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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4년 9월 28일 주일낮설교 (위대한 사랑!)

2014년 9월 28일 주일낮설교 (위대한 사랑!)

위대한 사랑!

9. 28, 2014

本文:창세기13:1-13

說敎:崔 仁 根 牧 師

서울 용산의 삼각지 뒷골목엔 '옛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허름한 국수집이 있습니다. 그곳엔 달랑 탁자가 4개밖에 없는 참으로 조그만 식당입니다. 주인 할머니는 25년을 한결같이 연탄불에 뭉근하게 멸치국물을 우려내 그 국물에 국수를 말아냅니다. 10년이 넘도록 국수 값은 2천원에 묶어놓고도 면은 얼마든지 달라는 대로 더 줍니다. 몇 년 전에 이 집이 SBS방송국에 소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 늙수그레한 노신사가 찾아 왔습니다. 그는 15년 전에 사기를 당하여 전 재산을 다 들어먹고 아내마저도 떠나버린 거지가 되어 용산 일대를 구걸하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식당마다 돌아다니다 쫓겨나기를 거듭하다 보니 독이 올라 식당에다 휘발유를 들어붓고 불이라도 질러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던 중 방송국을 통하여 이 할머니의 식당 소식을 들고 그 식당으로 찾아갔던 것입니다. 국수가 나오자 그는 허겁지겁 먹어 치웠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 그릇에다 국물이며 국수를 다시 채워주었습니다. 두 그릇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그는 일어서더니 냅다 도망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할머니가 쫓아 나오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냥 가, 뛰지 말고... 넘어지면 다쳐!" 도망가던 노신사는 할머니의 그 한 마디에 세상에 대한 모든 원한을 다 풀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만들어 놓은 풍성한 열매요 축복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집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누가 뭐래도 성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도 이 할머니와 같은 푸근한 사랑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만이 사람들의 허다한 허물을 덮어 주고 상처 입은 영혼들을 살려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작지만 위대한 사랑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참으로 쉽고도 어려운 것이 사랑인 것 같습니다. 함께 듣고 믿음을 만들어 짧게 살고 가는 인생인데 서로 사랑하면서 그렇게 따뜻한 가슴으로 비둘기같이 더불어 살 줄 아는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위대한 사랑!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 웬 일인지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아마도 자식이 없었던 그는 외롭고 허전하여 조카라도 데리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조카 롯에게 하는 따뜻한 사랑을 보면 오늘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조카가 어떻게 처신하든 아브라함은 한결 같은 사랑으로 그를 대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사랑 방법을 통하여서 우리들의 모습을 성찰하고 새롭고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 가보기를 원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그 풍성한 사랑을 덧입고 외롭고 힘든 이민생활을 승리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도록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과 롯이 분가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 동안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으니 자연 함께 하던 조카 롯도 복을 받았습니다. 서로 소유가 많아지니 종들도 많아지고 가축들도 많아지자 원치 않는 충돌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서로 간에 뜻하지 않는 다툼과 미움이 생겨났습니다. 지혜로운 아브라함은 그것이 결코 은혜롭지 못하고 유익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가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가하는 과정이 오늘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13:8-11)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이것이 재산을 분할하는 아브라함의 방식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모든 선택권을 롯에게 먼저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밑줄 친 부분,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겠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철없는 롯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동안 롯이 그처럼 부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늙었고 자신은 아직 젊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먼저 눈에 보이는 좋은 땅을 차지하고 삼촌에게 등을 보인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인지도 모릅니다. 서로 먼저 좋은 것을 차지하겠다는 욕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아낌없이 다 내어주고 먼저 선택해 가라고 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가면 친구들이나 선배들이 반갑다고 부족한 이 종을 데리고 골프장으로 인도해 줄 때가 있습니다. 한국은 워낙에 골프 치는 비용이 비싸기 때문에 데리고 가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한국에서 골프체가 또 없으니 그것까지 구해서 도와줍니다. 한 번은 저를 그렇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선배 집에서 자고 새벽같이 골프를 치러갔습니다. 그런데 캐디가 불러주는 거리와 그 거리에 맞도록 건네주는 채로 쳤는데도 거리가 늘 20-30야드 짧은 겁니다. 그래서 동료들이나 캐디 앞에서 "짤돌이"라는 창피한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골프를 다 끝내고 마지막 정리를 하던 캐디가 저를 보고 하는 말이, "아, 이 채는 여자 건데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배가 저에게 골프채를 구해다 주면서 자기 부인 것을 나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저는 그 선배에 대한 모든 말을 다 잊기로 하였습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저에게 대우하는 모습은 전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사랑은 자기보다 상대를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기보다 더 귀하고 좋은 것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가슴 뭉클한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바로 이처럼 소중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카 롯이 자신이 준 기회를 일언반구도 없이 기름진 땅을 선택하고 떠나버리자 그는 망연자실하고 그 자라에 멍하니 서 있을 정도로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위로하고 축복으로 보상해 주실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창13:14-17)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롯이 떠난 아브라함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들처럼 사랑하고 같이 살았던 롯도 떠났고 눈에 보이는 기름진 땅은 그 조카가 먼저 차지하고 떠나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롯이 버리고 간 그 땅은 훗날 축복의 땅이 되었고 눈에 좋은데로 선택하고 갔던 소돔 땅은 유황불로 망하고 말았으니 진정 우리들이 선택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것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사랑이 이기는 것이요, 사랑이 축복이요, 사랑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조카 롯이 찾아 들어갔던 소돔 땅에 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롯은 그 전쟁 통에 사로잡혀 포로가 되어버렸고 모든 재산 또한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창14:12)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 가솔들을 거느리고 조카 롯을 구출하러 나갔습니다.

(창14:14)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 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상대는 한 나라와 다른 나라의 싸움이 아니라 서로 동맹한 여러 공동체가 함께 하는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창14:1-3)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 오멜과 고임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에 모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생명을 내 놓고 싸우는 위험한 개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카 롯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아브라함은 이렇게 적은 용사들을 이끌고 롯을 구출하기 위한 필사의 각오로 전쟁터에 뛰어들었던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보통 평범한 사람들 같았으면 참으로 얄밉게 삼촌을 버려두고 제 눈에 좋을 대로 먼저 소돔 땅을 선택하고 미련 없이 떠나버렸던 조카를 조소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심 고소해 하면서 그 상황을 즐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명조차도 미련 없이 내어 놓고 그 조카를 구출하기 위해 전쟁터에 뛰어드는 위험한 결단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종은 아브라함의 이와 같은 사랑을 "위대한 사랑"이라고 정의했던 것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사랑하고 사람은 대충 대하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 또한 사랑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웃 사랑이 없는 이와 같은 두 얼굴의 사랑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은 실례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어떤 돈 많은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 찾아 와서 간청하였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저를 받아 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계명(십계명 후반부 이웃 사랑에 관한)을 다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자신 만만하게 그것이라면 어려서부터 이미 다 지켰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렇게 어려서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셨던 계명을 다 지켰다고 호언장담하던 그 청년은 그 많은 재산에 막혀 결국 주님을 포기하고 떠나가게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입니다(누가복음18:18-25참조). 결국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도대체 사람입니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그것이라도 희생하고 포기할 줄 아는 결단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명조차도 내어 놓은 채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전쟁터에라도 당당하게 뛰어 들었던 아브라함의 사랑이 최상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아브라함을 도와주시어 현실을 초월한 위대한 승리를 거두게 하셨던 것입니다.

(창14:15-16)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던 아브라함은 그 모든 전쟁에서의 수입의 십 분의 일 즉 십일조를 살렘왕 멜기세댁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율법의 의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감사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독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소녀가 베를린 뒷골목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습니다. 병들어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봉양하느라 추위에 떨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동정의 손길을 뻗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바이올린을 어깨에서 내리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신사가 빙그레 웃으며 소녀의 바이올린을 받아 들고 연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요한 선율이 골목에 울려 퍼졌습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연주가 끝나자 아름다운 연주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소녀의 바구니 앞에 돈을 던졌습니다. 신사는 구경꾼들에게 인사하고 소녀에게 바이올린을 건네주며 말없이 가버렸습니다. 그러자 구경하던 사람이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저분이 베를린 대학의 교수 아인슈타인 박사란다."

늘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사람이 상대에 대해 가지는 최상의 사랑은 겉으로 표현되어지는 그것으로도 평가가 가능하지만 진짜 더 큰 사랑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가슴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가슴으로 하나님께 아뢰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사랑해도 사람인지라 모든 것에 한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사랑하는 이를 부탁드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예수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는 십자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잘 압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큰 사랑이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들을 위해 늘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떤 것보다 더 귀하고 값진 축복이요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어리석어서 이 세상에서 돈이면 최고인 줄 알고 그 돈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밤낮으로 우리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한 사람만 가질 수 있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돈보다 더 귀한 사랑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종이 부산에서 전도사로 교회를 섬길 때 1남 4녀를 가진 부모님이 계셨습니다. 남편은 안수집사님이요 부인은 권사님이셨는데 자신들의 딸과 부족한 이 종을 결혼시키려고 공을 많이 들였던 분들이었습니다. 그 때 이 종은 어리고 아직도 서울에 가서 대학원과 미국에 가서 유학을 해야 하는 긴 미래가 남았기에 결혼은 사치요 꿈도 꾸지 못할 때였습니다. 결국은 그분들의 그 꿈이 무산되고 이 종은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한국 방분 중 문득 그 권사님이 생각나서 전화를 드렸더니, 눈물로 반가와 하시며 오늘 새벽에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 최목사님을 한 번만 만날 수 있게 해 주세요 했는데 이렇게 전화가 왔네요." 하면서 반가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제 가슴을 큰 충격으로 감동시켰습니다. "최목사님, 저는 목사님께서 그 때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가신 다음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아무도 몰래 울었습니다. 이 종이 걸어 온 그 멀고도 외로운 인생 여정에서 이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귀한 분이 있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그렇게도 사위 삼으려고 공을 들였는데도 냉정하게 다 뿌리치고 미련 없이 떠나버린 사람인데 기도는커녕 미워하고 원망할 수도 있었겠건만 그 권사님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니,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을 두고 미련 없이 자기의 눈앞에 유익만을 위해 떠나버렸던 그 못난 조카 롯이지만 늘 가슴에 품고 기도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조건 없는 사랑으로 그는 일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18:30-32)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그곳에 있는 롯을 구하기 위해 이처럼 애절하게 의인 50에서 10인이 되기까지 묻고 또 묻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기도였고 간청이었고 애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이처럼 아브라함이 결사 기도를 드리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 그곳에서 살고 있는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와 같은 애절한 기도를 과연 롯은 상상이나 하고 있었을까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기도만 간절하게 올려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누가 인정해 주던 안하던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밤낮으로 기도해 주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이 땅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교회를 주셨던 축복의 달 9월도 이제 오늘로 그 마지막 주일입니다. 과연 우리는 좋은 교회를 받아 놓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지난 시간 "위대한 선택"에 이어 오늘은 "위대한 사랑"에 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결단으로 위대한 사랑을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오늘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천사 같은 말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제 아무리 위대한 결단은 한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서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런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대단한 역사를 만들어 갔던 아브라함과 같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체로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 가슴이 메말라 사랑 없는 사림이 되지 않기를 그렇게도 소원하시기에 우리들은 이제 조건 없이 이와 같은 위대한 사랑으로 남은 삶을 채워야 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선택권을 주어버리고 위기에 몰려 있을 때 건져주고 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축복해 주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온갖 방법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처럼 아브라함처럼 사랑하며 살겠다는 위대한 결단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모쪼록 말씀을 받고 하나님께 정성 모은 예배로 영광을 올려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랑으로 사는 날 동안 상급과 칭찬으로 승리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4년 9월 2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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