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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7일 주일낮설교 (21세기 부활의 의미)

21세기 부활의 의미

부활주일

3. 27, 2016

本文:마태복음28:1-10

:

 

소련 땅 안에 스탈린의 유해를 두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긴 후르시쵸프는 드골에게 청하여 나폴레옹을 안장한 앵바리드를 이용하게 해 달라고 하였으나 드골은 앵바리드는 영웅을 위한 묘지임을 내세워 승인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워싱턴에 전화를 하여 웰링턴 묘지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스탈린은 거절 당했습니다. 할 수 없이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는 받아 줄줄 믿고 연락을 넣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영웅 이외는 받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더 이상 도리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 문의 했더니 거기서는 쉽게도 받아들여주겠다는 회답이 왔습니다. 그러나 편지 말미에 신뢰할만한 국제통계에 의하면 신성한 이스라엘에서는 부활의 확률이 세계에서 으뜸간다는 사실을 미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부활한다는 한 마디에 깜짝 놀란 후르시쵸프는 순간에 마음을 단념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스탈린의 유해는 아직도 소련에 남아있다고 합니다. 부활은 진짜로 가능한 것일까요? 후르시쵸프가 이스라엘에 스탈린의 유해를 보내지 않은 것으로 보면 그는 진짜로 부활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과연 이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까? 해마다 부활절은 다가오는데 실상 가슴으로 이 부활을 믿고 황홀해 하는 성도들은 그렇게 만나보기가 쉽지 않는 것 같아서 여쭈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8:5-6)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씀입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사실입니다. 만약 그것이 거짓이었다면 지난 2천 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무신론자들이 그 사실을 그냥 덮어 두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이 사실이라는 반증은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록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것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확증해 두었습니다.

(고전15:12-19)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실을 기초로 하여 예수님께서 분명히 부활하셨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이 이 사건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교훈이란 더할 나위 없이 많겠지만 이 종은 오늘 딱 3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듣고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21세기 부활의 의미

물질문명과 과학이 하늘에 닿고 있는 이 즈음에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산다는 부활의 메시지에 감동 받거나 기대하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순히 허황된 특정 종교의 괴변이라고 폄하 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오로지 이 땅에서 뿐인 줄 알고 거기에 목을 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진정한 믿음에 뿌리를 두고 그 믿음이 우리들의 삶을 움직이고 생활이 되어질 수 있도록 세상 사람들과 차별화 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계절이 바로 지금 부활절의 복된 시간입니다. 함께 깊은 깨달음과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말씀으로 돌아가 진리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활사건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성도들의 관계는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약속의 구체적인 내용은 바로 구약과 신약성경입니다. 구약이라는 말의 의미는 옛 약속이라는 뜻이고 신약이라는 말은 새로운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 성도들은 이와 같은 약속으로 관계가 회복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리석은 인생들은 하나님의 이와 같은 약속을 등한히 하고 무관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기되고 축복의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형벌과 심판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고 있거나 그 약속의 체험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이와 같은 어리석은 인생들의 불신을 순간에 불식시켜주는 엄청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죽고 다시 산다는 것은 인생 역사 속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 본적도 없는 생소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들을 위해 죽으시고 친히 또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와 같은 인생들의 경험과 상식을 단숨에 뛰어 넘어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입니다.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고 그렇게 살아나신 배경이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해 두셨던 약속의 성취라는 뜻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확인해 보면 되는 것입니다.

(27:62-66)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이 말씀 하나만 보아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의 신빙성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예수님의 말씀도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의 말씀도 아닌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잔인한 악한들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예수님을 잡아 죽인 그 잔인한 악당들을 통하여서 증거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하셨던 부활에 관한 약속의 말씀은 과연 어디에 남아 있을까요? 그것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17:22-23)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20:18-19)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이와 같은 말씀들은 성경에 한도 없이 기록되어져 있으므로 다 인용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같은 마태의 입을 통해 증거된 예수님의 말씀만 몇 개 인용해 보았습니다. 오죽이나 이 말씀이 널리 그리고 많이 전파되었으면 악당들까지도 다 알고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최고 지도자 빌라도의 지시를 따라 무장한 군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시신을 밤낮으로 지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시신을 제자들이 훔쳐가서 감추어 두고 부활하셨다고 외치면 대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예상대로 제자들이 훔쳐 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상식과 경험을 뛰어 넘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사는 부활의 약속도 이루어진다면 무슨 말씀인들 안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을 주시기에 더 없이 확실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을 만 천하에 공포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부활의 사건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 집니다. 이것은 인간의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단 4-5분만 호흡이 멎어도 뇌가 손상을 입게 되고 바로 뇌사상태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 사흘이 지났는데도 정상인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이성이나 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죽어서 이미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사람까지도 다시 살아났으니 세상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11:39-44)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밖에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설명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보다 훨씬 크고 놀라운 것으로 우리들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천지창조에서 이미 나타났었습니다. 먼지와 같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오늘 우리들과 똑 같은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지성과 이성이 아니라 그 지성과 이성을 훨씬 뛰어 넘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믿음! 바로 그것만 우리들에게 있다면 오늘 우리들처럼 어리석고 미련하여도 태산을 명하여 바다에 옮기라 하여도 옮길 수 있는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에서 유도 만들어 내신 하나님께 있던 일을 새롭게 하여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일은 기적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였던 누가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능력을 다음과 같이 단순한 사건으로 간단하게 기록해 두었던 것입니다.

(2:22-24)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의사라 누구보다도 육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과학적으로 잘 알고 있었던 저자가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기록한 이 말씀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에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오늘 바로 이것을 가슴으로 인식하고 믿고 감격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의 육신이 죽어도 다시 살리실 수 있을 만큼 우리들의 이성과 상식을 초월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삶의 그 어떠한 환경에 처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능력을 믿고 의지하고 기대하며 소망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최악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험한 세상을 이기고 주어진 사명을 능히 감당해 나갔던 것입니다.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한 한 시대의 사건이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능력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은 그러므로 우리들의 영원한 소망인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모든 약속이 우리들에게 기적처럼 일어나고 실제로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능력은 우리들의 이성과 경험을 뛰어 넘어 초월적으로 우리들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부활절 주일에 하나님 앞에 앉아 경건하게 꿈을 안고 예배드리고 있는 이 현실이 이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예수님을 주셨고 구원을 주셨고 우리들의 삶을 풍성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잘난 줄 알고 교만하고 어리석게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던 우리들을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불러 자녀로 삼아주시고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자로 세워 주신 이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은 방황하지 말고 하나님의 이와 같은 능력을 우리들의 삶에 접목시켜 신선하고도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는 절대적인 확신과 믿음을 안고서 말입니다. 종이 한 장은 힘도 없고 쓸모도 없지만 그것이 강력한 철판과 함께 할 때에는 총알도 견디는 강력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들도 덧입게 될 때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능력이 많으셔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바꾸어 놓으시고 무덤에서 모든 죽은 자들을 다 살려내신다 할지라도 그 능력이 오늘 우리들과 상관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초라하고 무능하고 불쌍한 존재로 남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능력이 오늘 오늘들의 능력이 될 때 비로소 우리들도 한 시대를 거스르는 놀라운 변화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십시오. 절대 권력을 다 가지고 있는 왕인 느브갓네살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왕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우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던 위대한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왕이 불 속에 집에 넣겠다고 윽박질러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버티어 마주 섰던 그 무서운 용기는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그 믿음의 단면을 다음과 같은 말씀 속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16-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믿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이 풀무 불 속에 던져 넣겠다고 윽박지를 때 그들은 담대하게 자신들의 생명 줄을 쥐고 있는 왕에게 응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 속에서라도 우리들을 건져 내 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확신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기대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져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는 그대로, 그들이 기대했던 그대로 하나님은 느브갓네살 왕의 손아귀에서 건져 불 속에서라도 해방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의 하나님을 믿는 실제적인 산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믿음으로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당당하게 이 세상을 정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렇게 세상을 정복하고 이기기를 원하고 계시고 그렇게 이기는 자들에게만 면류관을 주십니다.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은 한 때만 기억하는 절기 행사가 아닙니다. 부활절은 우리들 신앙의 근본이 되어야 하고 삶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부활절 예배에 참여하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바로 이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드리고 자신들은 부활의 기적을 체험하고 사는 그런 복된 심령들로 거듭나시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2016년도 부활주일입니다. 단순하게 1년에 한 번 지키는 절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신앙의 근본을 회복하고 삶의 근본부터가 바뀌어지는 놀라운 변화를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은 진정한 신앙생활의 근본이 되고 기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 된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막연하고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살리실 수 있을 정도로 놀랍고 분명하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공포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이처럼 분명할진데 우리들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그 능력을 생활 속에서 기대하고 아무리 극한 상황에 처해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반드시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하실 수 있음을 확신하고 용기와 믿음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부활신앙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믿음입니다. 성경 속에는 이처럼 위대한 믿음과 확신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승리한 인물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사울의 칼날 앞에서도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다윗 왕이 그러했고 13년이란 긴긴 세월 동안 죽을 고생을 다 하다가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우뚝 서게 되었던 요셉이 또한 그랬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능력의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믿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그와 같은 엄청난 능력의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오늘의 힘든 삶을 능히 이겨내고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친히 우리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우리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부활의 영광을 노래하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와 같은 구체적인 믿음으로 남은 삶을 승리하고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친 백성들이 되시기를 부활하신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6327

부활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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