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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6일 주일낮설교(불가능에서 가능을 보라!)

불가능에서 가능을 보라!

8. 16, 2015

本文:열왕기하13:14-21

說敎:崔 仁 根 牧 師

부산에서 전도사로 6년 동안을 섬기다가 총신으로 진학하기 위해 서울로 와서 동대문구에서 또 다시 봉사하며 사역을 감당하고 있을 때 뜻하지 않는 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처럼 섬기던 같은 교회의 연세 드신 여전도사님이 갑자기 찾아와서 "지금 귀신 들린 청년에게 가서 귀신을 내 쫓아야 하니 최전도사님도 같이 갑시다!"는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여전도사님이 평소에는 너무나도 여성스럽고 얌전하셨고 귀신같은 것을 쫓아내러 다니는 그런 부류의 전도사님이 아니셨고 이 종 또한 정통신학으로 잔뼈가 굵은 보수신앙의 소유자라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다닌 적이 없었던 터라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도사님께서 귀신을 쫓으러 가자고 하시는데 망설일 수도 없고 해서 얼떨결에 따라나섰습니다. 이미 여전도사님은 장성한 청년 4명을 준비시키셨기에 함께 6명이 교회를 나섰습니다. 하지만 귀신들린 사람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기에 조금은 두렵기도 하였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고3의 남학생이었는데 신체가 건장하였습니다. 그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머리 쪽에는 우리 두 전도사가가 않고 4명의 청년들은 각각 팔쪽에 둘 발쪽에 둘을 배치시켰습니다. 나중에 발버둥 치게 될 때를 대비한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죽은 듯이 누워 있던 그 청년이 벌떡 일어나는데 두 팔과 발을 붙들었던 4명의 청년들이 순식간에 나가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혼자서 건장한 4명의 청년을 눈 깜빡 할 순간에 내동이 친 것입니다. 내심 두렵기도 하고 무서웠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는 터라 우리 두 전도사는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난리를 치던 그 청년이 거품을 흘리며 죽은 듯이 꼬부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듯이 나뒹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진짜 죽은 줄 알고 무척 놀랐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물을 달라고 하더니 일어나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얼굴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말과 행동이 정상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귀신이 떠나갔던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그 가정에 없었는데 그 사건으로 온 가족들이 다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도 이 땅에 눈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기적임을 인정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종은 결코 신비주의나 은사집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밝히 기록되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역사적인 사건들이기에 깊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도 이처럼 요상한(?) 일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본문으로 돌아가 믿음의 눈으로 사건을 바로 배우고 우리들의 불투명한 삶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기적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불가능에서 가능을 보라!

오늘 말씀은 그 유명한 엘리사선지자가 죽을병에 걸린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병문안을 온 요아스 왕에게 신선한 비전을 갖게 하고 그로 인하여 망가져 가던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또한 보게 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엘리사가 죽어 장사 된 무덤 안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왕하13:20-21)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떻게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의 뼈에 닿자말자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우화도 아니고 동화도 아닙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오늘 우리들이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을 믿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 있는 참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성경을 역사책으로나 하나의 신비스러운 책으로만 치부하고 듣고 흘리거나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결국 오늘 우리들이 흔히 보고 있는 바와 같이 스스로는 신자인데 하나님은 없는 그런 엉터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렇듯 우리는 조금은 황당한 것 같지만 진실인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을 통해서 서너 가지 소중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함께 공부하면서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죽을 때가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황당한 사실은 연세가 많이 드셨는데도 자신은 도무지 죽지 않을 것 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선하고 복되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못나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미 연세가 꽤나 깊어 앞으로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온갖 욕심에 짓눌려서 더 못 가져 안달이 난 분이라든지 끊임없이 이웃들과 불목하며 그렇게 원수를 만들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건강하고 질병이 없다고 해도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수명이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모세를 통해 남겨주신 인생에 대한 소중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를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무엇입니까? 인생의 수명이 70-80이라는 뜻입니다. 이 보다 더 사시는 분들은 다 덤으로 하나님의 장수의 축복을 누리는 것일 뿐 우리들의 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쨌든 이 땅에 태어났으면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죽어야 함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말씀에 의거해서 오늘 본문에도 엘리야의 죽음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왕하13:14)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엘리사가 누구입니까? 신, 구약 전체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이적과 기적을 많이 행하였던 놀라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제자가 남의 집 도끼를 빌려와 나무를 찍다가 그 도끼가 물에 빠지자 나뭇잎 하나로 쇳덩어리를 물에 떠오르게 하여 건져내 주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왕하6:1-7)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그곳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가라 그 하나가 가로되 청컨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가리라 하고 드디어 저희와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가로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 온 것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 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하고 가로되 너는 취하라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취하니라

는 말씀이 바로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무거운 쇳덩어리가 물에 떠오르다니...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는 그만큼 하나님과 함께 했던 사람이요 능력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그가 지금은 죽을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저마다의 壽限(수한)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제한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임을 재인식하고 남은 삶을 바로 살고 아름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죽었을 때 "그 사람, 잘 죽었다"고 뒤에서 욕하는 사람이 없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눈물까지는 흘리지 못해도 마지막 가는 장례식장에는 반드시 와 주는 그런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사를 보십시오. 한 나라의 왕이 눈물로 찾아와 엎드려 경배하는 그런 멋진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왕하13:14)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살았을 때 보다 죽었을 때 더 귀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조영남, 최유라가 진행하는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에 참으로 황당한 경험담이 흘러나왔습니다. 회사의 사장에게 개가 한 마리 있었는데 그 개가 죽자 직원들이 밤을 세워가며 초상집처럼 문상을 하게 하고 조의금까지 거두며 장례를 치루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회장님의 개가 병들었는데 모든 회사의 임직원들이 문상을 하며 회장님을 위로하였는데 정작 그 회장이 죽으니 아무도 온 사람이 없더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인생을 잘못 산 현실입니다. 우리는 엘리야처럼 죽을 날이 있음을 알고 조금 더 참고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나누며 살았을 때 인심 쓸 줄 아는 그런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복된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대범한 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신자들이 작은 자로 초라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큰 자가 되고 대범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다음과 같은 말씀이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시81:10)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이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보신다면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의 손을 꺾으시고 유유히 흐르던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내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먼저 소개하시고 그러니 너는 입을 넓게 열어 내가 채우는 것을 체험해 보라고 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고 이웃이 잘 되면 시기하며 자신은 큰 꿈조차 꿔보지 못한 채 그렇게 초라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이웃이 잘되고 사촌이 잘 돼야 사업자금이라도 꾸러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다 망하고 자기만 잘 되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너 죽고 나 살자!" 하면서 달려들며 다 함께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대범한 꿈을 안고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대범한 꿈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엘리사는 자기를 문안 온 왕 요아스에게 하나의 비전을 심어 줍니다. 왕으로 하여금 화살을 취하게 하고 동편 창을 열게 하고 그 창으로 화살을 쏘아 날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당신을 괴롭히는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고 말입니다. 그 정도의 힌트를 주었다면 다음의 명령을 참으로 대범하게 시행했어야 옳았습니다. 하지만 옹졸한 이 왕은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초라하게 대응하고야 말았습니다. 엘리사가 이어서 왕으로 하여금 살을 취하게 하고 그 살로 땅을 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심한 이 요아스 왕은 그 살로 땅을 세 번만 톡톡 치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엘리사가 병중에서도 화를 내며 책망하였습니다. "왕이여, 어찌 그리도 소심하십니까? 달랑 3번만 치고 말았습니까? 최소한 대 여섯 번은 쳤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아람을 3번만 치고 말 것입니다."고 말입니다.

(왕하13:17-19)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 곧 쏘매 엘리사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또 가로되 살들을 취하소서 곧 취하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등에 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그 풍성한 능력을 믿고 무슨 말을 하던지, 무슨 일을 하던지 담대하게 용기 있게 큰 꿈을 가지고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일을 해보아야 체험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일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능력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 종은 우리 교회를 개척하고 사람도 없고 돈도 없는 가운데서도 교회를 사겠다고 교회당을 보러 다녔습니다. 84년 9월 첫 주일에 개척예배를 드리고 10월부터 교회당 사겠다고 부동산 에이전트 하고 돌아다녔으니 누가 봤으면 정신 나갔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밤낮으로 돌아다니니 어떤 집사님이 측은해 보였던지 "목사님, 그래도 어네스트 마니라도 있어야 계약을 하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만 불을 헌금해 주더라고요. 그 돈을 가지고 3년을 찾아다니다가 현재 우리 교회가 들어서 있는 이 황금 같은 땅을 보게 되었고 결국은 개척 4년 만에 I-5옆에 황금 같은 땅 2에이커를 사고 7년 만에 대성전, 체육관, 도서관, 26개의 교실을 가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게 된 것 아닙니까? 우리들에게 결코 수백 만 불의 돈이 있어서 이렇게 교회를 지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 돈 가지고 교회당 짓고 사업체 구입하는 것, 그 누가 못하겠습니까? 자기 돈 없이도 교회당 짓고 엄청난 사업체를 마련하는 그것이 곧 재주요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시애틀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은행의 융자를 받아서 교회당 지은 교회입니다. 교회에 누굴 믿고 그 많은 돈을 빌려줍니까? 그런데도 받았으니 능력이요 그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이렇게 일을 해 보니 진짜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더라구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배짱을 가져야 합니다. 무조건 하나님께 들이대며 졸라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하스처럼 작은 가슴으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머리와 현실로는 도저히 이루지 못할 만큼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 되심을 만 천하에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우리들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생활 속에서 기대해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경험해 보게 되는데 평소에는 늘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도 정작 큰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찾지 않고 사람을 찾고 돈을 찾는 것을 많이 경험해 보았습니다. 이 종은 그 반대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는 늘 어떻게 살지? 돈도 없는데... 하다가도 문제가 딱 발생하게 되면 절대적인 하나님이 계시니 문제 없어! 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그런 신앙이 생활화 된 신자가 되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절간의 부처와 같이 눈은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는 커다란데 듣지도 못하며 입이 있어도 말도 못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죽은 뼈를 통하여서도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런 엄청난 능력과 권세를 가진 하나님이십니다.

(왕하13:20-21)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믿으려면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믿으며 확실하게 의지해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미적거리고 따지고 재보고 하다가는 결코 기적을 보지 못합니다. 물건을 하나 사도 "이것은 바로 나를 위해서 만들어졌네!" 하면서 덜컹 집어 들어야 내 물건이 되지, 들여다보고 따져보고 견주어보고 망설이다 보면 결코 자신의 물건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과 같은 무능하고 부족한 성도들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인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갖출 것 다 갖추고 엄청난 능력이 있어 하나님의 일을 해 놓았으면 자기 자랑만 하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저와 같은 목사가 맨손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성전을 건축했으니 모두가 다 "아, 하나님의 능력이야,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셨어!" 이렇게 감탄하지 제가 만약 돈이 많고 건축에 능통한 사람이었으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누가 감탄하며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고 부족할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만들어 내기에 더 적합한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바라고 역사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얼마든지 가능하고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사의 죽은 뼈를 통하여서 죽은 자를 살려내신 분은 동일한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영국의 비평가이며 사상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이 쓴<티끌의 윤리>라는 책이 있는데, 그는 그 책 속에서 "진흙땅을 하나님이 들어 쓰실 때에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결론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모래와 흙과 불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히게 될 때에 사파이어가 될 수 있다. 모래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될 때에 오팔이 될 수 있다. 맨 흙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히게 될 때에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창조의 능력으로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웬만큼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성도들일지라도 오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의 패턴이 너무나도 과학적이고 이성적이고 기계적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배터리가 없는 스마트 폰이 아무 소용이 없다던가 개스가 떨어진 자동차는 결코 움직일 수 없다는 등의 현대 문명 속에 철저하게 찌들려버렸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의 뼈에 부딪히자 다시 살아났다는 등의 이야기는 아주 황당해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종은 엘리사의 뼈를 통해서도 죽은 사람을 살리시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역사를 일으키실 만큼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절대적으로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는 동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찢어져 없어지고 땅이 갈라져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상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는 여전하리라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말세에는 이와 같은 성경을 액면 그대로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요 세상에 밝히 들어내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별 일이 없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몇 주 전에 말씀 드렸던 바와 같이 무슬림의 나라 이란에서 교회를 이끈다는 이유 하나로 감옥에 갔던 여인이 이웃에게 전도만 해도 사형을 시키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취조하는 간수에게 전도를 하여 예수님 믿게 만들었던 역사는 그곳에서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 보다 더 놀랍고 큰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와 같은 기적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는 그런 진정한 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기대하는 진정한 신앙으로 거듭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가는 그런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5년 8월 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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