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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0일 주일낮설교 (선교에 올인 하라!)

선교에 올인 하라!

선교주일

1. 10, 2016

本文:사도행전20:17-24

:

 

새해가 되면 모두가 복 많이 받으세요하면서 덕담을 나누는데 진정 어떻게 해야 복을 받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도 그 해답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특별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기독교는 절대 기복신앙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제대로 된 관계를 누리며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거기에 복을 내리시며 보상하십니다. 이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우리 부모님들의 모습과 똑 같습니다. 어느 부모도 자식을 낳아 놓고 그 자식들에게 무관심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힘을 다하여 키우면서 반드시 그 자식들에 대한 기대를 갖고 계십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도 마찬 가지십니다. 우리들을 죄악된 세상에서 불러 독생자 예수님의 보혈을 묻혀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날까지 각양 고귀한 축복으로 우리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며 험한 세상에서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셨습니다. 단순하게 다음과 같은 말씀만 보아도 우리들이 우연히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43:1-4)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신다면 오늘 우리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존귀한 자가 되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놓고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주시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렇게도 분에 넘치는 사랑과 복을 쏟아 부어 주시는 걸까요?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것이 바로 전도와 선교에 대한 명령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면 무조건 하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그 길이 바로 선교에 올인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선교에 올인 하라!

지금 전 세계에 나가 있는 선교사님들은 대략 한 5만 여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오직 일선에서 직접 말씀을 선포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는 2만 여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세에서 이단이라고 일컬음 받고 있는 몰몬교는 전 세계에서 직접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선교사가 5만 여명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고 이쁘고 유능한 자들의 자원봉사를 통해서 하고 있다고 하니 가히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그렇게 해외에 나가서 복음을 2-3년 전하고 와야 정직 맴버쉽을 가진다고 하니 선교가 교인의 의무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회복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받기를 원한다면 오늘 주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시기 직전 남겨 두신 마지막 명령을 깊이 가슴에 새겨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진짜 신자가 되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의 뜻은 누가 뭐래도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와 선교는 교회의 하나의 행사나 표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모두가 이렇게도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함께 그 길을 오늘 본문 속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견딜 줄 아는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전도나 선교는 그 목적이 하나님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고 건져내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도의 훈련된 정신과 믿음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일과 확연히 구별되는 신령한 영적인 무장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20:17-19)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사도 바울이 친히 장로들을 불러 놓고 강조하는바 선교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과 눈물 그리고 끝까지 참고 주님을 섬기는 믿음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도 아닌 같은 동족들로부터 숱하게도 많은 고통과 시험을 당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그들에게 배신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잡아 죽이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하고 바울을 죽여 없애버리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기로 결의까지 하고 바울을 추격하였습니다.

(23:12-13)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 여 명이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겪어야 할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들과 맞대응하지 아니하고 참고 견디며 눈물로 기도하며 겸손히 그 모든 짐을 묵묵히 지고 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만 세상에 전하려고 하면 바로 이와 같은 정신과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들과도 등을 지거나 원수가 되어서는 사랑의 주님을 결코 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바로 이와 같은 정신무장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을 시험에 빠뜨리고 믿음에서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사도 바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뿐만 아니라 사업장과 직장을 막론하고 그 어디에서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하나 되어 있는 가정에서도 있습니다.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는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마지막 때에 단단히 무장하고 준비하여 그 어떤 시험에서도 이겨 낼 수 있는 영적 무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들의 영적인 무장은 너무나도 허술하고 초라합니다.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그런 작고 시시한 문제들로 너무나 쉽게 넘어지고 자빠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애틀 지역에 이처럼 사람에게 부딪히고 시험에 들고 넘어진 사람들이 부지기수임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선교는 고사하고 자신의 믿음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초라한 낙오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고 원수라도 품고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통 큰 영적인 준비가 없이는 결단코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복음을 전하는 고귀한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주님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참아야 합니다.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것만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승리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단도직입적으로 참고 견디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복이 된다고 선포해 두었던 것입니다.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우리교회의 초대 선교사님이었던 김진봉, 정순영선교사님들의 선교사역은 한 마디로 인내하고 참는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도 무덥고 후진 서부 기니의 선교현장은 한 마디로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무슬림들이라 기독교로 개종하기만 하면 가족과 동네 사람들이 다 함께 달려들어 돌로 쳐 죽이는 그런 악 조건하에서 무려 8년 동안 복음을 전했는데 오직 열매는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하나를 붙들고 훈련하고 가르치고 변화시켜서 무슬림들을 전도하는 목회자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는 결코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 개인 가정 사정이라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차마 입에도 담을 수 없는 그런 숱한 고통과 모욕과 멸시를 다 당하면서도 열매 없는 그곳에서 그처럼 신음하며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현장을 보고 듣고 나서는 과연 선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리는 사실을 재삼 깨닫고 느꼈습니다. 오래 참고 견딤으로서만 만들어 낼 수 있는 영혼 구원, 선교는 바로 그와 같은 정신과 믿음으로만 열매가 맺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과 교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일은 재간이 있고 돈이 있고 기술이 있으면 누구나 감당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을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이 종은 이미 지난 주일에 예배에 올인 하려면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 드린 바가 있습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는 사람의 능력이나 재간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선교는 100%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가능합니다. 일생을 선교에 헌신한 사도 바울은 당대에 가장 공부를 많이 한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백그라운드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빼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사도 바울은 그러한 배경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그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20:22-23)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는 말씀은 한결 같이 그가 자의로 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목표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과 교통했던 그는 그의 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뜻을 접고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음에도 없었던 마게도니아 쪽으로 선교지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16:6-10)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은 선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반드시 배워야 하고 또한 실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들에게도 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목 하에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교단이요 대표적인 모 교단에서 오래전 하이티에서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이재민이 생겼을 때 범 교단적으로 수억 원의 구호금을 모아 하이티에 갖다 준다고 갔었는데 그것을 중간에서 다 떼어먹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교단이 발칵 뒤집힌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인본적인 가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바로 이와 같은 끔찍한 일을 만들어 놓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앞서 배운 시험에 들 수밖에 없는 형제들의 그릇된 공격이나 질투나 시기를 받는 한이 있어도 성령님이 친히 아시고 해결해 주실 줄 믿고 참아야 하며 아무리 우리들의 뜻과 방향에 어긋나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며 부르시면 기꺼이 순종하여 우리들의 목적과 뜻을 바꿀 수 있는 과감한 영적 교감을 하나님과 함께 나눌 줄 아는 그런 신령한 영적 능력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다니고 있던 주홍종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만 그가 중병에 걸려 서울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병원에서도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권고 퇴원을 시켰습니다. 스스로 요양하면서 온갖 방법이란 방법을 다 쓰던 중 도움을 얻지 못하고 서양종교로만 알고 있었던 기독교에 대해 듣게 되고 그로 인해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모든 죄와 교만과 허물을 고백하고 철저하게 회개한 후 거짓말 같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주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헌신하고 의사가 된 다음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아르메니아 등 주로 이슬람 국가들을 상대로 선교하는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 좋은 학벌, 그 좋은 직업, 그 많은 수입과 명예를 다 버리고 이렇게 오지를 돌며 헌신하면서 그가 고백한 놀라운 사실 하나가 오늘 우리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이 전도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 청년에게도 기독교인 친구들이 있었는데 자신에게 그 좋은 예수님을 함께 믿어보자고 전도한 친구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뜨거운 성령 체험을 못했기 때문이요 그 엄청난 능력의 성령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충만히 받았다면 결코 그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은 그 어떤 입도 열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를 논하기 전에 가장 우리 성도들이 사모해야 할 일은 이와 같은 능력의 성령님을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2016년의 복된 한 해는 이처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능력 있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숨을 내 놓을 만큼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유행가 가수 태진아는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로 대 힛트를 쳤습니다. 참으로 선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성령님의 충만과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선교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생을 다 바쳐서 감당했던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들의 가슴이 떨릴 정도의 고귀한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자신이 개척하고 사랑했던 에베소교회의 모든 장로들을 불러 놓고 자신의 앞으로의 행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일사각오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를 사랑하는 모든 장로들이 한결 같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사도 바울의 발을 붙잡고 눈물로 말렸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일사각오가 너무나도 분명하고 흔들림이 없는 줄 알고 눈물로 바울을 배웅해 주는 가슴 아픈 모습들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20:37-38)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이요 우리들이 이 시대에 당연히 감당해야 할 일인 선교를 위해서는 그 어떤 인정이나 사랑이나 눈물이 앞을 가로 막아도 끝까지 굽힘이 없이 감당해 나갔던 가슴 뭉클한 모습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요 사람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고려신학대학은 고 한상동목사님께서 남도 부산에서 순교할 수 일꾼들을 만들어 내겠다는 일념으로 세운 신학교입니다. 한상동목사님은 1945818일에 처형시키기로 결정 되어 있었던 죄수였습니다. 당시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두려움 없이 성도들을 처형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1945815일 대한민국이 해방되게 하시므로 살려내셨습니다. 처형 3일을 앞두고 해방과 함께 석방된 한상동목사님은 그 어떤 악의 세력 앞에서도 꿋꿋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순교할지언정 타협하지 아니하는 지도자를 만들어 내겠다는 일념으로 고려신학대학을 설립하시고 수많은 인재들을 훈련시켜 내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죽겠다고 한다고 죽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헌신하는 종들은 살려내시고 자기를 위해 살겠다는 사람은 죽는 비현실적인 역사가 우리 기독교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처럼 주님을 위해 사도 바울과 같이 거룩한 순교의 제물이 되겠다는 일사각오로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6년도 선교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많은 축복과 은혜를 아낌 없이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그 모든 축복에는 우리들이 마땅히 감당해야만 하는 사명이 함께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와 전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면 하나 뿐인 생명이라도 기꺼이 내어 놓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의로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는 것이라고 그 모범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고도의 영적인 훈련인 겸손과 눈물과 인내로 자신을 단련하였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일인들 그냥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하늘의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준비 없이, 또한 성령님의 도움 없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연약한 우리들이지만 성령님의 강력한 능력을 받으면 우리 또한 능히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를 위해 올 한 해도 우리 모두 열정을 가지고 믿음으로 무장하여 일사각오의 비장한 희생으로 오로지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이기에 우리들도 힘써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6110

주일 낮 선교주일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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