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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24일 주일낮설교(상실(喪失))

상실(喪失)

5. 24, 2015

本文:열왕기하4:1-7

說敎:崔 仁 根 牧 師

[30대 여성이 연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뒤 세계 최고층 빌딩에서 투신했다. 5월 18일 영국데일리메일에 따르면 지난해 11월16일 오후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마사지사 여성 로라 바네사 누네스(Laura Vanessa Nunes·39)씨가 사업가인 아랍계 남성과 실연 후에 부르즈 할리파 148층 전망대(약 548m)에서 뛰어내려 3층에 추락했다. 이 여성은 관광객이 사진을 찍거나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마련된 작은 유리창 틈새를 통해 밖으로 머리를 내민 뒤, 몸까지 밀어 넣어 투신했다. 이 빌딩의 소유주인 UAE 국영기업 에마르 프로퍼티(EMAAR Property)가 투신 당시 정황에 대해 함구하자 그의 어머니가 직접 나섰고, 부르즈 할리파 빌딩은 이 여성의 투신 이후 두바이 경찰의 요청으로 전망대 유리 창문에 안전 바를 설치했다고 해당 매체는 전했다.[5월 20일자 한국일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분노가 이처럼 끔찍한 사건을 연출하고 말았습니다. 아직 인생 절반도 살지 못한 아름다운 때에 이처럼 비참하게 목숨을 던짐으로 절망과 좌절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또한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되는대로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훈련과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 아름답고 보람 있는 생을 마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인간관계를 잘 유지해 나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너무나도 많은 것과 이별하거나 상실하는 고통을 겪고 갑니다. 때로는 그것이 물건일 수도 있고 자신의 생명과 같이 소중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 종은 지난 어버이 주일에 서울에서 고2의 딸이 실종되자 삶의 모든 것을 다 접어 두고 16넌 째 오로지 그 딸을 찾아 헤매는 안타까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짧은 인생에서 그 누구를 막론하고 다 겪게 되는 이 상실의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는지? 함께 공부하면서 보다 더 아름답고 복된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보시기 바랍니다.

상실(喪失)

어느 비 오는 날 조용히 책 한 권을 잃는데 가슴 깊은 곳까지 충격이 되어 오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실"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공부하고 있는 한 학생이 스승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자신은 할아버지를 무척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어릴 때 자신을 키워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지금 중한 병으로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함께 하고 싶은데 자신에게는 박사 학위 공부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수강하고 있는 과목과 교수가 너무나도 좋아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할아버지도 곧 떠나실 텐데 같이 있고 싶고 공부도 지금 너무 중요하고 시급하여 그만 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다 붙잡고 고민하는 이 학생에게 선생님은 너무나도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충고해 주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다 가장 소중한 그것을 잃게 될 때가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박사 학위가 그렇게 인생에서 소중하고 귀하지만 그것 또한 놓아야 할 때가 오고 잃게 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문득 우리 어머님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아들 다섯에 막내 딸 하나를 낳으시고 사랑하셨는데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셨던 셋째 아들을 50대 초반에 암으로 갑자기 잃으시고 남은 여생을 다 바쳐 그리워하며 가슴 아파하시던 그 모습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이 종은 특별히 마음이 여려 가장 사랑하고 소중한 그것을 잃고서도 잘 살아갈 수 있을는지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종 자신과 우리 사랑하는 모든 우리 빌립보의 권속들과 함께 이 엄청난 "상실"에 관한 진리를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상실에 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엘리자베스 로스(인간의 죽음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바쳐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선정한 정신과 의사.)라는 사람은 앞서 박사 학위를 공부하는 학생의 상담을 받은 매우 이 부분에 뛰어난 권위자입니다. 그 자신도 건강을 상실하고 온 몸이 마비되어가는 질병으로 휠체어를 통해 거동해야 하는 상실의 큰 상처를 체험한 분이십니다. 그 분이 충고해 줍니다. "우리 인생 여정 중에서 단 한 번도 상실의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상실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채 소중한 인생을 망치고 맙니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물건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눈에도 보이지 않는 명예나 그 밖의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간에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상실의 아픔을 겪게 됩니다. 평소에는 사용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잃어버렸다는 사실 앞에는 매우 당황하며 아까워하며 가슴 아파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상실감이 얼마나 컸으면 연약한 여인이 148층 548m에서 뛰어 내려 목숨을 버렸겠습니까? 180m밖에 안 되는 시애틀 다운타운의 스페이스 니들에서만 내려다보아도 오금이 저리는데 548m나 되는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얼마나 땅이 아득하게 보이며 무섭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뛰어 내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그 사람만이 느끼는 무서운 상실감이 이성을 마비시켰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누구나 상실의 충격을 겪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마음으로 믿음으로 준비하며 사는 지혜를 터득하여야 하겠습니다.

LA에서 목회하는 동료 목사 중의 한 사람이 갑자기 말기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가 한 말이 아직도 귓전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이민목회를 하면서 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서 투병하는 성도들을 여러 번 경험하며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십니다'고 위로하며 심방하였지만 이 일이 바로 나 자신의 것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탄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실이 갖다 주는 충격입니다. 얼마 후면 모든 것을 다 남겨 두고 혼자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상상만 해도 충격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것도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두 번 다시는 만나 볼 수 없는 머나먼 죽음의 그곳으로 혼자 떠나야 한다는 것은 더 더욱 더 견딜 수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강인한 믿음과 지혜로 스스로를 훈련시키며 예방 주사를 맞듯 자신을 연단하고 단련시키며 상실에 대비하는 지혜를 터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지난 3월 8일부터 수요일까지 이 종은 대전명성교회의 설립 20주년 기념 부흥회를 인도하고 왔습니다. 설립 20년 밖에 안 되었는데도 대전에서 대형교회당을 건축하고 아름답게 잘 성장해 가는 교회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를 개척하고 담임하고 있는 목사님은 대한민국 건축회사 10위 안에 들어가는 큰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눈이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점점 시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그리고 남은 여생은 목사가 되어 주님을 섬기겠습니다고 서원하고 신학을 마친 후 대전에서 개척을 하였던 것입니다. 불행과 상실의 고통 앞에서 그는 오히려 주님의 큰 종으로 쓰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잘 준비하고 대비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상실했을 때 그 보다 더 큰 것을 기대하고 변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잘 대비한 자만이 더 큰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늘 준비된 자세로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외 없이 상실의 상처를 안고 고통 가운데서 울부짖는 한 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평생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공부하며 훈련하던 가난한 선지 생도의 아내가 바로 그 장본인입니다. 그는 거의 사면초가에 빠진 현실과 고통 속에서 엘리사를 찾아 나옵니다. 남편이 공부하면서 빚만 잔뜩 남겨 두었는데 채주들이 빚 갚을 능력이 없는 자신을 파악하고 빚 대신 두 아이를 빼앗아 가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풍속은 그러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자식들을 빼앗아가서 종으로 삼았습니다. 이러니 이 여인의 현실이 그 얼마나 기가 막히는 것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여인은 남편이 선지생도였을 만큼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를 찾아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 여인으로 하여금 기적을 보고 희망을 되찾는 놀라운 계기가 되었습니다. 엘리사를 통하여서 길을 찾았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종이 여러 성도님들과 함께 찾고 싶은 해답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누구나 험한 인생 살아가면서 당하게 되는 상실에 대한 고통이 예비 되어 있다면 그 길 또한 찾아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란 게 바로 오늘 본문의 이름 없는 여인이 체험하였던 것과 같이 하나님이시셔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만이 능력이 계시고 또한 사랑이 계셔서 우리들의 문제를 들으시고 아시고 해결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한 말씀을 읽어보신다면 제가 드리는 말씀이 결코 피상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40:27-31)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 얼마나 고통당하고 소외당하며 상실로 외톨이가 되어 있을 때 주시는 고귀하고도 구체적인 말씀입니까?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은 결단코 절간에 놓여 있는 돌부처 같은 분이 아니십니다. 눈을 만드시고 보시는 분이시오, 귀를 만드시고 들으시는 분이시며, 천지를 만드신 엄청난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평소에, 평안할 때 그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 본문의 여인처럼 위기의 순간에 찾고 만나며 기적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너무 너무 어려울 때 서슴없이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 볼 수 있는 그런 한 사람을 가졌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과연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까? 그저 식사나 함께 하고 커피나 나무며 바람 같은 이야기나 주고받고 돌아서는 그런 사람만 만나고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주변에 나는 괜찮은 친구가 있어" 하면서 위로 받고 살아갑니까? 과연 그렇다면 어쩌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런 정도에 머물고 있는지 모릅니다. 죄송하지만 그런 관계로는 안 됩니다. 본문의 여인처럼 통곡하면서 찾아가 하소연 할 수 있는 그런 구체적이고도 인격적인 관계가 필요합니다. 언제 어느 때고 무슨 어려움이나 도움일지라도 개의치 않고 쏟아 내 놓고 하소연 할 수 있는 그런 끈끈하고도 구체적인 관계가 필요합니다. 죽을 만큼 힘들고 어려울 때 도움이 안 되는 관계라면 그것이 인생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 대상이 사람이든 하나님이든 어려울 때 염치 불구하고 찾아갈 수 있고 하소연 할 수 있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그런 관계! 바로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관계 개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도 화목하게 지내야 하고 사람들과도 화목하게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 여정에 언제 어느 때에 상실의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신론 철학자로서 유명한 니체(F.W.Nietzsche)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 속에는 신을 살해해 버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추악한 인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그가 너를 보고 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지?

언제나 네 속을 꿰뚫어보는 그의 눈초리를 견디지 못했지? 너는 너의 증인에게 복수를 했구나. 너는 신을 죽인 것이다." 이 때 그 추악한 인간은 "나는 그를 죽일 수 밖에 없었소"라고 말합니다. 이 추악한 인간은 끈질기게 인간에게 찾아오고 모든 것을 아는 신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에는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나니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다 아시는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노래가 있습니다. 니체는 숨을 수도 없이 끈질기게 따라오시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닐 수가 없어서 신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고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버지와 형제와의 관계를 끊고 도망가는, 정죄할 수밖에 없는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심판하는 대신에 축복을 보여 주셨듯이, 오늘날 자신과 단절된 우리에게 하늘에 닿는 사닥다리를 보내셔서 새로운 관계성을 맺으시고, 새로운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끝없이 새로운 관계성을 맺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엔 우리 생명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으로 드리기 민망하고, 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끝내 우리는 우리들의 생명 그 자체도 상실하고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다는 사실을 굳이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하고 천국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명기 마지막 장을 보면 우리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무려 40년 동안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렇게도 문제도 많고 탈도 많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광야에서, 인도하던 그 모세가 죽는 기사가 담담하게 기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그렇게 다 누구나 가야 할 때가 되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종이 우리 교회를 개척할 때의 나이가 서른 두 살이었습니다. 그 동안 이 종과 함께 했던 당시에는 펄펄하던 그 모든 분들이 어느 덧 이 종의 손을 거쳐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그 때 중학생이고 고등학생이던 어린 아이들이 지금은 50대 전후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세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남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워하고 원수 맺고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 났느니 하며 소중한 시간을 죽일 여유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마지막 그 순간이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누군가에게 유익을 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후손들에게 다윗과 같이 아름다운 믿음의 유산을 남겨두려고 애써야 합니다. 아무리 건강하고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돈을 많이 모아 두었다 해도 우리 자신의 생명을 상실해야 하는 순간과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가 되었을 때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안타까와하거나 발버등치지 않았음을 성경은 증거해 두고 있습니다. 그저 겸손하게 하나님의 그 뜻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오히려 환희에 차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군 다윗과 사도 바울의 케이스를 모범으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왕상2:1-3)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딤후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어떻습니까? 너무나도 멋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후손들에게 담담하게 하나님 잘 섬기라고 유훈을 남기고 천국에서 받아 누릴 한없는 상급을 기대하며 소중한 생명 줄을 하나님께 맡겨드릴 수 있는 그런 멋들어진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기왕에 가는 길인데 이렇게 멋있게 잘 가야 우리들도 편안하고 보내는 남은 이들도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교회에 나와서 말씀 듣고 떠나가고 여전히 일상에 젖어 속절없이 세월만 보내는 그런 무의미 한 삶 그만 살고 조금 더 생산적이고 소망이 넘치는 그런 멋들어진 삶을 새롭게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이솝 우화에 보면 [돼지 새끼들의 소풍]에 관한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12마리의 돼지 새끼들이 소풍을 가다가 시내를 건너게 되었는데, 서로 떨어져서 잃어버리게 될까봐 염려를 하여 건너가서 모여 서로 숫자를 세어보니 11마리뿐이라는 것입니다. 제일 큰 형이 세어보아도, 둘째가 세어보아도, 분명히 11마리뿐이어서, 그 돼지 새끼 12마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느라고 꿀꿀거리며 헤맨다는 내용입니다. 또 장자의 이야기에도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장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스승에게 나아와 말하기를, "선생님, 제가 오늘 정말 이상한 사람을 다 보았습니다. 글쎄, 이사를 가는데 하찮은 세간은 마차에 다 싣고 가면서도 자기 마누라는 놓아둔 채 그냥 갑디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 놀라려니 했던 스승 장자는 대답하기를, "나는 더 이상한 사람을 보았다. 글쎄 이사를 가는데 짐이란 짐 가족이란 가족은 다 데리고 가면서도 막상 자기는 빠뜨려 놓고 가는 사람이 있더라." 고 이야기 해 주었다고 합니다. 문자 그대로 이 시대는 자기 상실의 시대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깊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하는 우스운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만은 잃지 않는 진정한 인격적인 사귐으로 우리들의 남은 삶을 복되게 유지해 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뜻밖의 상실로 인한 아픔이 오히려 축복이 되고 전화위복이 될 수 있도록 오늘은 상실에 관한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비무환'이라고 했습니다. 가능성을 내다보고 미리 몸으로 마음으로 영으로 준비하고 대비한다면 그 어떤 상실의 아픔도 능히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에겐 천지를 지으신 전능자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엄청난 능력을 덧입을 수 있도록 오늘 본문의 여인처럼 평소에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 회복을 유지해 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그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신앙을 생활화해야 하겠습니다. 결국에는 우리들 자신의 생명까지도 상실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이 엄연한 현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때에 모세처럼 다윗처럼 그리고 하늘의 상급으로 기뻐했던 사도 바울처럼 소망찬 마지막 순간을 대비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귀한 날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로 영광 올려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이처럼 준비 된 삶으로 나날이 행복과 축복으로 가득할 수 있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5년 4월 24일

스승의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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