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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8일 주일낮설교(죽어야 사는 원리)

죽어야 사는 원리

6. 28, 2015

本文:요한복음12:20-26

說敎:崔 仁 根 牧 師

요즘 들어 컴퓨터 마우스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가뜩이나 더운 여름에 짜증이 많이 났습니다. 늘 '이제는 바꾸어야 되겠다.' 하면서도 마켓에 가는 일도 수월치 않아 사용할 때마다 짜증만 내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지난 수요일에는 일을 하다가 너무나도 짜증이 나서 마우스를 한 방 내리쳤더니 동글동글 돌아가는 구슬이 빠져나와버렸습니다. 그런데, 구슬이 빠져 나온 그 속을 들여다보니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먼지 덩어리가 둥근 내부 전체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게 먼지가 들어갈 여백이 없는데도 어떻게 먼지가 그 속에 그렇게 많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곳을 깨끗이 닦아 내고 구슬을 다시 넣어서 사용해 보니 새것과 같이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1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그 내부를 청소해 주지 못한 자신을 탓하면서 우리 속 영혼을 대입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동안 우리들의 영혼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얼마나 많은 먼지와 때가 묻었겠습니까? 그러니 삶의 기쁨도 없고 생활의 신선한 변화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그렇게 세월만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즈음에 한 번쯤 우리들의 영혼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닮아 주님과 이웃을 위한 희생은커녕 자기 자신에게 조차도 관용하지 못한 채 늘 짜증과 불평 속에서 육신적인 삶마저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현충과 호국의 달 6월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뭔가 우리들의 삶도 이웃에게는 축복을 심어주고 하늘의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보다 더 가련하고 불쌍한 인생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짐승만이 그렇게 오로지 자신의 배만 위해 사는 것입니다. 명세기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고 태어난 우리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만을 위해 살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單刀直入(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고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은 희생할 줄 알며 살아야 하고 그와 같은 희생을 통해서 자신에게도 이웃들에게도 풍성한 유익이 만들어 진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최소한 우리들이 이와 같은 주님의 가르치심을 배우며 살아가는 성도라면 더 더욱 그렇습니다. 희생의 달 6월을 마지막 보내면서 오늘은 이와 같은 희생의 문제로 우리 삶을 재점검하고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이웃들이 칭찬할 만한 그런 멋진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죽어야 사는 원리

우리 주님의 공생애가 거의 끝나가는 즈음에 뜻밖에도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헬라인은 이방인의 대표적인 명칭입니다. 당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조용히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접근하여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정중하게 청하였습니다.

(요12:20-23)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거두절미하고 이처럼 예수님의 마지막 공생애의 끝자락에 뜻밖에도 찾아 온 이 이방인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뜻밖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와 같은 이방인들의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재창조하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내겠다고 선포하신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이와 같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삶 또한 예외 없이 주님을 닮아 희생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희생적인 삶의 표본이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주님을 위해 그 소중한 생명이라도 희생하는 것입니다.

(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2001년 일본 도쿄 JR신오쿠보 지하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남성을 구하고 숨진 고 이수현(당시 26세)씨의 아버지 이성대씨가 한·일 친선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 훈장을 받았습니다. 비록 가슴 아프게도 아들을 잃긴 하였지만 일본에서 가장 훌륭한 의인으로 기록되고 자손만대에 아름다운 이름을 떨쳐 이렇게 그 아버지가 훈장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의 말씀 그대로 자기 생명이라도 내어 놓고 희생하니 우리나라의 명예와 그 부모의 명예가 일본이라는 한 나라에 깊이 뿌리 내리고 그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훈장을 들고 찾아와 감사를 드릴 만큼 생생하게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주님과 남을 위해 이처럼 고귀한 생명을 던져 죽을 수는 없지만 근본 삶의 가치만큼은 길이 가슴에 새기고 자손만대에 길이 남을 그런 아름답고 멋진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오늘은 우리 함께 다음과 같은 삶의 원칙과 철학을 가슴에 새기고 그 삶을 살기 위해 우리 주님의 도우심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주면 받는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가르치심에는 평범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칫 이해조차 안 되는 그런 놀라운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주면 도로 받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그렇게 크게 와 닿지 않습니다. 주면 없어지는 것이고 주지 않아야 내 안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하게 들리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로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말씀이라도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기에 의심 없이 순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들의 믿음이 객관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 그대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아낌없이 내어 주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순교로 자신의 몸을 초개같이 내 주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베드로는 자신의 몸을 주님과 똑 같이 십자가에 매달릴 수 없다고 하여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그림이 철의 장막 구 소련의 왕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이 종은 찡한 가슴으로 보고 왔습니다. 이처럼 한 목숨이 순교하여 죽으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 같지만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그 말씀 그대로 한 알의 밀이 죽어 썩어지면 수십 배의 열매로 다시 살아나듯이 우리 주님의 고귀한 생명은 이 땅에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영혼으로 다시 살려 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말씀 그대로 뭔가 우리들의 소중한 것을 희생하여 주님과 이웃들에게 큰 영광으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멋들어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희생이 없는 성장과 발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798년에 제너는 천연두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젖소에서 천연두의 면역성을 가진 우두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사람에게 주사하면 천연두 면역성이 생긴다는 것을 학회에 보고했습니다. 학회에서 마지막 실험 단계에 들어갔을 때 당시에 제일 유명했던 영국 학계의 권위 있는 의사들을 위시해서 많은 동료 의사들은 질투와 시기에서 그를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시골뜨기 의사가 의학의 ABC도 모르고 하나님과 의학을 모독한다고 욕했습니다. 동물과 사람을 구별할 줄도 모르느냐고, 동물에게 실험한 것이 사람에게 적용이 될 수가 있겠느냐고 조롱을 하면서 그것을 없애 버리려고 했습니다. 만일 그 학회에서 그것이 부결이 되면 당시는 인체 실험이 매우 어려운 때이고 권위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다시 빛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머금고 "몇 달 전에 어느 사람에게 주사를 해서 듣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한 사람의 임상 실험을 가지고 되느냐며 또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자 제너는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저는 23명을 실험했고, 낳은 지 열 하루밖에 되지 않은 제 아들에게도 실험을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장내는 숙연해졌습니다. 그것은 결사적인 실험이었습니다. 인류에게서 천연두를 없애버리기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생후 열하루 밖에 되지 않은 자신의 아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희생이 없이 위대한 일을 할 수 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자신의 무의미한 희생을 두려워하며 주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따지고 든 인물이 있었습니다.

(마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라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두 말 않으시고 친절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마19:28-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고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헛된 희생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감하게 내 주어야 합니다. 너무 계산하지 말고 무엇이 되어 돌아올 것인지를 기대하지 말고 그냥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믿고 담대하게 희생하며 내어 주는 희생정신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옛 말에도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없다"고 했습니다. 조금은 손해 볼 샘치고 그냥 내 주고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내일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그런 멋들어진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말씀 중심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울면 웃게 되는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오래 사는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잘 웃는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파한대소를 3번만 하면 장수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웃음은 그렇게도 우리들의 삶과 건강에 놀라운 효과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파한대소하고 웃을 일이 우리들의 일상에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웃을 일이 없는가? 하고 고민해 보았더니 그 해답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울지 않기 때문입니다. 웃음은 그렇게 아무에게나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웃음은 눈물을 흘려본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독특한 선물이익 때문입니다.

(시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우리는 오늘 이 놀라운 말씀을 묵상해 보기를 원합니다. 이 복된 말씀 속에는 눈물과 기쁨이 서로 교차하며 등장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는 고통이 기쁨을 만드는 열매를 보장해 준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의 경험이나 성경의 긴 역사를 들어다 보면 과연 이 말씀이 맞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눈물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라는 예수님의 제자가 그 잘난 생명 하나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 입을 맞추며 악당들에게 팔아넘긴 가룟 유다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있을 수 없는 배신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룟 유다와 같이 베드로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눈물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눈물은 슬픔의 가장 말없는 강력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이 이처럼 눈물이 되어 나오도록 슬플 때 마음을 열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사38:2-6)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비극은 우리들에게 이처럼 우리 하나님께서 감동하실만한 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냉철하게 발달하여 세상 모든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하는데 가슴은 너무나도 메말라 오랜 가믐에 갈라터진 논바닥 같으니 어떻게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의 마음에 눈물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난한 이웃들도 보이고 가슴 아파하는 이웃들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한비야라는 사람이 누군가의 권고로 아프리카 케냐로 긴급구호활동을 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거기에서는 그는 참으로 괜찮은 케냐 출신 의사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의사도 그냥 의사가 아니라 케냐에서는 가장 Top Class에 있는 의사였습니다. 어떤 기회가 되어 한비야는 그 의사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케냐에서 꽤나 유명한 의사라면서요?" 하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그 의사가 경쾌하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를 만나려면 여기 대통령께서도 며칠은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꽤 좋은 환경에서 의료 활동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이렇게도 후진 산골에 들어와서 언제 옮겨줄지도 모르는 전염성 풍토병이나 치료하고 있습니까?" 그러자 그 의사는 어금니가 다 들여다 보일만큼 파한대소를 하며 대답해 주었습니다. "남보다 더 귀한 기슬과 능력을 가지고 오로지 돈만 위해 사용한다면 훗날 죽을 때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수고의 대가도 없이 봉사하고 희생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저는 돈보다 내 가슴이 뛰는 이 기쁨을 더 귀하게 여긴답니다." 그 다음에 한비야씨가 한국에 돌아와서 글을 써서 책에다 올려 두었습니다. "케냐의 그 의사는 나와 똑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편하게 돈 벌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데 온 세계로 뛰어다니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구호활동을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놀라운 기쁨을 갖다 주기 때문이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공의로우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없이 요구하고 계십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슬픔과 고통의 눈물을 좀 흘려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만 한다면 베드로처럼 잘못해도 용서해 주고, 히스기야처럼 죽을병에 걸렸을지라도 깨끗하게 고쳐주겠다고 말입니다. 이와 같은 삶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과 역사가 바로 우리 예수님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친히 살려내시고 만인의 생명의 주님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빌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눈물을 닦지 말고 너무 눈에 눈물이 마르지 않도록 조금은 넉넉하고 따뜻한 가슴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품고 이웃을 섬기면서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죽으면 사는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1년 여 전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수학여행을 가던 세월호가 침몰하여 300여명의 꽃다운 자녀들이 죽는 비참한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그 사건을 방송하는 가운데 참으로 초라하게 여러 번 TV화면에 비췬 선장의 도망가는 모습은 자손만대에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손자 같은 혹은 자녀 같은 아이들이 배안에 갇혀 죽어 가는데 자기 자신만 살겠다고 허겁지겁 탈출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불쌍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은 감옥에 갇혀서 만 백성들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12: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 생명이 소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지난 목요일 즉 25일은 대한민국이 6.25의 참상을 겪은 지 65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 전쟁터에 끌려가 조국과 백성들을 적의 포화 속에서 구해내기 위해 초개같이 목숨을 바치고 전투에 참여했다가 죽은 사람이 16만 명이었는데 시체조차도 찾지 못한 채 산속이나 들이나 강에 방치 되어버린 시신만도 13만 명이나 된다고 하니 참으로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냈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데도 그 누구도 그렇게 죽어간 희생자들에게 마음을 두는 사람이 없고 65년이 지나도록 그들의 시신이라도 찾아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주는 이가 없었으니 우리나라는 아직도 선진국의 대열에 서려면 까마득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자신을 위한 그 소중한 희생을 모르면 그것은 결코 제대로 된 인간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도 중학교 3학년 학급에서 40대의 여선생님이 학생들의 소지품을 조사하다가 담배를 발견하고 나무라자 입에 담지 못할 말로 폭언을 하여 여선생님이 무서워서 교무실로 돌아왔는데 그곳까지 따라와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해 병원으로 실려 가는 불상사가 있었습니다. 자신을 바로 되고 잘 되라고 가르치고 훈계하는 선생님을 때리는 이 아이에게 과연 희생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시대가 이렇게 막가파식으로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모른 체 죄악으로 물들어가고 있으니 나라의 내일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개인적이고도 안하무인격으로 Selfish화 되어 가는데 남을 위해서 혹은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말라고 가르친다면 과연 그 말씀의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세태를 말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렇게 자기 자신만을 챙기고 섬긴다고 행복해지거나 잘 되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들이고 그러므로 우리들의 행복과 불행이 그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서원하여 얻은 아들이 사무엘입니다. 그 사무엘을 약속대로 젖을 떼자 말자 하나님께 바쳐드리고 한나가 그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삼상2:6-8)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이것이 아들 하나 없어서 피눈물을 흘렸던 여인이 그 아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하나님께 갖다 바쳤던 여인의 고백입니다. 무엇입니까? 인생이 스스로 행복하고 잘 되고 부하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나의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는 워낙에 불량하니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죽이셨으나 그 제사장에게 갖다 바쳤던 사무엘은 성경에서 가장 흠이 없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던 유일한 인물로 구별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우리 목숨을 부지하려고, 건강해 보려고, 부자가 되어보려고 스스로 애써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재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게 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빛이 나고 그 생명이 영원해 진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깨닫고 순종하는 멋진 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전라북도 하리라고 하는 곳에 교회가 있었는데, 교회가 낡아서 지붕에서 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의 문 집사님이란 분이 교회를 새로 지어 사명을 다하여야겠다고 생각하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시 짓자고 하자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 문 집사님은 자기가 가졌던 논 3마지기를 팔아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반쯤 지었을 때 건축비가 없어 중간에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문 집사님은 교회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문득 며칠 전에 본 신문이 기억났습니다. 요즘은 과학이 발달해서 소경도 다른 사람의 눈을 이식해 수술하면 볼 수 있다는 기사였습니다. 문 집사님은 왜 이 생각이 날까? 하고 생각하다가 자기의 한쪽 눈을 빼어 팔아 교회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전주 예수병원으로 갔습니다. 전주 예수병원에 가서 원장 되는 선교사를 만나 사정을 얘기하자 그 선교사는 그 얘기에 감동되어 미국의 교회들에게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미국의 교회들은 그 교회를 돕기 위해 건축 헌금을 모금하여 보내와, 그 교회를 아름답게 지을 수 있었습니다. 문 집사님은 눈을 빼지 않고도 교회를 지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논도 6마지기나 사주어 농사를 지으며 교회를 섬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회이든지 누군가가 죽어서 썩어질 때 거기에 기적이 일어나고 생명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하기 어려운 말씀 중에 하나가 바로 "희생"입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신앙의 원리는 초지일관 한결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알의 밀알과 같이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들의 복된 인생과 아름다운 신앙생활의 올바른 원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을 '역설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주어야 받고 울어야 웃으며 죽어야 산다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이성과 지성에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들을 다스려 가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현실에 맞추지 말고 우리들의 현실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면서 순종하고 가는 멋을 터득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이 떠나가고 땅이 없어져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영원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고귀한 분들을 생각하는 현충의 달 6월이 저물어 갑니다. 누군가가 희생하고 고귀한 목숨을 내어 놓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이처럼 풍요롭게 잘 살아갑니다. 우리들도 누군가가 더 행복하고 멋지게 살아갈 수 있도록 아름다운 땀과 피로 희생의 길을 만들어 놓아야 하겠습니다. 딱히 신앙이라는 거대한 용어를 들지 않더라도 이웃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작은 것 하나라도 희생할 줄 아는, 조금은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귀한 날 아버지 집으로 올라와서 예배자로 헌신하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처럼 희생하고 헌신할 줄 아는 복된 믿음의 미덕으로 하나님의 풍성하신 축복을 누리실 수 있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5년 6월 2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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