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8일 주일낮설교(속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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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08 February 2015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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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贖罪)
2. 8, 2015
本文:요한복음3:14-20
說敎:崔 仁 根 牧 師
지난 2월 4일 IS가 인질로 잡고 있던 요르단 공군조종사 마즈 알카사스베 중위를 철장에 가둔 체 불에 태워 화형을 시켜 살해한 동영상을 내 보냈습니다. 이 사건으로 요르단이 다시 수감 중이던 테러 2사람을 사형시키는 보복으로 맞서고 추가로 4사람을 더 사형시키겠다고 선언하므로 고귀한 생명 살육이 보복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전 세계적인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앞서 IS는 일본인 인질 두 명을 각 1인당 1억불씩 2억불을 내 놓으라는 몸값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한 명은 살해하고 나머지 한 명은 감옥에 수감된 테러범과 맞바꾸자고 제안하였다가 이도 수용하지 않자 리포터로 활동하다 인질이 된 일본인을 잔인하게 살해하여 만인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마지막 때에 우리들이 목도하고 있는 죄악된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를 미리 내다 보신 듯 우리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 네 원수는 네 집안에 있느니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마10:34-36)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오신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자와 배척한 자들의 세계가 이처럼 극명하게 원수로 갈라질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말씀이 이 마지막 때에 IS와 서방국가의 전쟁으로 현실화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물고 싸우며 소중한 사람의 생명을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고 여의치 않으면 살해하는 이런 끔찍한 현실은 지금이 바로 말세라는 단적인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지금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거대한 표어를 내걸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속죄"에 관하여 공부하면서 종말적 심판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어려운 이 시대에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떠한 역사를 이루어 놓으셨는지 믿음의 가슴으로 깨닫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속죄
속죄라는 말은 신학적으로는 매우 유명한 단어입니다. 소위 신학생으로 이와 같은 단어 하나를 온전히 숙지하지 못한다면 신학생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할 만큼 귀하게 쓰이고 신학의 기초라 할 만큼 의미 있는 비중을 차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와 같은 "속죄"라는 낱말이 무려 183번이나 사용될 만큼 많이 쓰이고 있는 단어입니다. 속죄라는 말을 영어에서는 Atonement라고 하는데 영한사전을 찾아 보면 "그리스도의 속죄"라고 설명해 두었습니다. 세상 사전에서도 예수님의 속죄라고 쓸 만큼 잘 알려져 있는 이 유명한 단어를 우리 믿는 성도들이 잘 모른다면 부끄러운 일이요 하늘의 하나님께 불경스러운 일이므로 오늘 잘 배워서 큰 은혜의 방편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Atonement라는 말은 원래 Atone이라는 말에서 발전한 것인데 Atone은 "보상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쓰고 있는 속죄라는 말은 우리들이 지은 죄를 씻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불하시는 보상을 하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예수님이라는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그 보상을 지급하셔야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으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속죄의 의미
속죄를 논하기 전에 오늘 우리들의 신분 상태가 과연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부분에 관해서는 일단 관심이 없고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가르치고 설명을 해 주어도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건강한 사람들을 앉혀 놓고 위암을 어떻게 치료하는지에 대한 강의를 한다고 해 봅시다. 그 누가 그 강의에 관심을 가지고 경청하겠습니까? 건강한 그들에게는 아무런 관심거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위암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말기 암 환자라면 이처럼 권위 있는 의사의 명 강의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가장 분명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 말씀을 배우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내용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우리들의 영적인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그 결과 우리들로서는 더 이상의 소망이 없다고 깨닫게 된다면 그 해결책을 찾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타락한 인생들은 그만큼 자기중심적이고 이타적이며 유익이 있을 때만 움직이는 독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부르심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 조상들이 왜 죄를 지었으며 그 죄가 오늘 우리들과 어떻게 연관 되어 있는지 분명히 배웠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므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 죄의 DNA로 인하여 오늘 우리들도 다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대가는 사는 날 동안 당하는 고통과 마지막에는 죽어야 하는 사망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그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3:16-19)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우리 인생들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이렇게 인생을 살다가 결국은 다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최대 지도자였던 모세가 인생 말년에 남긴 한 마디의 말씀은 너무나도 이 예언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시90:9-11)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 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조용히 이 말씀을 묵상해 보신다면 오늘 우리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인생 여정에 예외 없이 당하는 "수고와 슬픔"이 왜, 어디에서 오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분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왜 그의 피조물인 인생들에게 그토록 분노하시며 그렇게 고통으로 심판하시며 그것도 모자라 결국은 죽게까지 하시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해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롬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죄는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그 분노의 결국은 고통과 사망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당하는 삶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단 한 절의 말씀이지만 가장 강력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남겨 두었습니다.
(히9:27-28)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조금만 관심이 있고 지혜와 센스가 있다면 이처럼 무서운 심판 가운데서도 꼭 따라 나오는, 대비된 다음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는 오늘 본문이요 신, 구약 성경 전체의 요절인 3:16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살아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이와 같이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과 연관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 예수님께만 소망을 가지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고발하시고 그 결국은 고통과 사망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속죄의 필요
우리는 우리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들의 삶의 현실이 무엇인지 성경 가운데서 자세히 찾아보았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사는 날 동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나마도 때가 되면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죽어야 하는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와 같은 형벌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우리들을 위협하는 것은 바로 암입니다. 대한민국 남자 3명 중에 한 명, 여자 4명 중에 한 명은 암 환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암에 걸리면 거의 6개월 이내로 사망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도 영화배우 김자옥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 많은 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암을 두려워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암에 걸리지 않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암 판정을 받으면 살아남기 위해 가진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려는 인생들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영혼은 100%가 다 암에 걸려 죽어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와 같은 암 덩어리인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할 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속죄의 필요성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미련한 사람들은 암이라고 진단한 의사를 향하여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붓습니다. "내가 이렇게 밥 잘 먹고 일 잘 하는데 왜 말기 암 환자라고 하느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진단한 의사의 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순식간에 쓰러져 사경을 헤매게 되면 그때서야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어버린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죄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경고를 떨리는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거부하고 부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속죄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은 회복의 기회를 가지게 되지만 부인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회복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은 죽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몸과 영혼 모두가 다 죽어 영원히 소망이 끊어지고 마는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고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들의 생명은 육신의 생명과 영혼의 생명이 있다는 뜻이요, 몸은 죽어도 영혼이 산다면 훗날 부활의 날에 죽은 몸과 천국에 가 있던 영혼이 다시 만나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되지만 몸과 영혼이 다 죽어버리면 영원히 지옥 불에서 고통을 당하여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씻음 받을 새롭고 신선한 기회를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가슴으로 깨닫고 속죄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비로소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속죄의 방법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타락하여 죽어가는 인생들에게 죄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날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출29:9-14)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워서 제사장의 직분을 그들에게 맡겨 영원한 규례가 되게 하라 너는 이같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지니라 너는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 오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송아지 머리에 안수할지며 너는 회막문 여호와 앞에서 그 송아지를 잡고 그 피를 네 손가락으로 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단 밑에 쏟을지며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위에 있는 꺼풀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르고 그 수소의 고기와 가죽과 똥은 진 밖에서 불사르라 이는 속죄제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여 주신 우리들의 죄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속죄제의 한 방법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는 아론과 그 아들이요, 다른 하나는 수송아지입니다. 아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제사장이요 수송아지는 그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게 되는 제물입니다. 제사장은 성도들의 죄를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전가하여 죄 용서함을 받고 그 수송하지는 성도들의 죄를 대신 지고 피를 쏟고 죽으므로 죄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죄 때문에 수송아지가 대신 죽는 속죄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들의 씻을 수 없는 죄를 대신 씻어 주셨고 그대로 순종하여 속죄제를 드리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 어떤 죄를 막론하고 다 용서함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훗날 우리 예수님께서 이처럼 아론과 같이 제사장이 되시고 수소와 같이 제물이 되셔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희생을 하셨습니다.
(히9:11-14)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인치심을 받고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신앙생활 하는 것은 이처럼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께서 친히 제물이 되시고 우리들의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贖罪(속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명을 대신 지불하시고 우리들의 죄를 씻어주시고 구원하여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시는 일 외에는 우리들의 죄가 씻음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히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십자가의 잔인한 형벌에서 자유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피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죄인들의 손에 잡히셨던 것입니다.
(마26:51-54)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는 말씀이 바로 그 생생한 모습입니다. 그랬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능히 악한 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십자가를 멀리 치워버릴 수 있었으나 이처럼 친히 우리들의 죄를 씻고 구원하시기 위해 그 십자가를 자원하여 지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희생을 바로 배우고 깨달아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려드릴 때 비로소 우리들이 그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덴마크에서 실제 있었던 실화입니다. 한 바닷가의 작은 마을에는 집집마다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죽은 가족이 없는 집이 없을 만큼 바다의 피해를 입은 상처 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난 신고가 들어오면 온 마을이 총 동원되어 구조에 나서는 대책을 세웠습니다. 어느 날 밤 몹시도 폭풍우가 몰아치더니 비상벨이 울렸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은 회관 광장에 모였습니다. 고기잡이를 하던 배 한 척이 조난을 당하였다는 신고가 들어와 구조대원들이 꾸려지고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로 나갔습니다. 1시간이 지난 뒤 다행히도 조난당한 어부들을 구조하여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지칠 대로 지친 구조대장에 모래사장에 들어 누운 채 외쳤습니다. "우리 구조선이 작아서 한 사람은 미처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다시 우리는 그 사람을 구조하러 가야 합니다. 구조대원에 자원하실 분은 좀 같이 가십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제 겨우 16살밖에 되지 않은 앳된 소년이 나섰습니다. 그러자 그의 엄마가 그의 손을 붙잡고 애걸하였습니다. "제발 너는 안 돼, 네 아버지도 10여년 전에 저 바다에서 죽었고 네 형도 실종 된지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데 너마저 잘못되면 나는 어떻게 살아간단 말이냐?"며 한사코 아들의 손을 붙잡고 울부짖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어머니, 하지만 저는 가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그 한 사람을 구조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구조선에 올라 폭풍우가 몰아치는 거친 바다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애간장이 타는 1시간이 지난 후 구조선이 뿌연 한 개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한스야, 네가 거기에 있는거니?" 그 어머니는 애가 타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거기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그 사람은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단 한스의 형이었습니다. 실종되어 그렇게 걱정했었는데, 한스가 그토록 가야한다고 결사적으로 몸을 내 던졌던 그 사람이 바로 그의 형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아름다운 희생은 생명을 살려내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오늘 우리들이 속죄함을 받은 것은 이처럼 아름답게 자신의 생명이라도 내 놓으셨던 우리 예수님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렇게 희생할 줄 아는 멋들어진 예수님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 건졌으니 아끼지 말고 헌신하며 우리들의 소중한 생명을 던져 또 다른 생명을 살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고귀하신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덧 1월 한 달이 다 지나고 2월도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속죄 받은 성도들로서 희생하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왜 그토록 소중하신 예수님의 희생이 필요하였던지? 그 이유도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대는 부모의 가치를 아는 자식도 없고 예수님의 희생을 감사하는 성도들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마지막 때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말세에 하나님을 잊고 얻는 금은 녹슬게 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5:1-3)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때문에 죽었던 수수 만만의 수송아지와 고귀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속죄의 은총을 가슴에 품고 사랑하며 희생하며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겠습니다. 그 길만이 진정 말세에 가장 복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귀한 2월 둘째 주일 예배자로 헌신하는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이여 이제 속죄의 은혜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되돌려드리며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통한 축복으로 남은 삶을 승리하기시를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5년 2월 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