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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6년 3월 6일 주일낮설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016년 3월 6일 주일낮설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3. 6, 2016

本文:시편23:1-6

:

 

지난 주간에 우연찮게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목사님의 아들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아버지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자식된 자기들은 돌보지 않고 교회 일에만 치중하였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장로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자식들도 돌보지 않고 교회를 섬겼는데 그러한 목사님을 존경하고 섬기지는 못할망정 학대하는 장로들에게 대한 반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나이가 60이 넘었는데도 그와 같은 좋지 못한 감정들 때문에 자유하지 못하고 어두운 삶을 살며 아예 교회와 담을 쌓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목회하신 아버지가 나쁘면 얼마나 나쁘겠습니까 마는 가장 곁에서 위로를 해 드리고 이해를 해 드려야 할 아들마저도 이해는커녕 원망과 불만으로 가득한 채 한 평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생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겠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들은 우리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을까요? 아니 오늘 우리들은 우리 아버지를 바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어리석은 고정관념에 갇혀서 제대로 된 인생을 자유하며 살아가지 못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영원히 요원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는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을 정보의 홍수시대라고 합니다. 하나의 문제를 알고 싶어 네이버에게 물어보면 하나의 질문에 대한 해답이 수백만 가지로 올라 올 정도니까 그럴 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모든 정보가 정확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속에는 유사한 해답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엉터리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정확한 정보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바르지 못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최악의 경우가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으로 인해 구원을 받고 사랑을 받고 복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25:24-30)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자의 최후를 보고 있습니다. 실로 무섭고도 떨리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어두운 데로 내어 쫓기는 최후의 모습은 바로 심판의 마지막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하나님만큼은 똑바로 알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와 같은 우리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명료하게 그 해답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함께 공부하면서 풍성한 은혜와 감격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성경에 등장하는 숱하게도 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성군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고백을 가진 귀한 인물입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할 수 있었고 또한 그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가 고통과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깨닫고 발견한 하나님에 관한 정의가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와 같은 그의 신지식과 내면적 깊은 성찰로 인해 그는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고백한 그 하나님으로부터 말로 다할 수 없는 은총과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함께 이에 관한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다윗이 받았던 풍성한 은총을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입니다

다윗은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말입니다. 이는 그의 어린 시절 자신이 목동이었기에 목자가 무엇을 하는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자가 양을 어떻게 이끌고 먹이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신다고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23:2-3)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인도하시는 사랑의 목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몰아붙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잘못 알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들을 몰아붙이시고 힘들게 하시고 억압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맞추어 가려고 허덕허덕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끝내는 낙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사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그릇되고 잘못된 생각이요 판단이었는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인도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인도한다는 뜻은 앞에서 모범을 보이신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인도하신다는 뜻은 따라오는 무리들을 책임지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양이 된 우리 성도들은 그냥 묵묵히 그렇게 이끌어 주시는 목자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더도 덜도 아닌 순종으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인들이 이렇게도 단순한 이 원리 하나를 알지 못한 채 한 달란트 받았던 악하고 게으른 종처럼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처신하다가 넘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놀랍게도 역사적인 지도자로 우뚝 서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정신적인 대부로 그 자리를 수천 년을 두고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이 해 놓은 업적이 무엇입니까? 딱히 말하라고 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그는 묵묵히 목자가 되신 하나님을 끝까지 순종하고 따랐던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도 위대한 세 종교의 대부로 우뚝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목자로 똑바로 알고 우리의 위치인 양의 도리를 다 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종하며 묵묵히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렇게도 단순한 이것이 인류의 거목이 되고 하나님의 기적을 보는 너무나도 큰 축복의 밑천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비옥한 갈대아 지방을 버리고 메마르고 소망 없는 가나안으로 묵묵히 목자이신 하나님만 믿고 따라 갔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자신의 평생 목자로 믿는 믿음이 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별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신약시대의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목자가 되시어 인도해 주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에 자기가 귀하게 여기고 의지하였던 세상적인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과감하게 버리고 오직 그 하나님만을 평생토록 따라 갔던 것입니다.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결국 그는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자신을 인도해 주실 목자로 믿고 그 어떤 시련과 환난과 고통가운데서도 물러서지 아니하고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로마에서의 순교를 앞둔 무섭고 두려운 현실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순교하기 위해 가는 길목에서 만난 거대한 유라굴로 풍랑 앞에서도 사도 바울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당당하게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서서 외쳤습니다.

(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고 말입니다. 어떻게 죽음이 지척에 있는 엄청난 자연 재해 앞에서 이렇게도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하나, 하나님은 우리들을 선하게 인도하시는 목자라는 사실을 끝까지 믿음으로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렇게도 단순한 진리를 어린 아이와 같이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목자이시기에 우리들을 끝까지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순한 양이 되어 목자이신 하나님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아브라함을 책임져 주시던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목자가 되실 것입니다. 바울을 끝까지 동행하시며 지켜주시던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목자가 되실 것입니다. 성군 다윗을 끝까지 사울과 압살롬의 칼끝에서 지켜주시던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들의 목자가 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를 풍성하게 채우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성군 다윗은 하나님을 또 다시 고백하고 있습니다. 푸른 초장 잔잔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 목자시라고 말입니다.

(23: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 그것은 오직 목자가 되시는 우리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관계가 회복 될 때만 가능한 은총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과연 이렇게 나는 보족함이 없습니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무엇이 부족해도 부족하며 늘 목이 마르고 애가 타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군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므로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어떻게 다윗은 이렇게까지 고백하고 선언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나의 목자라는 공식을 성립시켰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구체적으로 다시 한 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푸른 초장에 누이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공동번역에서는 푸른 초장에 누워서 놀게 하신다고 해 놓았습니다. 푸르디푸른 초장에서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이 노늬는 양들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거기에는 문자 그대로 더 이상 아쉬울 것이 없는 낙원!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다름 구절에서 다윗은 또 다시 고백하고 있습니다.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고 말입니다. 여기에 표현된 안위하신다는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걱정 없어라!”고 표현해 놓았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나는 걱정이 없습니다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사람이 그 누구라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걱정이 없이 안정과 평안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의 하나님이 목자가 되시어 앞서 가시며 인도해 주신다면 이처럼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대의 평안을 밤에 잠을 잘 자는 것이라고 노래하였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127:2)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잠을 주시는 평안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잠들게 하시면 우리는 죽음을 앞에 놓고서도 두려움 없이 편히 잠 잘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양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축복인 것입니다. 사랑이 한이 없으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의 열심과 땀을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풍성한 은총으로 보답하시는 존귀하신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이와 같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들에게 임하시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쉴만한 물가로 이끌어 주실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 2차 대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그것도 모자라 독일 군들이 유대인들을 집단으로 학살시키고 있을 그 때에 아우츄비치 수용소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을 쓴 빅터 프랭클린이라는 심리학자입니다. 그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깨달았던 진리는, 그 어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고 소망을 가지는 자는 결코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 자고새면 수도 없이 사람들이 끌려가서 독개스 실에서 죽어나가는데 삶의 의지나 희망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깨진 유리조각으로 수염을 깎으며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서 가족들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쉼 없이 자신을 일깨웠다고 합니다. 끝끝내 그는 죽지 않았고 살아나왔습니다. 그래서 책을 써 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의 가장 공통된 현상은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정예된 3천 명으로 꾸려진 용사들을 손수 이끌고 사울 왕이 죽이려고 손바닥만한 이스라엘 나라를 이 잡듯이 뒤질 때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은 0%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었습니다. 그는 끝내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사울 왕은 죽고 그 왕위를 죽을 수밖에 없었던 다윗이 차지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 인생은 오직 우리들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지키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을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목자가 되시는 우리 하나님을 만날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만 임재하시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머물러야 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우리 인생들에게 무엇이 되시며 어떻게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가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분명하게 설명한 다윗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 두었습니다.

(23:5-6)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고 말입니다. 다윗은 그렇게도 좋으신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살겠다고 마지막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고백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결단이라고 생각됩니다. 고라 자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행하게도 모세와 아론을 질투하여 그들에게 대항하고 그들만이 가진 신권에 도전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땅이 갈라지는 대지진 속에서 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새롭게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을 지극 정성으로 잘 섬겼습니다. 그들이 남긴 말씀 가운데 주님의 장막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참으로 진정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감동어린 고백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84:10-12)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는 말씀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은 주님의 전을 사모하는 사람들이요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은 그 전을 지키는 문지기로 사는 것이 세상 궁전에서 사는 것보다 낫다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온 몸으로 체험했으면 이렇게까지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라는 사람은 그래서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예배는 성전에서 드립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그 성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살기를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오늘 우리 곁에까지 하감하셨습니다. 주님의 소원이 오늘 우리들의 소원이 되고 오늘 우리들의 소원이 주님의 소원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행복한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들과 함께 하기를 원한다면 그 삶은 복 받은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신다면, 더 더군다나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친히 인도하시는 목자가 되어주시고 우리들의 모든 필요를 충만하게 채워주신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정확한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을 가지고 그 하나님과 화답하여 예배자로 거듭나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기다리시는 전에 나아와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머뭇거리다가 주어진 생을 다 낭비하면 죽어야 할 너무나도 유한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Henry Thoreau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 노예해방운동에 일생을 바쳐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노예법에 항의하는 뜻으로 세금을 내지 말자고 독려하며 세금불납운동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절친인 Ralph Emerson(유명한 설교가요 사상가)이 감옥으로 그를 면회 왔습니다. 그리고 농담조로 물었습니다. “어이, 친구 지금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토로가 대답했습니다. “자네는 그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런데 에머슨은 이 친구의 단순한 말 한 마디, “자네는 그 밖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말에 크게 죄책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명세기 설교나 하고 사상을 논한다고 하는 자신이 지금 이 세상과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좋은 것 복된 것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웃들이 우리들에게 잘 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오로지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고 생각하고 기대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우리들의 소중한 것도 내 놓을 줄 알 때 우리들도 목자이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고받는 아름다움이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덧 봄을 여는 3월이 닥아 왔습니다. 봄은 참으로 만물을 소생케 하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이렇게도 복된 계절에 우리들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정녕 우리에게 누구이신지 바로 배워서 그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한 번 더 감격하고 기대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우리들도 다윗처럼 고귀한 성도들이 되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주고받음이 지속될 때 하나님은 우리들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관계회복이 이루어지면 다윗이 고백한 바와 같이 우리들도 우리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들의 목자가 되시므로 우리들에게 부족함이 없고 우리들을 그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심으로 모든 면에서 풍족하고 쉼이 있고 자유가 있으며 두려움이 없는 멋들어진 삶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안전하고 평안한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집에서 사는 것을 진심으로 소망하게 되는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처럼 복된 3월의 첫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와 같은 축복으로 삶이 변화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회복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게 되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636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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