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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27일 주일낮설교(생각을 지배하라!)

생각을 지배하라!

9. 27, 2015

本文:마태복음16:21-28

說敎:崔 仁 根 牧 師

지난 24일 목요일에는 우리 주변에서 참으로 끔찍한 사고가 많이 있었던 가슴 아픈 날이었습니다. 멀리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성지순례의 계절 하지를 맞아 무슬림들이 각국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성지순례를 하는 것은 무슬림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순례를 통하여 그들은 여러 가지 종교행사와 의식들을 행하여야 하는데 그 중에 마지막 순서가 마귀를 쫓는 의식입니다. 마귀의 벽에 작은 조약돌을 49개를 던지는데 일곱 개씩 일곱 번을 던지는 의식입니다. 바로 여기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압사사고가 일어나 무려 717명이 숨지고 9백여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는 매년 이 때쯤이면 항상 수백 만 명이 한꺼번에 모여들어 이와 유사한 사고가 끊이지 않았는데 지난 10년 동안 거의 3천여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안타까운 사고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났는데 우리 교회 밑에 위치하고 있는 노스 시애틀 커미니티칼레지에서 내일 개학을 앞두고 지난 목요일 일부 유학생들의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대헝 관광버스 두 대를 빌려 세이프코 필드에 나가기 위해 오로라 다리 위를 달리고 있을 때 마주 오던 수륙양용 대형차 Ride Docks가 중심을 잃으며 이들이 탄 버스의 옆구리를 들이받으면서 큰 사고가 난 것입니다. 이로 인해 현장에서 4명이 숨지고 8명은 의식불명이 되고 8명은 중퇴며 나머지 수십 명도 크게 다치는 대형사고가 난 것입니다. 그 중에는 한국 학생들도 7명이나 있었는데 한 명은 의식불명상태라고 합니다. 이 두 사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큰 교훈을 받게 됩니다. 사우디의 사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되 참 신이신 하나님을 바로 만나 오늘과 미래에 진정한 소망을 가진 성도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구촌에는 수 억만 명의 사람들이 저마다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를 따르기 위해 그들만의 규례를 따르게 되고 사고를 당한 분들은 그 규례를 따라 순례 길에 나섰다가 저리도 안타까운 변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받은 축복이 많고 많지만 바른 하나님을 우리들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는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오로라 다리에서 있었던 사고를 통해서 우리는 또한 생명의 소중함과 사람의 삶이 한 순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도 큰 대항버스를 타고 불과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목표로 하고 가던 피 끓는 대학생들이 이렇게도 어이없는 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을 줄이야 어떻게 상상인들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한 치 앞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과연 그렇게도 우주의 주인이신 참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겠으며 이처럼 허무한 생명을 안은 채 남은 삶을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지?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면서 소중한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생각을 지배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셔야 할 때가 가까움을 아시고 하루는 제자들을 불러 놓고 자신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점검해 보셨습니다. 그래서 우선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셨습니다.

(마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는 질문을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무도 예수님 자신에 대해 똑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3년씩이나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삶의 근본 문제들을 37번이 넘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면서 보살펴 주셨는데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충격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도직입적으로 주님 앞에 서 있는 제자들에게 물어보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시몬 베드로가 담대하게 선언하였습니다.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매우 만족해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바로 그렇게도 주님을 만족시켜 드렸던 그 제자가 주님으로부터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는 끔찍한 책망을 들었고 심지어는 사탄이라는 엄청난 말씀까지도 듣고 말았습니다.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사건에서 오늘 우리는 참으로 소중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하나씩 찾아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 등불과 같이 소중하게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미국 50개 주에서 가장 작은 메사츄세츠 주보다 더 작은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그곳에서 3년 동안이나 이때껏 단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했던 온갖 기적과 이적으로 나라를 온통 깜짝 놀라게 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시셨는데 그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직접 확인해 보신 바 주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기적을 베풀어 자신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셨고 자식이 죽어 혼비백산이 되고 울며 불 때 그 자식을 다시 살려 기적을 친히 보여 주셨는데도 그 주님을 모른다면 그게 말이 되겠습니까? 단순하게 그와 같은 기적을 본 사람들만도 5천 명이 넘었고 7천 명이 넘었다고 하셨는데 어찌 두 눈으로 그 엄청난 기적을 보고도 그 주님이 누구신지 몰랐을까요? 바로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하여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도 그 주님을 잘 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머리로는 영어 단어를 달달 외우듯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진짜로 꼭 알아야 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바 예수님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한 번 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돌아가서 우리들의 모습을 그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25:24-30)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얼마나 참담한 모습입니까? 한 때는 주님으로부터 달란트까지 받았었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지옥불로 심판까지 받은 것을 보니 참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우리 주님을 잘 모르면 이처럼 달란트까지 받아서 제법 앞서가는 신앙인처럼 행세하다가도 주님의 심판 날에 엄청난 선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님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주님을 제대로 모르니 그 주님을 넘어지게 만들게 되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엄청난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어떻게 아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주님을 제대로 아는 삶을 사는 것이 되겠습니까? 이 두 질문을 하나로 대답해 줄 성경 속의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부터 먼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막10:46-52)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 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예수님을 똑바로 알고 있는 것인지 다음과 말씀과 비교해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것이 신약성경의 시작을 알리는 놀라운 선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소경이요 거지에 불과한 바디매오가 이처럼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데 이 세상의 지위나 부귀나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고 있는 올바른 지식이 있다면 그 다음에는 행동입니다. 바디매오는 이와 같은 주님에 관한 정확한 지식으로 엄청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불쌍하게 여겨주소서"라는 부르짖음입니다. 이 때 그는 커다란 저항에 부딪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입을 봉해왔기 때문입니다.

(막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크게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을 똑바로 알고 있다면 삶의 위기의 순간에 그 주님께로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평소에는 주님을 찾는 것처럼, 주님과 함께 하는 것처럼 두 손 들고 찬송하고 큰 소리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다가도 시험과 위기에 빠지게 되면 그 주님을 떠나 사람에게도 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속에서 위로 받기 원하고 해답을 찾기 원하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 사람 그 어디에도 예수님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잘 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은 헛것이요 위기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이와 같은 진리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삶의 위기와 시련 속에서 평소에 함께 하시던 주님으로 인해 힘차게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산 믿음이요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책망을 받았습니다. 조금 전에 주님으로부터 그토록 칭찬을 받고 큰 축복을 받았던 그가 베드로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그는 깊은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베드로의 그 때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6:17-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질투가 날만큼 베드로가 주님의 은총 입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친히 "네가 복이 있도다."는 칭찬을 듣습니다. 그의 이름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엄청난 비전을 받습니다. 천국 열쇠를 받아 쥡니다. 이것 때문에 천주교에서는 베드로가 천국열쇠를 받은 최고의 사도인 줄 알고 전 세계에다 성베드로성당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그의 모습이 어떻게 추락하고 말았습니까?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상상도 못할 무서운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사탄이 되어버렸고 사람도 아닌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형편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입니까? 바로 그의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친히 지적해 주신대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참으로 가슴 뜨끔하게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 어떻게 했는가 보다는 지금에 어떤 생각을 하는가가 그토록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하되 사람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는 육신의 생각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영의 생각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똑부러지게 이미 다음과 같이 선언해 두었습니다.

(롬8:5-6)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도 베드로의 얼굴이 뜨끈뜨끈하도록 무섭게 책망하셨을까요? 바로 그와 같은 어리석은 생각이 사망에 이르고 주님의 거룩한 사역을 가로 막는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주님의 인정을 받고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계속해 가려면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친히 인정해 주시는 영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삶의 출발이 이처럼 생각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차라리 잡다한 생각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자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생각의 기초가 행동의 결과를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히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생을 먼저 살아보고 신앙적으로나 세상적으로 멋진 승리자를 멘토로 모시고 늘 그분들의 지혜와 삶의 경험을 들으며 삶을 알차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판단은 언제나 미숙하고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삶의 길을 주님과 함께 의논하고 지도를 받는다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하자면 무엇보다도 생각 그 자체가 영적인 것이라야 한다는 것! 이것을 오늘 우리들이 분명하게 배운다면 충성한 축복이 될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있었던 일입니다. 연합군 지원병 중에서 독일에 보낼 스파이를 많이 뽑아 훈련을 시켰습니다. 독일식 음식, 군복, 언어, 이름, 생활습관에 대하여 매일 맹훈련을 받습니다. 외모도 완전히 독일 군인일 뿐만 아니라 의식구조마저도 독일화 되어 독일 사람으로 완전히 변했다고 인정될 때 비로소 스파이가 될 자격이 부여된다고 합니다. 그들의 이름은 마이크 스미스가 아니라 프리드리히 한스이고, 고향은 일리노이주 시카고가 아니라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바꿔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이 그렇게 완전히 의식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습니다. 그들은 훈련의 마지막 단계에서 수 십리나 되는 먼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고된 행군을 합니다. 피곤에 지쳐 깊이 잠든 사이에 새벽 두 세 시경 갑자기 낯선 사람이 손전등을 들고 곤히 잠든 훈련병을 깨우면서 "네 이름이 뭐냐?"라고 묻습니다. 그때 "제 이름은 마이크 스미스입니다." 라고 대답하면 그는 실격입니다. 그는 "제 이름은 프리드리히 한스입니다." 라고 엉겁결에라도 독일말로 대답 할 수 있을 때 정식 스파이가 된다고 합니다. 오직 한 가지 사실, 즉 나는 독일 군인이라는 것이 잠재의식에도 깊이 박혔을 때 스파이로서의 교육을 마치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어 어디에서 보아도 크리스챤으로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모든 생각이 집중될 때에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세상의 정과 욕심을 모두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주님만 생각하며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혹독하게 베드로를 책망하신 다음 너무나도 명백한 명령을 제자들에게 다시 던져주셨습니다.

(마16:24-25)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는 한 마디로 "너희들이 죽어야 역사가 일어난다." 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자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감히 주님의 가시는 길마저도 막아섰던 것입니다. 그가 죽지 못하고 생생하게 살아 있었던 모습들은 성경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이것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베드로와 제자들, 그리고 주님께는 인류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변화산상에서 너무나도 멋진 모습에 도취되어 세상으로 내려가지 말고 여기에서 우리끼리 살자고 애걸하였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늘 신자답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나의 유익보다는 이웃의 유익을 구해야 하고 우리 집안의 유익보다는 교회의 유익을 구해야 하며 우리 개인의 유익보다는 하나님의 유익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중심이 되고 육신적인 판단을 하게 되어 결국은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또 다른 실수를 만나보게 됩니다.

(마26:31-35)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여기에서도 우리는 자아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베드로의 호언장담을 보게 됩니다. 그는 다른 동료들을 싸잡아 비하하고 자신만의 당당한 모습을 어필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주님 앞에서 감히 목숨을 걸고 맹세를 합니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잠시 후 그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살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친히 선포해 주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는 말씀을 말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셨을까요? 우리들이 살아서 각자 자신만을 생각하면 결국은 사탄 마귀의 밥이 되어 결국은 영원히 죽음을 맛보게 될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사는 원리가 바로 신앙생활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너무나도 우리 자신이 살아 있습니다. 손해를 볼까봐, 무시를 당할까봐, 자손심이 상할까봐... 그렇게 우리는 죽지 않으려고 온갖 문제를 다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말입니다. 우리들이 죽고 주님이 사시는 그런 멋쟁이들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만물이 무르익어 주인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복된 계절입니다. 우리는 오늘 과연 무엇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된 믿음입니다. 무엇이 제대로 된 믿음입니까? 우리들의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똑바로 아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망한 모든 인류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바른 생각으로 인생도 신앙생활도 계속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평생을 교회에만 다니고 주님으로부터 책망만 받는다면 이 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각이 말을 만들고 말이 행동을 만들고 행동이 축복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늘 반듯한 생각으로 생명과 평안을 축복으로 받아 누리는 그런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지어 주신 십자가를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감당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역사에 남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축복의 달 9월 마지막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로 영광을 돌려드리며 소중한 말씀을 가슴으로 받으시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주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아 누리시는 그런 귀한 심령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5년 9월 2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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