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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5년 6월 7일 주일낮설교(열쇠는 하나뿐입니다!)

2015년 6월 7일 주일낮설교(열쇠는 하나뿐입니다!)

열쇠는 하나뿐입니다!

6. 7, 2015

本文:디모데후서4:1-5

說敎:崔 仁 根 牧 師

몇 년 전 뉴올리언스에 대 홍수가 나서 시 전체가 물에 잠겨버렸을 때 한 젊은 신학교 교수가 그곳으로 돌아 갈 날만을 기대하며 아틀란타에서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엘라바마주 버밍엄에 있는 한 교회에서 담임이 사임을 하고 공백이 생겼으니 와서 말씀을 좀 전해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기꺼이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몇 달의 세월이 지난 후 교회의 대표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 언제 시간이 가능한지 한 번 만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교수님을 자기 교회의 담임으로 내정이 하였으니 만나서 구체적인 대화를 나누었으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전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은 뉴올리언스에 있는 신학교로 돌아가서 후학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오지로 가서 선교를 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최고 최상의 보람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단 한 번도 목회를 해 본적도 없고 또 그렇게 큰 교회는 출석해 본적도 없으며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그리고 그 많은 재정을 관리해야 하는지?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는 전혀 그 교회와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신이 부교역자로 출석하고 있는 뉴올리언스의 교회도 다 합쳐야 2백 명도 채 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어쨌든 만나자고 하니 만나자고 약속하고 만났습니다. 그리고 뭔가 엄청 잘못 되고 있는 것 같으니 진짜 그 큰 교회를 원하고 또 잘 할 수 있는 훌륭한 목사님을 찾아보라며 매우 소극적으로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일들을 다 겪고 나서 결국은 그 교회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엘라바마주 버밍엄에 위치한 4천여 명의 성도들이 운집하는 브룩힐즈교회 담임 David Platt 목사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그가 부임했을 때 그 교회는 3가지의 큰 프로잭트를 진행해 오고 있었습니다. 교회 입구인 로비를 처음 오는 사람들이 쾌적하게 느낄 수 있도록 커다랗게 리모델링하는 것과,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도록 파킹장 옆에 운동장을 만드는 것과 아이들이 더욱 편하게 교육 받을 수 있도록 교실을 더 늘리고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넘쳐나고 돈이 넘쳐나니 그런 일을 하는 것을 그 교회로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고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플랫 목사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셨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는데 그 많은 돈을 들여 하지 않아도 될 이 3가지에 매달리고 있는 교회의 정책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교회 앞에 선포하였습니다. "진짜 이것을 하는 것이 보다 더 값진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주님께서 더 기뻐하시겠는지? 함께 고민하면서 기도해 보자"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 수 있도록 그 돈으로 가난한 이웃들, 교육은 고사하고 밥도 먹지 못하는 아이들,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귀한 사역자들을 돕는데로 돌리고 결국은 그 3가지를 다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성경 속에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뜻과 성경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교회가 온전히 나아가도록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말씀 중심의 교회로 거룩하게 탈바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종은 미국에 와서 말씀 중심으로 목회하기 위해 가진 고초를 다 당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미국 목사로서 이처럼 말씀 중심으로 목회하는 목사는 처음 느낄 만큼 참으로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세가 가까워질수록 교회는 자꾸만 사람 중심으로 온갖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구미에 맞도록 환경을 개선하며 엄청나게 투자하고 있지만, 정작 말씀과는 더욱 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탄식하고 계십니다.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말씀 외에는 대안이 없음을 재인식하고 오로지 말씀으로 돌아가 오직 그 말씀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그 말씀대로 인생도 신앙생활도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미련한 것 같아도 그것만이 축복이 되고 생명이 되며 우이들의 모든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쇠는 하나뿐입니다!

초대교회의 배경을 보면 참으로 신비롭고 불가사의합니다. 그들이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모습은 실로 감동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아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정리하여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사도들 앞에 내 놓았습니다. 우선 그 때의 상황을 성경으로 돌아가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행2:43-47)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것이 가장 전형적인 말씀 중심의 삶의 표본입니다. 성도들은 모든 재산을 함께 통용하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그러므로 하늘의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더욱 구별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주시는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의 표본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깨어지고 무너지게 됩니다. 원망이 생기고 불평이 생겨나며 욕심이 잉태하게 되고 조금이라도 더 받고 누리기를 갈망하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행6:1-4)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깜짝 놀란 사도들이 그 문제의 요인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안을 찾아냈습니다. 다시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을 강화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불에 댄 듯 크게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처럼 말씀을 제쳐놓고 돈벌이만 하거나, 자기중심으로만 살거나,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순종하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들의 삶 또한 원망과 불평과 다툼과 비참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이제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들의 삶과 인생과 믿음의 모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말씀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 천국 열쇠를 받으며 이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은총을 누리게 하는 유일한 열쇠(Key)가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만이 육신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바꾸어줍니다

우리들이 영육간의 삶에서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육신에서 탈피하여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밤 중에 아무도 몰래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냉정하리 만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거듭나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요3:1-3)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 예수님은 인간적인 정에 치우치거나 채면 때문에 본질을 흐리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가장 권세 있는 지위의 사람이 밤중에 주님을 찾아와 이처럼 예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고귀하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이는 니고데모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요구이십니다. 교회에는 열심히 다니며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 또한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으로 하는 그런 성도들이 이민교회에 많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목사들이나 지도자들이 그런 것을 보고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금방 장로로 세우고 안수집사 또는 권사로 세웁니다. 그런데 세월이 좀 지나고 나면 그와 같은 열정과 열심이 교회를 분리하거나 목사를 쫓아내는 데로 이동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이와 같은 끔찍한 불행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요? 그 열심을 말씀으로 승화시켜 육신에서 영으로 거듭나게 만들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돈이 많고 지식이 많고 세상에서 큰 명예를 누린다 해도 거듭나고 육에서 영으로 바뀌는 이 일 만큼은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하나님께서만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에서 일꾼들을 선택하고 직분을 맡길 때 이처럼 소중한 말씀을 읽지도 않고 듣지도 않으며 그 말씀으로 무장하고 순종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을 세우니 교회가 문제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유명한 그 누구라도 이처럼 우리들을 거듭나게 하는 능력을 제공해 주는 말씀으로 무장되지 못했다면 교회에서 일꾼으로 부적합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육신 속에 자신을 가두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지배를 받는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결단으로 말씀을 읽고 듣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도 세상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직분을 맡겨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1866년에 러시아의 유명한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이라고 하는 유명한문학 작품을 발표하기까지는 그가 참된 인생으로 변화된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가 청년 작가로서 젊었을 때에는 글줄이나 쓴다고 교만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안하무인격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비밀결사대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시베리아벌판으로 유형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한 때는 젊은 작가로서 떨쳤던 명성도 간곳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기한도 없는 유형의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낮에는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밤이 되면 어둡고 추운 골방에서 외로이 자기인생을 달래가며 지내야만 하였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그에게 성경책 한 권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녁마다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온갖 심혈을 기울여 그 인생 말엽에 작품을 하나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양심의 문제를 취급한 <죄와 벌>이라고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으로 거듭난 그는 양심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를 범하고 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번민하던 끝에 벌을 받게 되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하는 성경의 진리를 극적으로, 문학적으로 설명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고통의 늪에서 성경을 만났고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며 그 하나님을 통하여 이렇게도 세기적인 작품을 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만이 무능한 우리들을 유능하게 만들어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식과 정보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은 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잘나고 세상 모든 지식을 통달하였다 해도 하나님을 모르면 그는 가장 무식한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시14:1-3)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람은 스스로 일어났다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판단하신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잘난 척 하다가 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누가 과연 사람들을 잘 판단하고 정죄합니까? 스스로 잘 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 서 있다가 무섭도록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지도자 모세까지도 서슴없이 판단하고 정죄하다가 심판 받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더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민12:1-2)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로 인해 미리암은 문둥병자가 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고라 자손들이 반역을 하고 일어섰다가 지진이 나 땅이 갈라지므로 250명이나 그 속으로 빠져 비참하게 죽는 심판을 받았습니다(민수기16장 참조). 사람이 왜 이렇게도 어리석게 살까요? 육신에 속하여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처럼 어리석게도 교만하게 살까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까요?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선포합니다.

(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여호와를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은 사람은 지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탄식하였습니다.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은 무엇이며 율법은 또한 무엇입니까? 다 하나님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똑바로 알면 흥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인간들의 스펙을 보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돈을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속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오로지 스펙만이 최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까지도 이 세상의 풍조를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를 담임으로 모실 때도 오로지 스펙만 봅니다. 그 사람의 인성과 성도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엎드려 공경하고 순종하려는 믿음의 사람보다는 세상적인 그런 배경을 더 많이 보는 것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총신 출신들은 모교인 총신대학원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을 가장 명예롭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하기야 강단은 하나뿐인데 그 출신 목사들은 수만 명에 이르니 죽는 날까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겠지요. 그런데 럭키하게도 이 종은 사당동에 있는 캠퍼스나 용인에 있는 캠퍼스에 다 가서 말씀을 전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용인에 있는 캠퍼스에는 신대원 1-2학년 2천명이 있고 사당동에는 졸업반인 3학년 1천명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학교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에서 일하는 직원 한 사람이 한숨을 쉬며 탄식하였습니다. "목사님, 여기 있는 용인 캠퍼스는 목사님께서도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학교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사람은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학생들도 통근 버스를 타고 오거나 기숙사에서 기거하기 때문에 외부인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런데 도서관이나 학교 내에서 도둑맞는 학생들이 너무나 많아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시계도 없어지고 전화기도 없어지고 녹음기도 없어집니다. 내일 모래면 목사님이 될 분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없어지는 물건이 많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요?"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총신 신학대학원에 들어가는 것도 하늘의 별입니다. 종로에 학원이 있을 정도로 재수 삼수 사수까지 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기성 교회에서 스펙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 연 고대를 졸업하고 충신을 나온 사람은 담임목사 청빙 0순위랍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취업도 잘 안되고 월급도 적으니 총신대원으로 들어 와 3년만 하면 최고 대우를 받으며 전도사 목사로 큰 교회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오늘날 교회가 바로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과 같이 들판에서 양이나 치고 있던 자를 뽑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실 만큼 하나님은 무능한 자를 택하여 유능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능하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못 배웠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돈 없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우리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자로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이 어리석은 종이 여러 성도님을 위로하기 위해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신, 구약 성경 전체를 흐르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확신하고 따르고 의지하는 자가 바로 믿음이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고전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합니다

큰 회사의 회장님이 사원을 뽑는데 마지막 인터뷰를 합니다. 일본 사람, 중국 사람, 그리고 유대인 등 3사람이 회장님 앞에 섰습니다. 회장이 일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5+5는 얼마인고?", "예 10입니다." 그러자 회장은 중국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중국 사람은 이미 정답을 일본 사람이 드렸는데도 만족해하지 않는 것 같아서 15라고 적당하게 대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대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은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회장님, 얼마라고 대답해 드릴까요?" 하고 말입니다. 결국 그 유대인이 합격했습니다. 왜일까요? 회장님은 도덕 선생님을 뽑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장님은 자신이 쓰기에 합당한 사람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원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누구를 위해서 존재합니까? 우리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들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며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리석게도 이렇게도 단순한 원리를 모른 채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니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해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눅15:4-7)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하나님의 이와 같은 깊은 뜻을 알고 그 기쁨을 회복해 드리기 위해 깊이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믿음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내면에 이와 같은 믿음이 없다면 결단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복된 믿음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지난주일 배웠던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데 과연 오늘 우리들의 엄청난 스펙이 필요합니까?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합니까? 좋은 대학을 나오고 학, 박사가 되어야 합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각의 발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얼마든지 오늘 우리들이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절대로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세상의 풍조를 쫓아 세상의 방법으로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묵묵히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룻기에 나오는 룻을 한 번 보십시오. 그 여인에게 학벌이 있었습니까? 돈이 많이 있었습니까? 사회적인 직위나 명예가 있었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남편 죽은 시어머니지만 인간의 도리를 다해, 신자의 도리를 다해 그 노인을 섬겼을 뿐인데도 모압 여인이라는 이방인의 오명조차도 축복이 되어 멋들어진 보아스를 만났고 그를 통하여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아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원한 영광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제발 사람의 생각과 세상의 가치를 던져버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순전하게 말씀만 붙들고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역사를 체험하는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마지막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소망이 하나 있다면 "제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인간적인 가치와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세상 사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다니는데 능력이 없고 그 엄청난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아무런 기적을 보지 못하는 소망 없는 교인들도 변해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대안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무조건 말씀으로 돌아가 우직스러우리만치 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딜지라도 그 말씀을 따가 가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만 하면 성경의 모든 역사 속에서 살아 역사하셨던 우리 하나님께서 필이 임재하시고 그 뜻대로 우리들의 삶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하고 따르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백성들과 같이 어리석게도 사람의 생각과 가치로 이처럼 멋들어진 하나님을 원망하는 풍조가 바로 지금 우리들의 세태입니다. 부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바보처럼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온 몸으로 체험하는 그런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5년 6월 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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