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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0일 주일낮설교 (유한한 것과 영원한 것)

유한한 것과 영원한 것

고난주일

3. 20, 2016

本文:베드로전서1:22-25

: 根 牧 師

 

사도 베드로는 참으로 사도 중에서도 특이성을 많이 가졌던,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책망과 칭찬을 동시에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베드로가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인 냥 때로는 위로가 되고 때로는 로망이 되기도 합니다. 그는 인류 최초로 주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엄청난 칭찬과 축복을 받아 누렸던 그런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16:16-1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는 말씀이 바로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하나 다음 순간 그는 그만 사단으로 낙인이 찍혀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책망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16:22-23)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으로부터 그것도 직접,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는 책망을 들은 자는 아직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토록 베드로는 극과 극을 달리면서 주님을 모셨던 조금은 특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주님께서 친히 보시는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고 떠나버렸던 초라한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새롭게 변화를 받아 끝까지 사도의 사명을 다하고 급기야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가 오늘 우리들에게 참으로 의미심장한 한 말씀을 남겨 두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벧전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짧은 한 말씀 속에서 2016년 고난주일을 맞아 영혼의 양식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유한한 것과 영원한 것

베드로는 사실 그렇게 유식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물고기나 잡아서 생계를 유지해 갔던 그저 평범한 어부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그렇게 보통 사람으로 평범하게 살아갔습니다. 뜻밖에도 그러했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도로 변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본성은 변화 되지 않았고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숱하게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인생과 사도의 삶을 살아갔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인생 끝자락에 깊이 깨달았던 인생에 대한 짧은 정의는 너무나도 유한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생이 무엇인지 그 결론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너무나도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스라엘의 최대 지도자였던 모세는 이에 한 술 더 떠서 그 유한한 삶마저도 너무 짧고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정의해 두었습니다.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비록 이 땅에 목숨을 부지하며 살고 있지만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정의해 놓으신 이 말씀과 같이 제한된 삶을 살고 때가 되면 반드시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모세가 그랬었고 사도 베드로도 그랬으며 우리 모든 조상들도 한결 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유한한 존재임을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제한되고 유한한 생명이요 삶이라면 우린 진정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남은 삶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삶이 영원하지 못하고 유한하고 제한적인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얼마 동안 이 세상에서 살아 존재하게 되는 것일까요? 불행하게도 이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젊은 나이에 요절하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사고로 순식간에 이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90:10-11)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남은 삶을 계수하는 방법을 모세가 또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인생의 평균 연령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는 근거가 바로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 자신들의 나이를 빼면 남은 삶이 나올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남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아 정상적으로 생을 잘 살아갔을 때의 일입니다. 이와 같은 평균 수명에도 미치지 못한 채 숱하게도 많은 변수들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겸손하게 주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명 줄을 쥐고 계시는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삼상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들의 생명 줄을 잡고 계시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 장수를 선물로 또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91:16)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10:27)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는 말씀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아름다운 축복이 장수라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고귀한 장수를 구하겠습니까? 우리들의 삶이 유한하고 우리들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는 분이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진정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신자답게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들의 풀과 풀의 꽃으로 비유를 하셨습니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말하면 그 자체로 허무하고 무상하다는 뜻입니다. 풀은 반드시 마릅니다. 꽃은 반드시 시들고 떨어집니다. 우리 인생이나 생명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마르고 시들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우리들이 상식으로 경험하는 바로도 진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남은 생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라고 충고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또한 스스로 삶을 살아보고 경험한바 인생이란 이렇게도 유한하고 허무한 것이니 그 삶을 후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 이처럼 기록하여 남겨 두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벧전1:22-23)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허망하게 죽어가는 우리 인생들을 영원히 살 수 있도록 거듭나게 해 주신 장본인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을 상속 받았으니 그 천국에 신령한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을 신자라고 부릅니다. 신자가 되려면 속되고 추한 우리들의 육신적인 옷을 벗고 신령한 것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렇게 거듭난 증거가 바로 희생적으로 사랑할 줄 아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지금 우리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이렇게 피차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유한한 생명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 가장 아름답고 고상한 삶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프스에 사는 재미있는 개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개미들은 아주 특이합니다. 개미 집 속에 불타는 초를 세워 놓으면 개미는 몸으로 불을 끄는 데 전력을 다한다고 합니다. 개미의 몸이 불타면 키츤스라는 불연성의 진액이 나와 불이 꺼진다고 합니다. 이러한 개미의 희생정신이 개미를 곤충의 왕이 되게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희생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요,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희생의 삶은 자녀를 훌륭하게 성장케 합니다.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나라가 든든히 서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장을 가져온 것도 믿음의 선배들의 순교의 피가 이 땅에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앞서간 믿음의 종들의 희생적인 삶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프리카 땅에 복음이 전파된 것도 리빙스턴 선교사와 슈바이처 박사같이 복음을 위해서 불타는 가슴으로 희생적인 삶을 살았던 위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우리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주님의 십자가 희생이 나의 삶 가운데 메아리치고 있습니까? 주님의 희생의 보혈이 나의 몸속에 흐르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살을 갈기갈기 찢으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실로 이 세상에 주님의 희생만큼 아름답고 고귀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 복된 고난의 계절에 우리 주님의 이와 같은 희생과 사랑이 우리들의 삶에 신선한 변화와 결단의 촉매제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해 봅니다.

하지만 오늘 날 우리 삶의 현장에서 이처럼 고귀한 희생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남의 희생을 통해서까지 자신의 유익만 추구하는 그런 불쌍한 생애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 역사에 다음과 같은 안타까운 이야기가 화자 되고 있습니다.

1923년 시카고의 에지와트 비치 호텔에 당시 미국의 최대 부호였던 9명이 자리를 같이했을 때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들이 '20세기의 신화'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때는 황금만능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돈만 번 것이 아니라 큰 회사의 사장들이었기 때문에 교육도 많이 받았고 명성도 있는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의 표준으로 볼 때 스타이고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25년 후인 1948년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하나는 미치고 셋은 파산해서 빚에 쫓겨 도피 생활을 하 다 죽었으며 둘은 출옥해서 자살 직전에 있었고 셋은 자살했습니다. 한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인생의 궁극 목표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소중한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본인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애의 기로 어디에선가 주님의 내게로 오라는 음성을 거부하고 다른 것을 목표로 삼아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비참한 최후를 마쳤거나 허무주의로 살고 있습니다. 동양 최대의 성자이고 인도인의 태양이었던 간디도 죽기 전에 자신은 괴로운 사람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부지런히 뛰어 보았지만 그것은 궁극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창녀가 되었든지 세리가 되었든지 구두닦이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갈 줄 압니다. 푯대가 있고 초점이 있고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표가 있는, 인생의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 말입니다.

영원한 것과 결탁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명이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다면, 그래서 한 시절이 지나면 마르고 시들어 떨어져버린다면 무슨 방도든지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미련하고 어리석은 우리 인생들은 그 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독생자를 보내 주셨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들의 죽을 몸을 영원히 살 수 있는 거듭난 몸으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유한한 우리들이 영원하신 주님을 영접하고 그 주님을 믿으면 주님의 영원하신 생명이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를 만들어 주십니다. 이는 마치 농부들이 양질의 과일나무를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에 접을 붙이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주님과 연합해야만 합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아주 고귀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15:5-8)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비밀이요 비결이요 기적입니다. 유한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연약하고 유한한 인생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예수님과 연합하고 결탁하게 되면 이처럼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보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건축에서 콘크리트를 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콩크리트는 자갈과 모래와 시멘트가 물과 함께 연합하여 굳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물이나 자갈이나 모래나 시멘트를 각각으로 나누어 두면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서로 섞여서 굳어지면 100년이 가도 끄떡 없는 강력한 콘크리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우리 스스로 독립 되어 있으면 안 됩니다. 이웃과 연합하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원한 생명을 보유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생활이요 신앙생활이요 예배생활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위해 하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고난주일입니다. 우리 주님의 그 고난이 헛되지 않도록 무엇인가 새로운 결단과 변화를 만들어 죽으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그 아름다운 희생과 사랑에 우리들도 화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들의 삶이 이 땅에서 유한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재물까지도 영원히 살 하늘나라에 쌓아 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실상을 분명하게 깨닫고 영원히 살 그곳에 투자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두 가지 중요한 팁이 있는데 하나는 잠시 살다 가는 이 세상에 뭔가 삶의 흔적을 남겨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베드로는 사랑이라고 정의해 두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유효한 가장 소중한 성도들의 덕목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단언하였던 것입니다(고전13:13).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들이 이 땅에서 유한하게 살아야 한다면 유한하지 않고 영원한 그 무엇을 붙잡고 그것과 결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유한한 것이 영원한 것과 결탁하게 되면 영원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농부들이 별 볼일 없는 나무에 양질의 과실나무를 접붙이는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영원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비록 유한한 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들이 만약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 접붙여진다면 우리들도 그 말씀과 함께 영원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로 영광 돌려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바로 이와 같은 은총을 덧입고 영원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고 이 땅에 사도들과 같은 아름다운 삶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리는 바입니다. 아 멘

주후 2016320

고난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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