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능력과 역사 (2024년 4월 28일 주일낮설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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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8 April 2024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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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과 역사
4. 28, 2024
本文:사도행전9:1-19
說敎:崔仁根 牧師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일컬을 때 “전능자”라고 합니다. 이를 영어로는 Almighty라고 하는데 이 말을 가장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면 “못하시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지구 위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을 말씀 한 마디로 다 만드신 분이십니다. 이에 대해 교회에 다니는 성도로서 부인하거나 못 믿겠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와 같은 전능하심이 우리들의 생활에서는 전혀 공감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갑자기 열이 펄펄 나고 아파도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기 전에 먼저 병원부터 달려가게 됩니다. 이는 너무나도 크신 하나님과 연약한 오늘 우리들 사이에 피부에 와 닿는 공감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기록하시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보다 더 하나님의 능력을 쉽게 체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기적 같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해 둔 아주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지구를 만드시고 바다를 만드셨다는 말씀과 전혀 다른 의미로 오늘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들과 똑 같은 사람 사울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능력으로 변화를 시켜 바울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공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 말씀 속에는 얼마든지 우리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의 역사가 서너 가지로 기록 되어져 있습니다. 오늘은 소망의 달 4월을 마지막 보내면서 진정한 소망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우리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기다려보고자 합니다. 모쪼록 마음 귀를 기울이시고 사울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풍성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눈을 어둡게 하시고 영혼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행9:3-7)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흔히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용하며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변화의 역사를 만들 수 없는 인간을 위해 축복하기도 합니다. 사실 사람은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천성 고칠 약은 이 세상에 없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이처럼 변화가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하늘의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의 이와 같은 편견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소중한 말씀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현미경과 같은 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육신의 눈은 어둡게 하시고 신령한 눈을 뜨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은 실로 이 세상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돌려 쳐 죽일 정도면 그 사람의 잔인함을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집사였던 스데반을 그렇게도 잔인하게 죽인 장본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또 다른 성도들을 잡아 죽이려고 스스로 일어나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고 그 광명한 빛으로 그에게 임하셨습니다.
(행9:1-5)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사울은 실로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 놀라운 체험으로 갑자기 눈이 어두워지고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행9:7-8)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제아무리 잘나고 겁이 없는 인간이라고 해도 이처럼 놀라운 체험을 하고 순식간에 장님이 되고 나면 제 발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멀쩡하던 사람을 장님으로 만들어 평생을 불행하게 만드시는 그런 분은 아니십니다. 그것을 통하여 깨달음을 주시고 더 나은 길을 인도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삼으실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나니아를 그에게 보내어 안수하게 하시고 사울의 눈을 뜨게 하시되 더 신령한 눈을 뜨게 하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행9:17-18)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살아가는 삶에 사울과 같이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행여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맞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기다리며 성령 충만으로 새로운 옷을 입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끝끝내 우리들에게 유익하고 복이 되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를 예수님을 자랑하는 자로 변화시켰습니다
(행9:3-5)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은 이렇게도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예수님 믿는 성도들을 잡아 죽이려고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행9: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잔인한 사람이었으니 그 귀한 스데반집사님을 돌로 쳐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이 잔악한 자를 예수님께서는 순한 양으로 변화시켜 오히려 그 예수님을 자랑하고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행9:19-22)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예수님은 사울을 이렇듯 180도로 완전하게 변화를 시켰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 죽었던 살인마가 예수님을 전하는데 목숨을 바치기까지 바뀌었으니 그 누가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100% 예수님께 헌신하여 자신의 소중한 삶과 생명을 오직 그 주님만을 위해서 바친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완전하게 바꾸어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능력은 실로 이렇게도 위대하고 완벽하시다는 사실을 이와 같은 바울을 통하여서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인자를 변하여 성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행7:57-60)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은 이처럼 잔인한 살인마였습니다. 살아 있는 선량한 사람을 이처럼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정도이면 이는 사람이기를 포기한 잔인한 살인마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도 어쩌다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그것에 제미가 들려 그와 같은 악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면 사이코패스였던 것입니다.
(행9:1-2)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행9: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는 말씀과 같이 사울은 그 지역에서 이미 소문난 살인마였습니다. 이러하였던 그를 예수님께서 조용히,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바꾸어 놓았으니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습니다. 마치 하나의 동화를 읽는 것처럼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기적 그 자체였습니다. 오직 본인과 하나님만이 아시는 너무나도 소중한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행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은밀한 역사는 비록 같이 동행하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고 은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하시는 변화와 기적과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살인마 사울은 위대한 사도요 예수님의 종인 바울이 되었던 것입니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유럽으로 여행을 하다보면 천주교의 성당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그 이름에 “성 바오로 성당”이라고 붙인 곳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곧 사도 바울을 기념하여 새운 성당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만 받은 교인이라도 사도 바울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신, 구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과 같이 전도를 많이 하고 개척교회를 많이 세우고 온전히 몸과 마음과 생명을 다 바쳐 예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께 헌신한 인물은 없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 귀한 성경을 무려 신약의 절반을 기록할 정도였으니 그의 사도성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쓰임 받음은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서 전무후무하였으니 위대한 사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도 바울 스스로가 고백하였던 바와 같이 자신의 능력이나 열정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를 부르시고 그를 사용하시고 그를 능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역사가 하나님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시고자 하시면 못 하실 일이 없는 전능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새롭게 빚으시고 새롭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나도 자만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못나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쓰실 것을 기대하고 초연하게 기다릴 줄 아는 멋진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울을 바울로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우리들도 능히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