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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6일 주일낮설교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할까요?)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할까요?

12. 6, 2015

 

     本文:7:10-17

 

           : 仁   

 

 

 

    지난 121일 아주 기분 좋은 기사 하나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페이스북의 창업자 저커버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신문에 난 기사를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세계 7대 부호인 마크 저커버그와 그의 부인 프리실라 챈은 1일 첫딸의 출산 소식을 전하면서 보유한 페이스북 지분 중 99를 살아있을 때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기부액은 시가로 450억 달러에 달한다.

 

세계적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의 최고경영자(CEO)인 저커버그는 자신의 딸 맥스(Max)의 탄생과 함께 공개된 편지를 통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이같이 전했다.

 

우리 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A46장 분량의 편지에는 자본이 후세대를 위해 투자돼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겼다. 그는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을 포함해 모든 이들의 삶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우리 사회는 지금 펼쳐진 세상이 아닌 후세대가 살아갈 세상이 더 좋아지도록 하기 위해 투자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저커버그는 심장병, , 뇌졸중, 신경퇴행성질환, 전염병 등 5대 사망 원인을 지목하며 너와 네 친구들 세대가 질병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우리가 확인했으니 우리 모두가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미래에 더 투자할 것이라고 말해 기부의 일부가 의료사업에 투자될 것임을 시사했다.

 

저커버그는 자신의 두 가치관으로 인간의 잠재력, 평등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거론했다. 그는 평등 증진은 모든 이가 국적, 가족, 태어난 환경을 불문하고 인간 잠재력을 깨울 기회를 보장받는 것을 의미한다우리 사회는 정의나 자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위대한 인류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도 평등을 증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저커버그 부부가 새로 설립할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재단의 운영 원칙으로 해석되고 있다.

 

저커버그는 너와 다른 모든 어린이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큰 책임을 느낀다며 편지를 마무리했다.]

 

여기에서 그가 직접 밝혔듯 천문학적인 그의 재산 450억 달러를 자신의 딸이 살아갈 다음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바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더 나은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 질 수 있으며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이 종은 이 기사를 읽은 후 내내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내일의 이 세상이 돈만 있으면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 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대비시켜 보았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었던 아하스는 과연 무엇이 부족하였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왕이라면 모든 것을 다 누리며 호위호식하며 살아갈 텐데 과연 그러한 왕에게 무엇이 문제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성경은 그가 결코 평안하지 못했음을, 오히려 더 큰 근심과 고통 속에 있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7:2)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 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왜 왕의 마음과 그 백성들의 마음이 이렇게도 산림이 바람에 흔들림과 같이 흔들리며 두려움 속에서 떨어야만 했을까요? 그 대답 또한 성경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7: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왕 아하스 때에 아람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대적들이 동맹을 하여 쳐들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우리는 돈이 있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돈이 많이 있으면 저커버그가 기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암이나 당뇨나 혈압 등 인간 삶의 근본적인 건강을 해결할 수 있는 많은 연구와 발전을 거듭해 놓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아무리 건강하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 해도 IS와 같은 극악한 세력들이 설치고 있는 한 우리들의 삶은 평안하거나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 함께 공부하면서 큰 깨달음과 은혜를 체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오늘을 탄식하면서도 내일에 대한 기대와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의 꿈은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옛날에는 늙으신 어르신들의 꿈이 다시 한 번 더 젊어질 수 있다면!”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어르신들을 보고 젊어지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의 고민과 고통을 온 몸으로 함께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100만 청년 실업자!”라는 현실과 그들의 고통과 절망은 또 다시 그 세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급기야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와 같은 청년들에게 수당을 지급하겠다며 3천 명을 뽑아서 한 달에 50만원씩 용돈을 주겠다고 하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정치권에서는 선거를 앞두고 젊은이들의 마음을 몇 푼의 돈으로 사려고 한다고 맹비난하고 나섰습니다. 근본적인 청년문제를 해결해야지 돈 몇 푼 쥐어주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과 우리들의 앞날에 다가 올 미래시대는 어떻게 만들어 가야 진정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에 대한 바른 해답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사람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전쟁이 터지만 어떻게 하든지 그 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이길 힘이 있을 것 같으며 사정 없이 공격하고 아무리 따져 봐도 이길 가능성이 없으면 꼬리를 내리고 조공을 바칩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한계요 모두가 이 방법으로 죽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기에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와 같은 모습이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하스 왕이 바로 이와 같은 방법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적 이스라엘이 아람과 동맹하여 유다를 공격해 오자 아하스 왕은 당대에 힘깨나 쓰는 앗수르를 의존하려고 한 것입니다.

 

(왕하16:7-9)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 하고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더니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취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길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서 이와 같은 아하스에게 하나님께 징조를 구해보라고 충고하셨던 것입니다.

 

(7:11-12)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언뜻 보기에는 매우 점잖은 것 같고 겸손한 것 같이 보이지만 아하스의 마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눈에 보이는 앗수르의 능력이 더 커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전에 있는 것과 왕궁 곳간에 있는 모든 은금을 다 쓸어 앗수르 왕에게 갖다 바쳤던 것입니다.

 

(왕하16:8)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이와 같은 인본주의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7:17-19)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의 오는 날이니라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그랬습니다. 인생은 잠시 사는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영원을 사는 영생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아하스 왕과 같이 일시적인 것을 위해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생애의 비참함을 성경에 기록하시고 오고 오는 후대에 증거 하시며 거울로 삼게 하셨던 것입니다.

 

(왕하16:1-4)

 

르말랴의 아들 베가 십 칠년에 유다 왕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니 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륙년을 치리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고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이렇듯 아하스 왕은 그렇게 어리석은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로 평안을 누려보려고 열광하였으나 결국은 또 다른 전쟁에서 폐하고 만 것입니다.

 

(왕하16:5)

 

이 때에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싸우려 하여 아하스를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니라

 

(7: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왕 아하스 때에 아람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의 인간 중심적인 삶, 인본주의의 삶을 쫓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인간적인 방법은 결국 망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딜지라도, 힘들지라도 생명과 소망의 길을 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명령하고 계십니다.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고 말입니다. 두고도 가슴에 새겨두고 묵상하며 쫓아가야 할 소중한 말씀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하스 왕처럼 힘이 있다고 의지하고 금은보화로 그 마음을 얻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고 결국은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망하게 되는 것을 극명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멋진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진정으로 내일의 꿈을 꾸며 기대를 가져도 좋을 아름다운 소식을 증거해 주십니다. 인본주의를 떠나 신본주의로 돌아서서 기다리고 기대하며 믿기만 하면 얼마든지 멋들어진 내일을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인본주의로 인간 중심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그 삶은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7:8-9)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 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 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사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강조되고 있는 이분법적 논리입니다.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 믿으면 영생을 누리나 믿지 않으면 망한다는 등의 논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믿어야 한다는 대 전제 하에 내일을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친히 선포해 주셨습니다.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멋진 내일의 세상을 열어갈 수 있는 최상의 길인 것입니다. 돈이 아니라, 인본주의가 아니라, 힘이 있는 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암담한 이 세상의 빛이 되시고 진정한 소망이 되실 수 있습니다.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질병과 폭력과 살인과 범죄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순식간에 총과 폭탄으로 사람들을 살해하고 있는 이러한 세상에서 누가 과연 참된 평안을 누리며 행복해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2(수요일) 오전 11시경 LA 인근의 샌버나디노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 14명이 숨지고 21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현지 소방당국이 밝혔습니다. 샌버나디노 경찰국에 따르면 총격 범은 현장에서 사살되었으며 용의자 중 한 커플은 IS에 충성맹세를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사건도 IS의 태러였던 것입니다. 이번 총격사건은 샌버나디노 사우스 워터맨 애비뉴 1300블럭에 소재한 사회 보장 시설인 '인랜드 리저널 센터'에서 벌어졌습니다.

 

이렇듯 이와 같은 이 세상에서는 우리들이 결코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부에서도 총격이요 외부에서도 폭탄인 세상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의 대안은 없습니다. 오직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외에는 더 이상의 대안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마지막 보루이신 예수님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인하거나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진정한 성탄카드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카드는 Merry Christmas 대신 Happy Holiday로 바뀌어 버렸기 대문니다. 심지어 스타박스까지 해마다 성탄의 계절엔 컵을 성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산타와 루돌프사슴 등 로고를 넣었으나 그 모든 성탄의 심벌들을 다 지워버리고 오직 빨간 색깔의 컵에 자신들의 로고만 집어넣고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인간만이 판을 치는 고통의 세상으로 바뀌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 계시는 평화로운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고통 받는 성도들과 함께 하도록 하시겠다고 말입니다.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엄청난 기쁜 소식입니다. 그 복음의 핵심이 바로 임마누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임마누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 우리들과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그 어떤 대적을 만날지라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진정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가져야 할 꿈에도 소원은 바로 임마누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중 하나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느낌이 없습니까? 당신의 그런 느낌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하십니다. 폴 린델은 암으로 죽음이 임박해 있을 때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내 아들이 남의 나라에서 전쟁하다가 죽을 때 하나님은 어디 있었느냐?'는 질문을 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나이든 목사님이 그 질문에 친절히 대답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아들이 갈보리에서 죽었을 때 바로 거기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친아들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고통 중에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돌보시고, 고통을 당하는 동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같이 생각되는 것은 당신의 느낌일 뿐이지 정말로 그분이 멀리 계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아주 사소한 부분들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심지어 우리의 머리카락 까지도 세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머리카락 숫자까지 셀 정도로 관심이 많다면 당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공기처럼 우리 곁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것을 인식하고 감격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들에게 지금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들에게 이처럼 소중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탄식하고 계십니다.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 속에 석류 알처럼 알알이 박혀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험난한 이 세대를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느 필수적인 무기입니다. 그 믿음을 얻기 위해 우리는 주경야독하며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오늘 본문과 사건 속에서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하스가 그토록 하나님을 배신하고 인본주의와 우상숭배로 찌들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고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사신우상이나 섬기는 배신자라면 더 가혹한 형벌을 주셔야만 마땅할 것인데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니 그 누구라 이와 같은 상황을 이해나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들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들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들이 완전하거나 하나님의 사랑 받을 만 하거나 고귀한 예수님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여전히 우리들이 죄 가운데 있는데도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까지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고 따라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덧 송년의 달 12월입니다. 우리들의 남은 생도 이처럼 언젠가는 12월이 다가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탄식하고 원통해 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는 오늘 말씀을 가슴에 꼭 새겨야 하겠습니다. 아하스 왕과 같이 삶의 위기에서 신앙과 하나님을 저버리고 앗수르를 찾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않도록 믿음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주님의 인정을 받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시고 첫 크리스마스가 존재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진정한 소망과 평안과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게 사람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릇된 인본주의를 극복해야만 합니다. 세상이 온통 죄악과 고통으로 치닫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도록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신 이상 더 이상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모든 불가능을 하나님은 가능케 하실 수 있고 그렇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믿고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들에게 필수적으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이와 같은 믿음으로 빈 가슴을 채우고 이미도 보내 주신 임마누엘의 예수님을 고백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을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고백만 하면 그 다음의 모든 일들은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부디 이와 같은 복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투명한 내일을 꿈과 기대로 기다리는 멋들어진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5126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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