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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2년 3월 4일 주일 설교 (내게로 오라!)

2012년 3월 4일 주일 설교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라!

 

2. 26, 2012

本文:마태복음11:25-30

說敎:崔仁根牧 師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합천 해인사에 가면 세계적인 명물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일제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38년 동안이나 정복하고 있으면서 그 팔만대장경을 자기 나라로 가지고 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어도 결국은 그것을 가지고 가지 못했다는 국가적인 보물입니다. 그런데 그 팔만대장경 라마가경 38장 8절에 예수님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똑똑히 다음과 같은 글귀가 들어 있습니다.

[荷蒔爺蘇來 吾道之油無燈也-하시야소래 오도지유무등야] 이를 번역하면 “언젠가 예수님이 오시면 나의 깨달은 도는 기름 없는 등과 같도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불교의 대표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 속에 이처럼 예수님에 관한 구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실로 우리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결국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고통을 無明(무명) 즉 무지함 때문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래서 그 무지함을 없이하기 위해 도를 닦고 깨달아야만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고통을 범죄로 단정하고 그 죄를 해결해야만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불교도들의 최고의 경전인 팔만대장경에서 “언젠가 예수님이 오시면 내가 깨달은 도는 기름 없는 등과 같도다”고 탄식하고 있으니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오직 우리 주님 예수님뿐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는 말도 유심히 살펴보면 묘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수고”는 능동태로 기록되어져 있어 우리들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받는 고통을 뜻하고 있고, “무거운 짐”은 수동태로 되어 있어 남이 나에게 지워주는 것임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스스로 진 수고와 남이 지운 무거운 짐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고 그 고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도 영구적으로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문장의 “분사”를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의 문법에서 동사가 분사로 사용되는 경우는 이처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것을 나타낼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원어적 문법이나 어휘로 볼 때 죄로 타락한 인간의 상태가 과연 어떠한지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주님은 단호하면서도 사랑이 가득한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게로 오라!”고 말입니다. 계절은 겨울을 지나 봄으로 들어섰건만 그래서 3월의 첫 주일을 맞았건만 우리들의 삶의 현실은 여전히 겨울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고새면 개스값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고 사업장의 매상은 오히려 뒷걸음질 하고 있고 직장에서의 해고(Lay off)의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들에게 오늘 조용히 사랑 많으신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부르십니다. “내게로 오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이처럼 부르시는 우리 주님의 부르심을 중심으로 이 힘든 시기의 돌파구를 찾아보고 진정한 위로와 삶의 해답을 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용히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주님을 만나 신선하고도 소망 넘치는 삶의 새로운 역사를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게로 오라!

 

지금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으로 초청을 하고 계십니다. 과연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 은혜와 소망의 강으로 당당하게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부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 라

 

이 세상에서 이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따뜻한 사랑과 엄청난 능력으로 우리들을 부르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들에게는 그럴만한 능력도 그만한 사랑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그 누가 감히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처럼 이렇게 과감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한 문장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어마어마한 진리가 그 속에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생들의 삶이란 수고와 무거운 짐으로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지만물을 만드신 엄청난 능력을 가지신 우리 주님께서 그것을 다 아시고 따뜻한 사랑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부르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참된 쉼을 주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인지? 그리고 그 말씀처럼 우리들의 그 엄청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분이신지? 함께 공부하면서 오늘 말씀의 결론을 얻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의 귀를 열고 겸손한 자세로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십시다.

 

우리 인생들의 현주소

 

파란만장한 한 평생을 살아왔지만 그 삶이 헛되지 않아 이스라엘 민족과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는 모세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악한 시대를 기적적으로 살아나 왕궁에서 자라날 수 있는 특혜를 입었었고 40년이란 놀라운 세월 동안 왕궁에서 세상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교육과 무예를 익히며 잘 준비되었으나 겸손의 옷을 입지 못한 탓에 광야로 쫓겨나 또 다른 40년을 초야에 묻혀 겸손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그는 나이 80이 넘어서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40여년을 하나님의 손발이 되어 충성하였습니다. 그가 인생을 마무리 하는 생의 끝자락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인생을 정리해 놓았습니다.

 

시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 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고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인생의 평균 수명이 칠십이요 팔십이나 그 세월은 수고와 슬픔뿐이고 그나마도 빨리 지나가고 만다는 뜻입니다. 이 보다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인생에 대한 결론은 없을 듯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그렇게 수고와 슬픔 속에서 신속하게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우리 주님께서 이제 말씀하십니다.

 

마11: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 라

 

고 말입니다. 어쩌면 모세가 내려놓은 정의와 우리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도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대한 최종 결론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입니다. 우리교회에서 70이 넘으신 분들만 우선 생각해 보십시다. 다들 젊은 나이에 미국에 대한 푸른 꿈을 안고 이민을 왔습니다. 하지만 미국생활의 현실은 자고새고 온 몸이 부셔지도록 일을 해야만 하는 현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눈으로 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우리교회 윤장로님이나 이영권사님 같은 분들만 보아도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30여년을 함께 하나님을 섬겨오고 그분들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아이들을 키우고 일을 하던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은퇴하고 일은 하지 않지만 또 다시 자손들의 뒷바라지로 허리가 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임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먹고 살고 자식들을 뒷바라지해야 하니 원하든 원치 않든 수고해야 했었고 늙어서는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그로 말미암는 후유증으로 온 몸이 아프고 온 마음이 상하여 원치 않는 무거운 짐을 또다시 져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삶에 눌린 우리들에게 예수님이라도 안 계셨다면 우리는 그 얼마나 허무하고 억울하고 답답하겠습니까?

 

아서 골든이라는 크리스챤 작가가 있었습니다. 한 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갖 좋은 글을 쓰며 많은 호평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고 온 몸이 원하는 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게 되자 그는 점점 무력감과 절망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인생이 허무해지고 의미가 없어져 그만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 자살을 결심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절친했던 친구를 찾아갑니다. 그 친구만은 꼭 죽기 전에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 친구는 의사요 특별히 정신과 전문의였습니다. 친구는 이렇게 좌절하고 있는 작가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자네가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것이 무엇이었나?”, “어릴 때 고향 바닷가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해맑은 갈매기 소리를 듣는 것이었지.” 의사 친구는 다음 날 10시에 다시 만나자고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다음 날 의사 친구는 꼼꼼하게 적은 처방전 4개를 친구에게 주면서, “자네는 지금 자네가 어릴 때 자라났던 그 고향 바닷가로 가게. 거기에 가거든, 여기에 기록된 순서대로 꼭 따라서 해 보게나.” 하고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친구 의사가 지어 준 처방전을 고향 바닷가에서 순서대로 4개를 다 읽어보았습니다. 그 처방전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순서대로 기록되어져 있었습니다. 첫 번째 처방전은, ‘네가 좋아하던 바닷가에서 꼼짝도 하지 말고 2시간 동안 파도소리를 들으며 갈매기 소기를 들으며 조용히 앉아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 처방전을 펴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두 시간이 지난 후에 두 번째 처방전을 펴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지금 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 올려보라.”고 했습니다. 조용히 지나 온 인생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비디오의 슬로 모션처럼 되돌아보니 자살까지 결심했던 지금의 그였지만 제법 많은 시간들이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들로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세 번째 처방전을 뜯어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지금까지 인생을 무슨 목적으로 왜 살아 왔는지 생각해 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시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을 통하여 위로와 소망을 받아야 한다고 책도 썼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니 그곳에는 정작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으로만 글을 썼고 자신의 생각으로만 하나님을 믿었지 믿음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은 정작 자신의 가슴 속에 없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참으로 충격을 받았고 참으로 놀랐습니다. 평생토록 크리스챤 작가로서 하나님이란 말을 수 천 수 만 번도 더 썼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가슴에 그 하나님을 모시지는 못했다는 사실에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네 번째 처방전을 열었습니다. “이제 자네는 회개를 해야 하는 차례네. 지난 세월 하나님을 진심으로 모시고 섬기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하네.” 그는 뭉클하게 가슴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향의 바닷가 모래 위에다 손가락으로 하나씩 죄를 써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끝도 없이 길고도 많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아무도 없는 바닷가 모래 위에 자신의 죄를 써 나갔습니다. 그러다 문득 허리를 펴고 그 모든 죄악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 때 민물로 밀려든 파도가 그 모든 죄악들을 덮치고 지나갔습니다. 순식간에 모든 죄악이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아서 골든은 電光石火(전광석화)처럼 스치는 영감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피가 저렇게도 많던 내 죄를 순식간에 거두어 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바닷가에 엎드려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가슴이 시원하게 바닷가 수평선처럼 트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치유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그는 조용히 다시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인들이 즐겨 읽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너무나도 허무하고 너무나도 무겁고 너무나도 수고와 슬픔에 눌려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 주님의 그 따뜻한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면 아서 골든과 같이 새롭게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넉넉하게 멋들어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서 골든처럼 낙심하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부르시는 것입니다. “내게로 오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사랑으로 다가 오십니다

 

우리는 어릴 때 형으로부터 맞았을 때나 동네 친구들로부터 아픔을 당하였을 때 어떻게 아셨는지 어머니께서 나타나시어 어루만져 주시고 형이나 동네 친구들을 혼내주시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그렇게 나를 감싸고 나를 때린 자들을 혼내주실 때 왜 그렇게 서러운지... 그래서 어머니의 품에 안겨 더욱 크게 울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넉넉한 어머니의 사랑 앞에서 서러움이 북받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들에게도, 이 세상에서 나 혼자서만 힘들고 외롭고 고통스럽다고 느끼며 낙심하고 좌절할 그 때에 우리 주님께서 조용히 나타나주시고 우리들의 형편을 이해해 주신다면 얼마나 위로가 되고 또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우리들의 수고와 우리들의 무거운 짐을 이해나 해 주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수고스럽고 무거운 짐으로 눌려 있는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이와 같은 주님을 떠나 혼자서 방황하거나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수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 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고 사랑해 주셔도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방송국에서 아무리 좋은 프로를 내 보내도 TV나 라디오를 틀지 않으면 아무소용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정하게 다가오시며 우리들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내려 주겠노라는 우리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화답하며 우리 모든 무거운 짐들을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그렇게만 하면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마가복음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이요 그러므로 인해 평생을 거지로 비참하게 살아가던 진짜 수고와 무거운 짐에 짓눌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 지역으로 지나가신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느 쪽인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주님께서 지나가신다는 그 절호의 기회를 그는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가장 먼저 사랑을 베풀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제자들이 제지하고 가로막았습니다. “시끄럽다. 조용하지 못해.”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그 사람을 이리로 데리고 오너라.” 하시고 그를 데리고 오자, 그에게 친히 물어 보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소경은 망설임 없이 외쳤습니다. “주님,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즉석에서 그의 무거운 짐을 다 내려주셨습니다. 깨끗하게 치료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찾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다음과 같이 명명백백 기록 되어져 있습니다.

 

막10:46-52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 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 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 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 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 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 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 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 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이처럼 누구든지 우리 주님을 찾고 부르기만 하면 우리들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서 능히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행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들에게 진정한 쉼을 주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고비를 넘어가면서 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능히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

 

이 말씀 중에 특별히 밑줄 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을 한번 묵상해 보신다면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생명과 쉼을 주시기 위해 우리 하나님은 이미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감래하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이 놀라운 은총은 그저 어쩌다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 하나님은 그 보다 훨씬 더 무서운 고통과 희생을 이미도 감래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을 키우는 우리 부모들이 모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과 희생을 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이 한 마디 말씀 속에는 우리들을 쉬게 하시려고 먼저 당하신 우리 주님의 희생과 사랑이 숨어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다리-Bridge]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단란하고 행복하게 아들과 함께 가족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가장이 있었습니다. 그 가장은 긴 다리를 관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다리 밑으로는 배가 지나가고 그 다리 위로는 기차가 지나가는데 배가 지나기 위해서는 그 다리를 들어주어야 합니다. 어느 날도 평상시와 같이 그 다리를 움직이는 작업을 하기 위해 주인공 남자는 아들과 함께 다리로 갔습니다. 다리 근처에서 아들에게 낚시를 시켜 놓고 자신은 그 다리 밑을 지나가기 원하는 배를 보내 주려고 다리를 들어 주었습니다. 그 때 다리가 들려 있다는 빨간 신호를 미처 보지 못한 채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기차에는 수많은 젊은이 늙은이 학생 아이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 광경을 본 아들이 아버지를 부르며 달려 왔습니다. 아버지는 마침 기계실에 들어가 있었고 소음으로 인해 아들의 소리나 기차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다급한 어린 아들이 다리를 내리기 위해 달려갔다가 그만 다리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아이는 다리 사이에 끼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발견한 아버지는 아연질색 하였습니다. 아들은 다리 밑으로 떨어져 다리 사이에 끼어 있고 영문도 모르는 기차는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생각 할 겨를도 없이 그는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다리를 내리면 아들이 죽고 다리를 내리지 않으면 기차의 모든 승객들이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른 채 기차는 다리를 향하여 거세게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주인공 아버지는 결국 아들을 희생시키고 다리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기차는 무사히 지나갔지만 다리 사이에 끼었던 아들은 비참하게 피를 흘리며 죽고 말았습니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만 누군가의 소중한 생명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통해서만 누군가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 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누리는 평안은 결코 저절로 된 것이 아니며 오늘 우리들이 누리는 쉼은 결코 그냥 찾아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그렇게도 소중한 생명을 내어 놓으시고 그렇게도 무서운 고난을 몸소 겪으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이처럼 진정한 생명을 안고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잊지 않고 그 사랑 주신 하나님께 예배와 헌신으로 화답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덧 봄을 여는 3월이 왔습니다. 봄이 온다고 만사가 다 형통하고 저절로 따뜻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을 짓누르고 있는 수고와 무거운 짐이 내려져야만 진정한 평안과 쉼이 있는 멋진 봄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처럼 무거운 삶의 수고와 짐을 우리 스스로는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좋으신 우리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축복의 말씀이요, 축복의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우리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의 그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기 위해 우리 주님은 우리보다 천 배 만 배 더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까지 가셨던 분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주님과 함께 우리들의 인생 여정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우리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렇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과 함께 동행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사람이 되고 주님은 우리들의 구원자로 만나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된 3월 첫 주일에 온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와 같은주님의 사랑으로 신선하고도 복이 넘치는 새로운 삶을 출발하게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2년 3월 4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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