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3일 주일낮설교 (이런 친구들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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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03 April 2016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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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친구들이 있습니까?
4. 3, 2016
本文:마가복음2:1-12
說敎:崔 仁 根 牧 師
우리 예수님의 명성이 한창 세상에 두루 퍼지고 있을 때 문자 그대로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몰려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그 때의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마음에 들어가셨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늘의 도를 가르치고 계실 때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지붕이 뜯어지고 거기에서 들것이 내려오고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엎드러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환자를 고쳐달라고 데리고 왔으나 너무나도 사람들이 많아 도저히 예수님께로 환자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판단한 친구들이 궁여지책으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집의 지붕으로 올라가 이처럼 기가 막힌 역사를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들의 이와 같은 방해를 예수님께서 조금도 탓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그 모습을 칭찬하시고 중풍병자를 순식간에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막2:4-5)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기이한 사건을 통하여서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를 기대해 보려고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소중한 진리를 강론하시는 일을 방해한 이 사람들의 무래함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칭찬하셨는가? 하는 것과 아울러 우리들에게는 이처럼 지붕에까지라도 친구를 데리고 올라가 예수님의 기적을 만들어 주는 그런 멋진 친구들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세로 한 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친구들이 있습니까?
현대의학이 심층 분석하여 내 놓은 한 가지 재미있는 장수의 비결이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잔잔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노년에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는 사람들은 장수하나 반대로 외로운 노년에 친구가 없는 사람은 빨리 죽는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등한이 여겼던 친구관계가 결국 우리들의 생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참지 못한 채 사소한 일들로 의를 끊어버리고 친구를 잃어버린 일들이 우리 모두에게는 아픈 경험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마고우를 한국에 남겨 두고 이 땅에 이민 와서 친구는 고사하고 자식들마저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허덕거리며 살아 왔던 지난 날들이 우리 모두에게 상처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좋은 친구들을 만들어 내고 그 친구들로 인해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기적이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친구들의 사랑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친구를 네 귀퉁이에서 들 수 있도록 들것을 만들고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곳으로 운반해 왔습니다. 그러한 친구들을 보신 예수님은 그들의 중심을 보시고 귀하게 여겨 칭찬해 주셨던 것입니다.
(막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보신 친구들의 믿음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아픈 친구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네 친구들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도 이와 비슷한 역사를 만들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한 백부장이 자신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이 병들자 먼 곳에 계시는 예수님을 찾아가 간청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린 백부장이 일개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먼 곳에 계시는 예수님을 찾아 온 그 사랑이 기특하여 예수님은 두 말 않으시고 가서 고쳐 줄 결단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자,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시자 그 백부장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 그곳까지 친히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서 말씀만 하셔도 내 집에 있는 아인이 낫겠습니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깜짝 놀라 만인들 앞에서 공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 이만한 믿음을 아직 내가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10:1-10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도 우리 예수님은 백부장의 하인 사랑을 그의 믿음으로 보시고 칭찬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사랑을 동반하고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믿음은 실로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들의 열정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중풍병자를 자신에게로 데리고 나온 친구들의 열정을 보셨습니다. 그들이 아픈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나아왔지만 불행하게도 거기에는 사람으로 산을 이루고 있었기에 도저히 예수님 앞으로 친구를 데리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포기하지 아니하고 친구를 데리고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참고로 여기에서 지붕이라는 개념을 잠깐 소개해 드려야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지붕이라고 하면 도무지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단단하게, 물이 새지 않도록 잘 만들어져 있는 것만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열대 지방인 가버나움의 지붕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슬라브로 단단하게 되어 있는 지붕이나 비록 초가지붕이라도 도무지 뜯어낼 수 없는 그런 류의 지붕이 아닙니다. 비가 오지 않는 더운 곳이기에 충분히 지붕을 거둬내고 물건을 내릴 수 있는 그런 정도의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와 같이 지붕으로 올라가서 들것을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아 내리려는 발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4절의 말씀입니다.
(막2: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모든 매사에 스마트 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그와 같은 발상과 거침없이 행동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시고 친구들의 열정에 감동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그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기 위해 열정을 가지고 사모하는 영혼을 매우 귀중하게 여기십니다.
(시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를 방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리고에서 놀라운 한 광경을 목격하셨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지요 소경이요 초라하고 냄새나는 형색으로 예수님을 부르며 소란을 피우자 제자들은 그와 같은 소경을 극구 제지하며 예수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소경은 그와 같은 제지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친히 그 소경에게로 다가 가셔서 물어 보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소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소경의 눈을 즉석에서 고쳐주셨습니다. 무엇입니까? 간절함을 담아 소원하는 마음으로 힘을 다해 예수님을 찾을 때 기적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처럼 열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뽕나무에라도 개의치 않고 올라가서 예수님 보기를 소원했더니 삭개오에게 친히 다가 가셔서 우러러보시며 그를 만나 주셨던 예수님은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찾는 자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찾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평생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렸던 성군 다윗의 삶이 바로 이러하였습니다. 구구절절이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목이 마르도록 사모하고 바랐던 인물이었습니다.
(시63:1-3)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약속 하나를 남겨 두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절히 찾으면 만나 주겠다.”는 것입니다.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처럼 주님께서 친히 인정해 주시고 기적으로 응답해 주시는 간절함과 열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살리려는 뜨거운 열정으로 지붕 위에까지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리는 네 친구들을 통하여 그들의 내면에 머물고 있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막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들은 왜 병든 친구를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곳까지 데리고 왔을까요? 그들은 왜 그 환자를 데리고 지붕 위에까지 올라가서 예수님께로 달아 내렸을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그 친구 환자를 고쳐보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를 고치기 위해 그들은 의원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병원을 찾아 간 것도 또한 아닙니다. 오직 그들은 예수님 앞에 나아왔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의 사랑과 열정과 믿음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이미 병원도, 의원도 다 찾아 가 보았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그들의 친구를 고쳐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예수님께로 환자를 데리고 나왔을까요? 그것은 “예수님만은 고쳐 주실 수 있을 것이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들것에 태워서 이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열악한 환경을 초월하여 예수님의 발 앞에 친구 환자를 내려놓기 까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여건이었지만 오직 믿음 하나로 주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그와 같은 사랑과 열정이 곧 믿음에 기초하고 있었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말 하지 않으시고 그 환자를 순식간에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여기에서 오늘 우리들은 이처럼 고칠 수 없는 중풍병도 순간에 고침 받는 기적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12년 동안이나 피를 흘리는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한 여인이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의원이라는 의원을 다 찾아다니며 재산을 탕진해 버린 안타까운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그 여인은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그 예수님이시면 자신의 병도 능히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아무도 모르게 주님께로 다가가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2년 동안이나 계속된 혈루가 순간에 멎은 것입니다. 마태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거기에 기록된 많은 말씀 가운데 다음과 같은 한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마9:20)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마음의 확신!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고 예수님과 같은 기적과 이적도 만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친히 약속해 주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마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에는 성도들의 가슴 속에서 믿음이 사라지고 욕심과 분노와 이기심만 차고 넘치게 될 것이라 하셨으니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제 주님께서 이처럼 놀라운 이적과 기적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 보장해 주신 믿음을 가슴에 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캄캄한 밤이라야 작은 반딧불로 밝게 빛나듯 마지막 때에 믿음이 없을 때 우리들의 작은 믿음도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믿음이 있는 성도들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친구를 팔고 친구를 밟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 살아가는 서글픈 현실 앞에서 “이와 같은 좋은 친구들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 보는 자체가 비현실적인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도 이웃들을 위해서도 더 나아가 우리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우리는 이처럼 멋들어진 친구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친구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사올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들이 먼 미래를 내다보며 시간과 물질과 사랑과 정성을 투자하여 만들어야 하는 보배입니다. 그렇게 힘을 쓰고 관심을 가지고 선한 투자를 해서라도 우리들의 장수의 비밀이요 우리 주님의 기적의 기초가 되는 것이 그렇게도 소중한 친구라면 우리들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스피노자는 말했습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미래 지향적인 정신으로 친구를 만드는데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인생은 결코 돈만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생은 결코 혼자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좋은 사람, 바로 친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좋은 친구들과 더불어 아픔과 기쁨을 나누게 될 때 비로소 하늘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칭찬하시고 기적을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남도 살리고 우리들도 살 수 있는 멋진 인생의 동반자, 친구 만들기에 이 멋진 4월과 봄을 투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함께 하늘의 기적을 만들고 땅의 평화를 만들어 가는 그런 멋진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오늘 거룩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계시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바로 이와 같은 친구들을 만들고 남은 삶을 천국과 같이 멋들어지게 살아가는 그런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6년 4월 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