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7일 주일낮설교 (하나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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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17 January 2016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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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위하여!
1. 17, 2016
本文:창세기12:1-9
說敎:崔 仁 根 牧 師
이 시대는 누구를 위하여 희생한다거나 손해를 본다는 개념이 거의 없어진 참으로 서글픈 시대입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철저하게 이기화 된 그런 세상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놓고 우리들을 구원하셨다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상식 밖의 어리석은 먼 나라의 이야기쯤으로 치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는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그와 같은 희생적인 삶에는 공감조차 하지 못한 채 육신에 젖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교생활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면서 사사로운 자신의 형편을 핑계 대지 아니하고 묵묵히 손해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긴 사람도 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친히 “나의 벗”이라고 하셨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사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축복을 더 없이 많이 받아 누렸던 인물이었습니다.
(창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이 엄청난 말씀을 받은 사람은 전무후무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처럼 그는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하나님의 축복을 엄청 많이 받아 누렸습니다.
(창22:16-18)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그는 그 누구도 감히 삼상도 할 수 없는 축복을 받아 누렸습니다. 그 많은 축복 중에서도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 모두가 반드시 받아야 할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부모들은 자식으로 인해 일생을 희생한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식들이 잘되고 또한 그 자식들로 인해 오고 오는 시대에 복이 임하게 된다면 그 보다 더 값지고 보람된 삶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아브라함은 원래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갔던 이방의 우상장사의 아들이었습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와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그릇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를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선택하시고 친히 불러내셨습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당시는 요즘과 달리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이었고 온 가족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았던 씨족사회였습니다. 이는 그와 같은 환경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다는 것을 방증하는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차 없이 명령하십니다. “그와 같은 부모와 친척과 본토를 떠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는 한 마디 반구도 없이 순종하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75세였다고 기록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나 지금이나 이 나이는 고령에 속했고 그렇게 쉽게 부모와 전토와 친척을 떠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지 할 자식도 하나 없는 외로운 상황에서 조카 롯 하나를 데리고 갈 바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매우 귀하게 여기시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풍성한 축복을 아낌없이 쏟아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무조건 아브라함처럼 순종할 줄 아는 그런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고 말입니다.
성도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게 신자가 되고 성도가 되고 직분자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거의 모든 성도들이 교회에는 다니면서도, 그러다가 저마다 직분은 받았으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마치 고급 스테이크를 즐겨 먹으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는 모르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들에게 값진 스테이크를 제공하는 소는 푸른 들판에서 풀을 뜯어먹고 사는 짐승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흔한 풀을 뜯어 먹고 사는 소가 그처럼 붉고 값진 스테이크를 만들어 내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에는 다니면서도 어떻게 자신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어떻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직분까지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을 위하여 인생을 살아드리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 놀라운 축복을 그림의 떡처럼 바라보기만 할 뿐 받아 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이라는 놀라운 책을 지으시고 우리들에게 주셔서 읽고 듣고 깨달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한 번 더 우리들이 어떻게 신자가 되었고 성도가 되었으며 직분자가 되었는지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슴을 열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배워서 아브라함과 같이 축복을 받아 누리고 후손들에게도 유산하는 그런 멋진 심령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롬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엡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 말씀들을 조용히 묵상해 보신다면 오늘 우리들이 어떻게 해서 이처럼 성도가 되고 신자가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을 선택해 두셨다가 때가 되매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듯 우리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들을 예수님을 믿게 하셔서 의롭다고 구별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 더 배워야 할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고 시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우리들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지혜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임하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우리들이 오늘과 같이 성도가 되고 신자가 되며 또한 고귀한 하나님의 직분을 받게 된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들의 공로는 전혀 개입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위대한 사도 바울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입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오늘 우리들을 신자로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아주신 것은 오직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께 무한 감사를 드리며 찬송으로 영광을 올려드리고 예배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도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신자들이 되고 성도들이 된 우리들은 누가 뭐래도 이미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비록 우리들이 남들처럼 학, 박사가 될 만큼 많이 배우지 못하고 재벌이라 일컬음 받을 만큼 많은 재물은 가지지 못했지만 그들보다 조금도 못지 않는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선택해 놓으시고 때가 되매 친히 부르시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시어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엡1:3-4)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축복을 그냥 세상의 복과 비교할 수도 없기에 그는 “신령한 복”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누리는 복은 세상의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신령한 복입니다. 이 땅에서도 누리고 천국에서도 누릴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원한다고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니기 때문에 신령한 복이 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아직 천국이 어떠한지 그곳에서 살다 온 사람을 우리는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설사 그렇게 살고 왔다고 해도 우리는 또한 믿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도 참으로 값지고 귀하지만 잠시 뿐입니다. 반드시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돈 병철이라고 불렀던 대한민국 재벌의 신화를 만들어 놓았던 이병철씨도 벌써 고인이 되어버렸고 세계의 부자요 기업가로 알려졌던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이미 고인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이 죽고 나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그 다음에 천국에서 영원복락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 땅에서 잠시 누리는 그 무엇이 그렇게도 소중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구원 받고 성도가 되고 죽어서도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이것보다 더 값지고 귀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와 신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바로 이와 같은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리게 되니 이것이 바로 가장 값지고 고귀한 축복인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우리들이 받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놀라운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요 성도된 우리들의 마땅한 도리인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특이한 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틈만 나면 곳곳에 단을 쌓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창12:7-9)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당시는 오늘 우리들과 같이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그런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그런 환경이나 건물이나 시설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려면 제물을 드릴 수 있는 번제단을 스스로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단을 쌓았다는 말은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당시 예물은 화폐가 없었기 때문에 제단에 흠 없는 양이나 염소나 소를 잡아 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부르시고 자신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께 이처럼 틈만 나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밝히 보는 바와 같이 그가 단을 쌓았던 것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서였습니다. 위에 인용한 밑줄 친 말씀을 유심히 보시면 단을 쌓았다는 말씀 앞에 동일하게 나타나는 공통된 말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를 위하여!”라는 말씀입니다.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위하여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자신의 입장을 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던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렸던 사람도 바로 이와 같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창14:17-20)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매 나이 100살에 얻었던 고귀한 아들 이삭도 아낌없이 갖다 바쳤습니다(창22창).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그 엄청난 축복을 아니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오로지 “하나님을 위하여!” 그는 존재하고 살았고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을 아브라함은 이렇게 순종하므로 되갚아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기뻐하시고 명령 하시는 바 예배에 올인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는 온 마음과 정성과 예물을 다 준비하고 예배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받고 복 받고 구원 받은 성도들의 마땅한 의무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은혜와 사랑에 화답하며 한 생명이라도 기꺼이 내어 놓았던 한 여인의 가슴 따가운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선교지로 가는 도중에 여자의 비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가까이 가보니 아들이 노예로 끌려가는 것을 가로막고 엄마가 애원하고 있었습니다. "주인님, 저도 아들과 함께 사 주십시오. 저희 모자가 함께 가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뿌리치며 아들만 끌고 가려하고 엄마는 필사적으로 그를 막고 있었습니다. 한 번 헤어지면 생전에 만나기 힘든 게 노예인생이기에 너무나 처절하게 우는 모자를 보다 못한 선교사가 가진 선교비를 다 털어 노예상인에게 주고 그 두 모자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모자가 부지런히 선교사의 일을 도우며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 날, 밭일을 하던 선교사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넘어졌습니다. 엄마 노예가 뛰어가 보니 실신한 선교사 뒤꿈치에 독사의 이빨 자국이 나 있었습니다. 엄마 노예는 허겁지겁 발뒤꿈치에 입을 대고 독을 빨아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죽어가다가 다시 살아난 선교사가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독기를 입으로 빨아내던 엄마 노예가 얼굴이 퉁퉁 부어 죽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노예 엄마는 주인 선교사님이 자신들의 모자를 노예상으로부터 구원해 준 사랑을 이렇게 한 목숨을 다 바쳐 보답하였던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진정 바로 된 사람이라면 이렇게 받은 은혜와 사랑을 보답할 줄 아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면서 살아간 고귀한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선물로 받은 우리들, 우리들도 이제는 온갖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오늘까지 우리들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하겠습니다. 그 무엇인가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복된 2016년 새해를 맞은지도 벌써 석주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빠른 시간을 어영부영 다 보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우리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힘차게 예배자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무런 공로 없는 우리들을 죄악된 세상에서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온갖 축복을 다 주시며 오늘날까지 인도해 주시는 너무나도 소중한 우리들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받은바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는 삶은 지극히 인격적인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하물며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과 축복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결코 신자와 성도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시편 기자와 같이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는 거룩한 부담을 안고 열심히 은혜 갚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전무후무한 축복을 받았던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응답하여 순종하였고 하나님께서 아들이라도 달라시면 미련 없이 그 아들을 드렸기 때문에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새해를 맞아 축복이 당연히 오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에 화답하며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을 맛볼 수 있도록 영적으로 인격으로 거듭하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복된 예배로 이처럼 고귀한 하나님의 사랑에 화답하며 하나님도 기쁘시게 섬기고 우리들도 복을 누리는 그런 멋진 한 해가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6년 1월 1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