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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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8. 18, 2013
本文:에스겔37:1-10
說敎:崔 仁 根 牧 師
우리 인생들은 상식선상에서 우리들이 배우고 경험하고 아는 것만 말하고 또한 믿기 마련입니다. 그 이상이 되면 절대적인 믿음이 없는 한 믿을 수도 인정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역사적으로 바로 이와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온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사마리아가 굶주리게 되었는데 부정하여 평소에는 먹기는커녕 거들 떠 보지도 않았던 나귀머리 하나가 은 40온스에 팔려나가는 기현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급기야는 성안에서 굶어죽게 된 사람들이 자기의 자식을 삶아먹는 처참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왕하6:26-29)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이것이 당시 아람 왕 벤하닷 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에워쌌을 때 일어났던 처참한 현상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왕하7:1)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라고 말입니다. 이는 모든 물건이 정상적인 가치로 통용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아이를 삶아먹어야 했을 정도로 처참했던 현실이 24시간 안에 정상화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들은 것입니다. 그 때 왕의 한 신하가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습니다.
(왕하7:2)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라고 말입니다. 이는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토를 달고 믿지 못하겠다고 선언하는 이 사람에게 최대의 저주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었습니다. "엘리사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네 눈으로 똑똑히 보겠지만 너는 그 순간에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사마리아성의 문제는 선지자 엘리사의 말대로 24시간 만에 깨끗이 해결되었고 모든 물가는 정상적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늘의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라고 믿지 못하였던 그 사람은 결국 그 현상이 정상으로 회복된 것은 보았으나 선지자의 예언대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이 보다 훨씬 더 믿기 어려운 현상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죽은 지 오래 되어 마를 대로 마른 뼈를 바라보고 있는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엉뚱한 질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말입니다.
(겔37:1-3)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 생생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엄청난 질문을 받았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대답할 것입니까? 오늘은 이와 같은 질문을 가슴에 품고 오늘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고 고백하는 놀라운 변화를 덧입으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 주신 이 白骨(백골)에 관한 환상은 참으로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망할 대로 망하여서 백성들은 흩어지고 국토는 황폐하여진 이스라엘이 과현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절망을 예언하고 있고 또 다른 의미로는 도무지 회복의 희망이 없는 죽은 성도들의 마지막에 진정한 부활의 생명으로 새롭게 회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백골을 향하여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질문하신 것입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질문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였겠습니까? 오늘은 바로 이와 같은 놀라운 질문에 에스겔이 대답한 대답을 가슴에 품고 우리들도 눈앞에 닥친 문제로 절망하지 아니하고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생의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우선 나를 알고 또 하나님을 아는 생활입니다. 우리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하늘의 하나님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신약시대의 최대의 사도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토록 일생을 다 바쳐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는 거룩한 승리자가 될 수 있었는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자랑할 만한 인물이었지만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온전히 절대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라 승리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바로 알게 되니 또한 하나님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렇듯 그는 자기 자신을 똑 바로 인식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에 대해 이처럼 처절하게 탄식하고 절망해 본 인물들을 그리 쉽게 만나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 세대를 풍미하고 자랑할 만한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었던 그가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처럼 절망하고 탄식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진정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는 이처럼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또한 하나님에 대해 엄청난 신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부터 이렇게 놀라운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그도 우리들과 똑 같이 자기 자신을 믿고 하나님을 대항할 정도로 교만하였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던 것입니다.
(행9:1-5)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것이 교만하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바울로 변화되는 놀라운 장면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이 과연 얼마만큼 크신가를 똑 바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한 순간에 자신을 장님으로 만들어버리신 주님 앞에 자신의 무능력과 초라함을 처절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잠시 잠깐 후면 에스겔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것처럼 우리 모두 백골이 되어 소망 없는 자가 되고 말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우리 인생들의 현주소를 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성경에 남겨 두었습니다.
(벧전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약1:10-11)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사40:6-8)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인생들은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교만하고 싸우고 다투며 그렇게도 소중한 세월을 낭비하며 살아가니 참으로 안타깝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20대 후반의 두 운전자가 고속도로를 달리다 차선을 바꾸는 과정에서 서로 시비가 붙어 운전을 하면서도 서로 심히 다투었습니다. 그러다 분에 못 이긴 한 운전자가 자신과 다투던 운전자를 추월하여 그 앞으로 들어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급정거 하자 그 뒤를 따르던 자동차 다섯 대가 갑자기 일어난 이 돌발 사태로 큰 혼란과 위험을 당하였고 급기야 다섯 번째로 달려오던 운전자는 이 상황을 빨리 대처하지 못해 앞 차를 들이받고 그 자리에서 숨지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인생들이 인생의 연약한 본질을 망각한 채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와 같이 혈기를 다스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 라고 말입니다. 에스겔이 본 골짜기의 많은 뼈들이 우리들에게 이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 있을 동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그 생명이 다하고 나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살과 같이 빠르게 흐르는 세월 앞에서 에스겔 앞에 놓인 골짜기의 백골들이 남은 삶을 살아가는데 큰 교훈으로 남아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께 우리들의 모든 삶을 맡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이 배우고 또 깨달아야 할 중요한 대목은 하나님의 질문을 받은 에스겔의 대답에 있습니다. 마를 대로 마른 골짜기의 무수한 뼈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종 에스겔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인자가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말입니다. 뜻밖에 하나님으로부터 이 놀라운 질문을 받은 에스겔은 당황하거나 주저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명쾌하고 놀라운 대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금요일 밤에 공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신앙의 단면입니다. 모든 권한을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다는 신앙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은 더러 체험하였습니다. 엘리야도 죽은 사람을 살려 냈었고(왕상17:17-24), 그의 제자 엘리사 또한 죽은 자를 살려 내었습니다(왕하18:32-37). 하지만 그들은 뼈에 살이 붙어 있고 죽은 지 오래지 않은 시체를 살려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은 그와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오래된 뼈들만 앙상하게 말라 있는데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고 물으시는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앙상한 뼈들이 다시 살아난 역사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대답은 더욱 더 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며 "주님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한 에스겔의 지혜와 믿음은 가히 오늘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놀라운 믿음입니다. 그래서 John Calvin은 "신앙이란 눈을 감고 귀만 기울이는 것이다."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Moody 선생님도, "신앙이란 인간의 지식을 하나님 앞에 포기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난 줄 알고 엄청나게 설쳐대던 사울이 한 순간에 주님을 만나 시력을 잃어버리고 꼼짝달싹하지 못하며 부끄러움을 당했던 것처럼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잘난 척 하거나 자신의 의를 들어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베드로를 잊지 못하고 좋은 교훈의 귀감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당당하게 선언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죽을지언정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고 말입니다. 그러한 그에게 주님은 간단하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네가 이 밤에 날이 새기도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호언장담하였습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그는 그 밤에 날이 새기도 전에 주님께서 친히 보시는 면전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 그는 또 다시 주님 앞에서 질문을 받게 됩니다.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말입니다. 그 때 그는 어떻게 대답하였습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깨닫고 성숙하고 변화된 그의 대답은 그 자체로 달라진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베드로와 같이 에스겔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고 새로워진 믿음의 모습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모든 삶의 주권이 오직 우리 하나님께만 있는 줄 알고 하나님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에서만 찾을 수 있는 소중한 믿음의 유산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에스겔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목도하였습니다. 마를 대로 마른 그 숱한 뼈들이 큰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서로 연락하여서 무서운 군대로 다시 부활하여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그 때의 상황을 글로서 잠시 인식하고 있지만 에스겔은 그 놀라운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하지만 바로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능력이심을 그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확신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아직도 연약하고 미련하여서 하나님을 우리들의 능력과 지식에 가두어 두고 우리들이 못하면 하나님도 못하실 줄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에스겔과 같이 이렇게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였으니 하나님의 그 엄청난 능력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놀라운 기적을 일일이 에스겔을 통하여서 명령하시고 기적이 일어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 과정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나타납니다.
(1) 소리가 있었습니다
(겔37: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이것을 AV, RSV에서는 noise(소리)로 번역하였고, RV에서는 thundering(우뢰소리)로 번역하였으며, Kliefoth는 나팔소리도 해석을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부활할 때 소리가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고전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등의 말씀들과 같이 말입니다.
(2)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겔37: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라는 말씀과 같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 놀라운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는 소리도 없이 움직임도 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도 진정으로 부흥되려면 사랑의 움직임이 있어야 하고 전도의 움직임이 있어야 하며 섬김의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부활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도 이처럼 놀라운 움직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3) 연락이 있었습니다
(겔37: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이와 같은 연락은 사방에 흩어져 있던 뼈들이 자신의 자리로 찾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연락이 없으면 건강한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하게도 모든 뼈들이 저마다 자신의 자리를 찾아 연락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그와 같은 제대로 된 연락이 없었다면 부활을 하였다 해도 기형아로 부활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연락은 온전함의 근본인 것입니다.
(4) 완전한 육체가 형성되었습니다
(겔37: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에스겔이 보고 서 있는 가운데서 흩어져 있던 뼈들이 서로 연락하고 그 완성된 골격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는 놀라운 역사를 통해 완전한 육체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 생명이 없었으므로 아직까지는 시체에 불과했습니다.
(5) 생기가 들어갔습니다
(겔37:9-10)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이리하여 사방에 흩어져 있던 마른 뼈들이 마침내 온전한 사람으로 부활하여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에 들어간 “생기”가 오늘 우리들의 시선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이 종이 가장 강조하여 말씀드리는 “하나님의 주권”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해도 마지막 생기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가능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이 생기가 성령님이 되시어 오늘 우리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능력이시고 성령님이 생명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명의 원천인 이 성령님인 것입니다. 평생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승리했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고 말입니다. 이는 마지막 때에 인생들이 무엇에 취하고 무엇에 갈급해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하신 말씀입니다. 과연 이 시대는 술에 취하고 성령님에 갈급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이 한 마디 말씀을 굳게 붙잡고 소망 없는 이 시대에 진정한 부활의 역사를 이루어 낼 수 있도록 생명의 원동력이신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신앙생활의 마지막 終着(종착)은 부활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과연 이 땅에서 뿐이라면 그 누가 주님을 위해 살며 눈에도 보이지 않는 영원을 사모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서 사는 삶만이 우리들의 전부가 아니고 진정으로 우리들이 영원히 복락을 누리며 살아갈 곳은 천국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인은 부활신앙을 가지고 내일을 소망하며 영원을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을 통하여서 보여주신 부활의 이 놀라운 환상은 장차 우리 성도들이 누리게 될 소망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 인생의 본질을 바로 인식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지니고 계시는 하나님께로 귀의하는 용기와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넘어선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마른 뼈들도 다시 살려내시는 엄청난 능력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가슴으로 고백하고 그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도 승리하고 천국에서도 영원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능력의 근원이신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아버지 집에 올라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와 같은 복된 새 힘으로 날마다 천국을 맛보는 진정 행복한 심령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3년 8월 18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