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이겨내려면! (2024년 3월 24일 주일낮설교)
- Details
-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24 March 2024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 Hits: 214
고난을 이겨내려면!
고난주일
3. 24, 2024
本文:마태복음26:36-46
說敎:崔仁根 牧師
우리는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 다윗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성공하고 승리한 내용은 잘 알지만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였는지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나라와 사울 왕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하였지만 시기심으로 일그러진 사울 왕은 군사 3천 명을 손수 이끌고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그 고비를 넘기고 왕이 되었지만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또 다시 죽을 고비를 겪어야만 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믿었던 신하 요압장군과 시므이가 배신하여 죽는 날까지 마음고생을 하여야만 하였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성공하고 멋진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고 고난을 당하는 아픔도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시편 22편은 다윗이 경험한 숱한 고난의 흔적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22:14-16)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우리 예수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주님의 엄청난 능력에 감동한 그들은 서슴없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럴 때마다 조용히 그들을 피하여 한적한 산속으로 들어가셔서 밤이슬을 맞으며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이 이 땅에 내려온 목적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숱한 죄인들을 살려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 때가 찾아온 것입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요한복음 12장에서 헬라인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해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가 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 엄청난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고난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이 고난을 대처하시고 극복하셨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고난이 오늘 우리들을 위한 것임을 가슴으로 깨닫고 우리 또한 사는 날 동안 우리 주님의 고난에 화답하는 신앙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고난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마26:36-38)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우리는 여기 이 말씀에서 우리 주님의 진솔한 모습에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늘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동안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제자들에게 얼마나 많이 보여주셨습니까? 너무나도 놀라운 이적과 기사와 말씀으로 제자들을 압도하고 가르쳐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주님의 모습은 곁에 있으면 꼭 안아드리고 싶을 만큼 연약해져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렇듯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부탁을 하셨으니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진정한 본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모든 제자들에게 다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베드로와 요한과 아고보에게만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 우리는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같이 예수님께서 마음을 열어 보여주시는 부류인지, 아니면 나머지 아홉 명과 같이 저만치 두고 가시는 부류인지를 말입니다. 진정 고난의 때에도 필요하지 않는 존재라면 그런 존재는 無用之物(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고민하고 슬퍼하던 자신의 아픔을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마음을 여시고 아픔과 고통을 쏟아놓으셨다는 사실은 매우 소중한 교훈이 됩니다. 이와 같은 방법이 바로 고난을 극복하는 방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고난은 나눌수록 작아지고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험으로 볼 때 과연 그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특별히 이와 같은 방법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누구라도 자신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합니다. 어쩌면 평소에 잘 나가고 있는 자신에게 고통이 닥쳤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아픔을 쏟아놓고 함께 해 주기를 바라는 고백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고 사랑을 회복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반대로 힘들고 어려울 때 시치미를 뚝 떼고 안 그런 척 하면서 숨기게 되면 진정한 우정도 사랑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고통의 때에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진정한 친구도 사랑도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라도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보여주셨다는 사실에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난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최소한 3명은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위기의 때에 그 고통을 나눌 만한 사람 3명도 만들어 놓지 못하였다면 소중한 인생을 잘 못 살아온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어려울 때 그들이 자신의 목숨처럼 우리들을 케어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고난과 고통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우정과 사랑이 없다면 그런 인생은 참으로 속 빈 강정과 같이 허울뿐인 어리석은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자신의 고통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보여주신 것은 오늘 우리들을 위한 모델이었습니다. 솔직하고 진솔한 속마음을 서로 나누면서 힘든 이 세상을 함께 이겨내야 함을 주님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마26: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마26: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를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여기에서는 또한 완전하신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오늘 우리들과 꼭 같은 성정으로, 닥쳐오는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와 같은 엄청난 고난을 기도라는 방법으로 풀어가셨습니다. 그것도 어쩌다가 한 두 번 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뚜렷하게 밝혀 놓은 것과 같이 세 번씩이나 기도하심을 통해서 극복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숫자상의 세 번보다는 완전하게 기도하셨다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숫자 3은 완전수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고난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기도가 최고임을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모범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약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이와 같은 기도라는 방법으로 그들에게 닥쳤던 고난을 극복해 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었고 성군 다윗 또한 그랬습니다. 특별히 이 세상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했을 만큼 숱한 고난의 늪에 빠졌던 다윗은 다음과 같은 기도로 그 무서운 고난을 극복하였습니다.
(시22:1-5)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안식이 되고 빛으로 인도하는 무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기도할 수 있는 한 염려하지 말고 오로지 기도로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로서 문제를 해결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난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마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교회에 다니는 성도라면 거의 대부분이 어려움과 고난을 당했을 때 기도를 하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문제는 그 방법입니다. 엎드려서 부르짖는다고 다 기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기도에는 분명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8: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의 고통이 제아무리 크고 두려워도 언제나 성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무게에 못 이겨 그와 같은 고난을 원망하고 불평한다거나 속히 이와 같은 고통을 해결하여 달라고 자신을 우선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문둥병자는 너무나도 짧고 간결하지만 고난을 이겨내는 기도의 원칙을 확실하게 지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조건입니다. 이것이 얼핏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바로 이것이 기도 응답의 가장 강력한 숨은 비결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문둥병자가 기도한 그대로 반복하시면서 응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바로 이와 같은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무섭고 무거운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시는 모습에서도 우리는 이와 꼭 같은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원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어떤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먼저 드리는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비단 기도뿐만이 아닙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 이와 같이 하나님께 먼저 우선순위를 드릴 때 비로소 우리들의 소원을 이루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 무서운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이렇게 뚜렷한 세 가지의 방법으로 고난을 이겨내셨습니다. 비록 철없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였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자신의 고통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께 나아가 땀방울이 피가 되어 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게 될 십자가의 무서운 고난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복된 고난주일과 고난주간에 우리 예수님의 이와 같은 소중한 모습을 본 받아서 우리들에게 닥치는 고난도 이겨내고 예수님의 고난에도 동참하여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