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빌립보장로교회

-- 성령의 열매맺는 교회 --

Sat11232024

Last update12:00:00 AM

Font Size

Profile

Menu Style

Cpanel
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성탄은 기다림입니다! (2023년 12월 17일 주일낮설교)

성탄은 기다림입니다! (2023년 12월 17일 주일낮설교)

성탄은 기다림입니다!

12. 17, 2023

:마태복음1:18-25

說敎:崔仁

 

다음 주일은 2023년도 성탄주일입니다. 우리는 과연 성탄의 의미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요? 성탄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성탄이 이 땅에 나타날 때까지 하나님은 수천 년 혹은 수백 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살았던 성도들은 기다리다 결국 성탄의 기쁜 날을 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은 좋은 때를 만나 이 땅에 성탄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 있으니 이 또한 감사드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지 2천년이 넘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성도들 또한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세상이 악하여져 그와 같은 예수님의 성탄을 지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슬픈 말세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만이라도 제대로 된 가치와 믿음으로 성탄절을 맞이하여야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탄은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누가 기다립니까? 일반적으로 기다림에는 사랑과 기대가 숨어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만남의 기대가 없는 사람 또한 기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탄이 기다림이라고 할 때 그 배후에는 사랑도 있고 기대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성탄이 기다림이라는 사실을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깊은 깨달음으로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왕 아하스 때에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유다 왕 아하스 때에 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유다를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 왕 아하스와 백성들은 이 두 나라가 동맹하고 쳐들어왔으므로 큰 두려움에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전쟁은 곧 백성과 나라가 망하는 가장 두려운 살생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시고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7: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힘든 상황에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 엄청난 약속을 보여주셨습니다.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까? 위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사정을 이처럼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성탄절입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낯선 이 미국 땅에서 고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누가 여기에서 예외이겠습니까? 앞앞이 표현할 수 없고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 땅에 와서 남모르는 눈물 한 번 흘려보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지금까지도 그와 같은 텅 빈 가슴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먹여 살리고 공부시키기 위해 아파도 아픈지도 모르고 일만하며 수십 년을 버티고 왔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고 남은 것은 아프고 병든 몸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과연 그 누가 알아주고 이해나 해 줍니까? 자식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스스로 잘 자란 것처럼 부모님의 피눈물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말로라도 그 긴 세월 고생하며 버티고 온 부모님의 노고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지난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하면 또 그 소리 한다!”며 듣기 싫어합니다. 죽도록 돈 벌어서 자식들 뒷바라지 한다고 다 쓰고 늙어서는 빈손이 되어도 용돈 한 번 넉넉히 주지 않습니다. 부모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 하나 없이, 가진 것 하나 없이, 허리가 아파도 그 자식들의 자식이나 챙겨주면서 늙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이민 1세대들입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인생이 서글프지만은 않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의 처지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5:20-23)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친구도, 돈도, 아무 것도 없는 아들이 거지가 되어서 돌아와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측은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해 주었습니다. 바로 이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렇듯 우리 하나님은 엄청난 사랑으로 우리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고 그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3:8-9)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다 무상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셨으나 이 어리석은 인생들은 그와 같은 하나님은 배신하고 아무 것도 해 주지 않은 사탄 마귀와 짝하고 타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워 놓은 그들의 부끄러움을 친히 가죽 옷을 지어 덮어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바로 우리 아버지십니다.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는 날 동안 소망으로 삼고 기쁨으로 그 하나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성탄하신 예수님은 전능자이십니다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말씀은 구유에 오신 예수님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비록 낮고 천한 구유에서 나셨으나 그 본질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못하시는 것이 없는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은 단순하게 우리 곁에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단순하게 우리들의 구주만 되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예수님은 못하시는 것이 없는 우리들의 모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예수님 한 분만 우리 곁에 계시면 만사형통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그렇게도 거세게 일어나던 노도광풍도 순식간에 잠잠해 질 정도였습니다.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엄청난 말씀도 관념적으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2천 년 전의 한 사건으로 치부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그 엄청난 능력을 생활 속에서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탄 하시어 우리 곁으로 오신 예수님을 구유에만 가두어 두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곁에 끊임 없이 밀려오는 노도관풍과 같은 삶의 재난을 그 예수님과 함께 해쳐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성탄과 임마누엘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38년 동안이나 누워 있던 소망 없는 병자도 순간에 고쳐주셨습니다.

(5:5-9)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말이 38년이지 이는 인생의 절반이나 되는 길고도 긴 세월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통이 심하였겠으며, 절망하고 또 낙심하였겠습니까? 하지만 구유에 오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니 순식간에 질병이 떠나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머리로만 시간을 계산하지 말고 하나님의 시간에 맡기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는 절대 불가능이 없다는 긍정의 믿음을 가지고 기적을 보는 그 순간까지 기도하며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성탄은 바로 이와 같은 비밀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복된 계절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두 말씀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예언하신 말씀이고 마태복음의 말씀은 그 예언이 이루어진 말씀입니다. 그 사이에서 흐른 세월은 6백년이었습니다. 결국 아하스 왕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로부터 6백년이 흐른 후에야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기다림인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한 번 하신 말씀은 시간이 얼마를 흘러가든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소망이 있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도 다 극복해 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 아시고 거기에 합당하게 역사사실 줄을 믿기 때문입니다.

(11:32-38)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왜 이 사람들은 단 한 번밖에 없는 소중한 삶을 이렇게도 비참하게 희생하며 유리방황하였을까요? 예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미래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진정한 성도는 이 땅에서 잠시 사는 삶 보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아갈 그 때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지금은 말세라 성도들의 가슴 속에 이와 같은 절박한 믿음이 없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성탄의 계절에 예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그 예수님과 오늘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잠깐 살다가는 우리들의 생애가 복되고 유익할 수 있겠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탄의 이와 같은 생각과 기다림으로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길이 참는 인내와 어떤 경우에도 기적의 역사는 일어난다는 확신으로 우리 마음 말구유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진정한 성탄의 역사를 2023년도 성탄절부터 새롭게 만들어 가야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다림으로 승리하는 삶의 역사를 만들어 내려고 하면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입니다.

일평생을 앞을 보지 못한 채 가난과 굶주림으로 살아왔던 한 소경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소경은 하나의 소망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만 만나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밤낮으로 예수님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10:46-52)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왜 이 소경은 길가에 머물고 있었을까요? 위 본문을 깊이 묵상해 보면 두 가지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는 길가에 머물러야 구걸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그 길 가로 행여나 예수님께서 지나가사게 될까봐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부르며 애타게 그 주님 만나기를 소원하는 모습을 볼 때 충분히 이렇게 유추해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소원을 두고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다린다면 예수님의 때에 반드시 기적 같은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언제 예수님께서 오실지 알 수 없으나 끝까지 기다리며 사모하면 하나님의 때에 성탄은 반드시 찾아오는 것입니다. 아 멘, 할렐루야!

Add comment


Security code
Refre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