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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6년 2월 21일 주일낮설교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2016년 2월 21일 주일낮설교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2. 21, 2016

本文:누가복음12:36-48

: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애틀에서 북쪽에 있는 캐나다의 빅토리아 섬은 참으로 아름다운 관광도시로 잘 개발되어 있습니다. 그 섬에서도 부쳐스 가든은 환상적인 꽃 정원으로 100년이 훨씬 넘는 전통을 가진 세계적인 명소입니다. 그곳은 바로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왕궁 정원을 재현해 놓은 곳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믿음이 좋고 덕이 많아 영국인들의 추앙을 받았던 여왕이었습니다. 그녀는 종종 왕궁을 빠져 나와 사복차림으로 서민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왕으로 유명했습니다. 어느 날도 그렇게 한 과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그 과부가 신앙심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서 자연스럽게 신앙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여왕이 그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가장 고귀한 손님은 누구였습니까?”하고 말입니다. 여왕은 당연히 그녀가 예수님이시지요.”라고 대답할 줄 알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이라고 대답하면 자신도 저도 그렇습니다.”라고 할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전혀 뜻밖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저에게 있어 가장 존귀하신 손님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빅토리아 여왕 폐하이십니다. 제 생애에서 최고의 손님이십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실망한 여왕은 예수님이 아주머니를 찾아 주신 최고의 손님이 아니십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폐하, 예수님은 결코 저에게 손님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제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집에 처음부터 계신 주인이셨습니다. 저는 그 예수님 때문에 존재하는 겁니다.”

참으로 두고두고 생각해 볼만 한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예배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가는지요? 그 분이 우리들의 주인이신지? 아니면 소님이신지? 오늘 우리 함께 가슴으로 한 번 생각해 보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져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경 속에 각개오라는 사람은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 낙인이 찍혀 사람다운 대접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채 살아갔지만 뜻밖의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다음부터는 삶의 방향이 180도 달라져서 자신의 재산을 절반으로 쪼개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남에게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아 주겠다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는가에 따라 삶이 이렇게도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누구를 우리들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지? 이즈음에 한 번 생각해 보고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비인격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든, 절친이든, 더 나아가서 부모님일지라도 가차 없이 내치는 매우 무서운 세상으로 변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나의 중요한 명령을 주시고 계십니다.

(12: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고 말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의 주인이시고 우리들은 그 주님의 종이 된 그런 삶을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이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몇이나 있을까요? 주님은커녕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이나 복된 길로 가라고 가르쳐 주시는 스승님까지도 배신하고 있는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우리 주님의 엄중하신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우리들의 남은 삶에 진정한 주인이 누구신지? 바른 진리를 통해 깊은 깨달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돈을 주인으로 삼은 사람들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대는 누가 뭐라고 해도 말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말세에 나타나는 징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딤후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말씀은 거의 2천 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도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실과 딱 맞아떨어지는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또한 돈을 사랑합니다. 상대적으로 이웃과 부모형제는 안중에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한국에서 이와 같은 사건이 하나 발생하였습니다. 홀로 사는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아들 내외가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상해보험을 들어 놓은 것을 알고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고의로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반신을 못 쓰게 되었다고 속이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보험금을 타려고 보험회사에 갔습니다. 그런데 보험을 아버지가 들어 놓았고 보험금 수령도 아버지 이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보험을 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험액아 자그마치 60만 불이나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들과 며느리는 아버지 몰래 아버지의 집을 팔고 그 돈을 챙겨서 도망을 갔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보험금을 타서 살면 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보험금을 타러 갔더니 보험 회사에서 보험금을 600만원만 줍니다. 6억이나 되는 보험금을 왜 이것 밖에 안 주냐고 따졌더니 아들은 하반신 불수가 아니라 다리 골절상이기 때문에 이것 밖에 못준다는 것입니다. 그 때서야 아들이 주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집을 팔고 도망간 아들과 며느리를 고발하여 경찰이 그들을 잡아왔습니다. 이것이 오늘 돈과 자신만을 사랑하는 삶의 모습임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진리 하나를 가르쳐 주십니다.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을 사랑하다가 폐가망신 한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겠습니까? 대한민국에서는 온통 이 돈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고상한 직장을 잃고 감옥으로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대학교수가 연구비를 떼어 먹고 공무원이 나라의 돈을 도적질하고 나라를 지키는 참모총장까지도 돈을 받아먹고 감옥으로 가는 현실이 우리 앞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돈을 주인으로 삼고 그 돈을 사랑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임을 오늘 우리들이 분명하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기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하며 고달프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비록 힘들고 어렵기는 해도 열심히 일하고 땀 흘려서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자랑스런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너무 돈에 인색한 나머지 하나님과 이웃들과의 관계를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힘들게 돈을 벌다 보니 너무 돈이 고귀하여서 그러한 인색함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이란 그렇게 해서 모아지고 쌓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컨트롤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이에 관한 좋은 실례가 될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그리스도인 작가인 [빙점]의 저자 삼포능자 여사가 있습니다. 그는 구멍가게를 했는데 장사가 너무너무 잘 되서 물건을 트럭으로 떼 와야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퇴근해 들어와서 "여보, 우리 가게가 너무 잘되어 이웃 가게들이 문을 닫으면 어떻게 하겠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어긋나는 생활이요"라고 말하자 이에 자극을 받고 그 다음부터 일부러 상품을 다 갖추지 않고 손님이 오면 이웃가게로 보내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소설 을 써서 현상모집에 내 놓았습니다. 그것이 당선이 되어 가게에서 번 돈보다 몇 백배나 더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소설이 바로 [빙점]입니다. 돈은 사랑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주셔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을 주인으로 삼은 사람들

이 땅에는 의외로 사람을 주인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146:3-4)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사람들은 거의가 다 자기 중심적이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을 주인으로 삼고 인생을 살아간다면 평생 어리석은 삶을 살고 말 것입니다. 사람은 다 변하기 마련이고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을 주인으로 삼고 희생한다면 한 번 뿐인 소중한 삶을 그릇되게 망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북녘 땅을 바라본다면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김정은과 북한 집단의 리더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합니다. 천문학적인 외화벌이를 하면서 전개하던 금강산 관광을 위해 북녘 땅을 밟은 한국 여성을 총으로 쏘아 죽임으로 중단된 배경만 보아도 그렇고 개성공단이라는 허울 좋은 남북 공동구역을 통해서 막대한 돈을 벌어 그것으로 원자폭탄을 만들고 미사엘을 만들어 쏘아대고 있는 것 또한 정상적인 통상관계를 아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전 세계에 주민들을 파견하여 소위 외화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 수가 자그마치 5만여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오로지 노예와 같이 일만 하고 그 돈은 고스란히 북한으로 보낸다고 하니 참으로 무서운 국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217일자 한국일보에 보도된 이에 대한 내용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북한은 외화벌이를 위해 50여 개국에 5~6만 여명에 달하는 근로자들을 파견한 것으로 17일 알려졌다.

러시아 2만여 명, 중국 19천여 명, 쿠웨이트 4~5천여 명, 아랍에미리트(UAE) 2천여 명, 카타르 1800여 명 등 건설 수요가 많은 국가에 집중적으로 근로자들을 보내고 있다.

업종별로는 건설 직종이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봉제, 임업, 의료, IT, 농업 등의 분야로도 인력 송출이 이뤄지고 있다.

아울러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에는 북한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들도 적지 않아 해외에 파견된 북한 근로자들은 6만 명을 넘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북한은 이와 같은 근로자들 파견을 통해 연간 미화 2억 달러 상당의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통은 "북한 근로자들은 월평균 미화 100~1500달러의 임금 가운데 충성자금, 국가 상납금 등 각종 명목으로 70~90%가량을 공제하고 실제로는 임금의 10~30%만 수령한다"고 전했다.]

이것이 사람을 주인 삼고 살아가는 북녘 땅의 오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은 이처럼 사람을 주인으로 삼고 그 주인의 노예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의 종이 되지 않으려고 거부한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불 유익을 당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므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실제로 중국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큰 교회인 충이탕교회의 담임 고요셉목사가 최근 중국당국의 지시를 거부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간 사실이 밝혀져 미국 텍사스에 있는 기독교인권기구인 테이화원조협회가 공식적으로 서한을 보내어 거세게 항의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중국 당국의 지시사항이란 곧 교회당의 십자가를 모두 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의 담임 고요셉목사는 십자가는 교회의 심벌이며 교회의 핵심인데 그것을 떼 내라는 것은 교회의 문을 닫으라는 말과 다름없으니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역했다가 체포되어 구금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수제자 디모데에게 예고한바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핍박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 사실화 된 것입니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종으로 살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와 같은 핍박과 고난도 감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예 선포하였습니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므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종은 되지 않겠노라고 말입니다.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핍박을 받고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사람의 종이 되어 사람을 주인 삼는 따위의 삶은 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받고 이 땅에 태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의 종이 되어 그들의 욕구나 채워주면서 그렇게 비참하게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를 줘도 먹지 않는 그 돈 때문에,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아지고 더 나은 유익을 얻기 위해 사람을 주인으로 삼고 그 사람의 종이 되어 비굴하게 살아가는 인생들이 이 땅에 의외로 많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 사이에 개 한 마리가 함께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개는 과연 누구의 개일까요? 함께 걸아가고 있는 한 결코 누구의 개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갈림길에 서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개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갈림길에서는 개가 반드시 주인을 따라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더불어 섞이어 살아갈 때는 주인이 과연 그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갈림길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숨길 수 없이 제 주인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부디 우리 짧은 인생 이처럼 사람을 주인 삼고 갈림길에서 그 사람의 종이었음을 후손들과 주님께 보여드리는 그런 비참한 삶은 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은 사람들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알고 모르게 주인 삼고 살았던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결단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한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명령하십니다.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말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그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은 좁고도 험하기 때문입니다.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그 길은 결코 넓지 않은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 길만이 사는 길이요 그 길만이 축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불행하게도 이처럼 힘들고 어려운 길을 마다하면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은 사모하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는 봄에 씨를 뿌리지도 않은 채 가을의 추수를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저절로 되어지는 일이란 결단코 없기 때문입니다.

천문학자 켈퍼씨는 천체경을 통해 우주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오묘한 창조의 섭리에 감탄하곤 했습니다. 그토록 많은 별들과 태양을 중심으로 정확한 궤도를 도는 별들, 그토록 빠른 속도로 돌면서도 창조 이래 단 한 번도 충돌 사고도 없이 정확하게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료 중에는 하나님의 실존에 관하여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날 그는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유성이 궤도를 따라 도는 태양계의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마침 그의 친구가 와서 그것을 보고 ", 참 아름답게 잘 만들었는데, 이거 누가 만들었지?"라고 물었습니다. 켈퍼씨는 "아무도 안 만들었어. 스스로 된 거야."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는 켈퍼씨를 바라보며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 스스로 되어 지다니, 이게 어떻게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가? 도대체 누가 만들었어? 말 좀 해봐."라고 채근하였습니다. 이때 켈퍼씨는 "친구여, 하찮은 장난감도 스스로 되어 지지 않거든 하물며 창조 이래 단 한 번도 충돌 없이 정확하게 돌고 있는 저 오묘한 천체들을 만드신 분을 모르겠나? 인간은 아무리 정확무도하다 해도 실수를 범하는 법이요, 그것이 스스로 되어졌다면 스스로 우주 질서가 깨질 때도 있지 않았겠소? 창조의 위대한 능력과 운항의 위대한 손을 믿지 못하는 자네를 위해서도 하나님은 사랑을 베풀고 계신다네." 이 말에 그는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 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또한 여름이 옵니다. 이렇게도 오묘한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우주까지도 우리들에게 주시며 누리고 살라고 복을 내리시는 우리들의 좋으신 하나님을 오늘 우리들이 우리들의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도 위대하신 하님의 종이기를 기뻐하며 예배드리는 그런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늘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우리 모두 이처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하나님의 종 됨을 감격하며 사는 그런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충심으로 소원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덧 2월도 하순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렇게도 세월이 빠르게 흐른다면 어느 날엔가 우리들의 마지막 순간도 오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 때 되돌아보고 후회하지 않도록 우리들의 남은 삶을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후손들에게는 소망이 되며 우리들의 삶에는 축복이 될 수 있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삶의 주인을 올바로 만나야만 합니다. 삶의 주인의식이 없이 그냥 그렇게 우리들의 욕심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국 돈의 노예가 되고 또한 사람의 종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돈과 사람의 종이나 되어 살라고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까지 내어 놓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우리들의 주인부터 제대로 찾아야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어리석음에 젖어 주인으로 모시고 살았던 소중한 모든 것들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만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 모두의 바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쪼록 2월의 세 번째 주일을 맞아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자로 부름 받아 나오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을 예수님을 주인 삼고 그 예수님의 종이기를 소망하는 그런 멋들어진 심령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6221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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