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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10일 주일낮설교 (이런 사랑을 아십니까?)

이런 사랑을 아십니까?

4. 10, 2016

本文:아가1:5-10

:

 

전문가들이 내 놓은 데이터에 따르면 사람들의 사랑의 유효기간은 7개월이고 최장으로 간다 해도 3년을 넘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을 해도 권태기를 만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돌아서서 남남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피트니스 트레이너로 일하는 남자가 이쁘고 착한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였으나 결혼 후 점점 부인의 몸이 불어나고 살이찌자 운동을 권하고 몸 관리를 권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인은 그렇게 하는 남편이 점점 부담스러워지고 스트레스를 받아 더욱 몸이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아예 그와 같은 아내에게 관심을 끄고 피트니스에 나오는 날씬하고 이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을 알게 된 부인과 두 딸들은 남편을 쇠사슬로 결박하고 창고에 가둔 채 나흘 동한 물 한 모금 주지 않은 채 각목으로 구타를 하는 등 매우 심한 폭행을 가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관계 파탄으로 가게 되었고 부인은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이뻐서 그리고 좋아서 결혼까지 했는데 그들은 남보다 더 못한 비참한 관계 파탄을 맞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계를 지낸 인간의 사랑의 현주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조용히 묵상해 보면 참으로 별세계와 같은 아름다운 사랑을 보게 됩니다. 바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아가서는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미성년자들은 읽지 못하도록 금하였던 성경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적나라하고 구체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진 왕이요 지혜자요 권세자인 솔로몬이 시골 포도원에서 일이나 하고 있는 초라한 한 여인에게 사랑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왕궁에 있는 여인보다 어느 모로 보아도 더 이쁠 것이 없는 시골의 이름 없는 한 여인에게 솔로몬이 그토록 사랑에 빠진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학자들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을 하나님과 우리 성도들의 사랑에 비유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종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오늘 본문의 사랑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으로 정의하고 그 사랑의 깊이와 의미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 사랑을 어떻게 받고 또한 누려야 하는지?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은혜 받고 사랑 같은 따뜻한 봄날의 행복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랑을 아십니까?

솔로몬이 그토록 깊이 빠져버렸던 사랑의 대상은 시골 처녀 술람미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이 묘사해 놓은 그녀의 모습은 과히 그렇게 곱고 아름답지 만은 않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1: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 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라는 말씀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듯이 술람미 여인은 뜨거운 땡볕에서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로서 태양에 그을리고 형제들에게조차 미움을 받아서 포도원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노동이나 해야 하는 정도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을 향한 솔로몬의 사랑은 너무나도 확고하고 분명하며 진하기까지 합니다.

(1:9-10)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라는 표현들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술람미를 향한 솔로몬의 사랑에 조건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엄청 주관적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아름다우면 그건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 내가 이런 사랑을 받습니까? 할 정도로 우리 스스로가 생각해도 과분하고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진하고 불변한 하나님의 그 사랑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함께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우리 자신들에 대한 자긍심을 함께 고취해 볼 수 있다면 복된 은혜가 충만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랑덩어리입니다

 

도대체 우리들의 신분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우리들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OECD 중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자살률이 가장 높은 오명을 쓰고 있고 하루에 무려 43-46명이 자살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도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죽는 것일까요? 자긍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자살하는 사람들보다 더 보람 있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로 여기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아픈 가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게도 짧으면서도 이처럼 방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오고 있어서 잘 알지 않습니까? 苦海(고행)와도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감성을 가진 사람이 항상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숨은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존재의 근본을 바로 알아야만 하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는 하루 종일 웃습니다. 무려 하루에 3-400번 이상 웃는다고 합니다. 울 때도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우는 때는 딱 세 가지 이유뿐입니다.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를 갈아주지 못했거나 몸 어딘가가 아플 때입니다. 이것을 재외하고 나면 아이는 종일토록 웃습니다. 이것이 우리 어른들과 전혀 다른 현상입니다. 같은 인간인데 왜 아이는 항상 기뻐하는데 어른들은 기뻐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풀어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줄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쁨이 사라지고 슬픔과 고통이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가지 중요한 팁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린 아이와 같이 절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기만 하면 어린 아이들과 같이 우리는 모든 필요를 공급 받으면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대로 하는 사람들을 이 시대에 우리는 찾아보지 못합니다. 그 반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충족되면 그 때 가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겠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초라한 불신자들이 되어버렸을까요? 그 이유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우리들의 근본을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들의 근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남아 있습니다.

(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무엇입니까? 아직 우리들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들을 선택해 두시고 예정해 두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노사연씨는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고 노래를 불러 큰 히트를 쳤습니다. 대중가요 가사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더 더군다나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이와 같은 신령한 일이 우연하게 이루어졌겠습니까? 우리들이 그렇게 생각이라도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우리들을 이처럼 태초에 이미 선택하시고 예정해 두셨다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이 세상을 한 번 신나게 살아봐야 할 이유가 되는 진리입니다. 그렇게 선택하시고 예정해 두셨다가 하나님의 때가 되매 우리들을 불러 신자가 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8:30-31)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외롭고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생을 혼자서 힘겹게 살아갔지만 단 한 순간도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더 당당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 하나뿐인 소중한 그 생명까지도 다 내 놓은 채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는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임을 재인식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당당하게 사도 바울과 같이 목적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을 이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삶이 헛되지 않도록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맏아들이 된 사랑덩어리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맏아들입니다. 단순하게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버려진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구별하시고 독생자 예수님의 피를 묻혀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과 은총 속에서 살도록 빼내신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게 하신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8:28-29)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시대에 교회에는 다니고 각종 직분은 받아서 충성하고 있는데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근본인 이와 같은 진리를 모르고 있는 성도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긍심이 없는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잘난 것으로 탤런트도 되고 부자도 되고 성공도 하고 출세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으로 교만하고 그것으로 낙심하며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비록 술람미 여인이 왕궁에 있는 여인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지만 솔로몬이 왕궁에 있는 그 모든 여인들보다 술람미 여인을 더 사랑했던 것은 어떤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술람미 여인의 있는 그대로를 그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고 그 맏아들이 누리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며 큰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들의 공로가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기록해 두셨습니다.

(8:14-16)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전혀 우리들의 공로와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만의 특권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이와 같은 비밀 아닌 비밀을 가슴으로 새기고 자긍심을 가지고 감사하며 삶의 승리자로 우뚝 서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아들인 우리들에게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슴으로 터득했던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짧은 한 말씀으로 확신을 가지고 평생을 승리하는 무기로 삼았드랬습니다.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는 말씀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자신의 맏아들로 삼아주시고 그 아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까지 내어 주셨는데 그런 우리들을 위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 예수님께서도 또한 다른 차원에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7:9-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은총을 구별되게 누릴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 어린 소녀가 새 가정으로 입양되어 왔습니다. 그 아이는 전에 살던 고아원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새 어머니가 그 아이에게 큰 유리잔에 우유를 주시며 마시라 하셨습니다. 그 작은 소녀는 손에 우유 잔을 들고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 보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마시면 되는지 말씀해 주세요."(고아원에서는 한 잔의 우유를 혼자서 다 마시지 못하고 다른 아이와 나누어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아니야, 그것을 다 마셔라. 더 이상 너는 고아원에 있지 않아. 너는 이제 우리 딸이 된 거야. 그것이 다 네 것이란다. 다 마시도록 해라. 그리고 우유 통에는 우유가 더 있단다. 얼마든지 더 마셔도 된단다." ,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내가 얼마나 마실 수 있을까요?"하고 말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연민의 마음으로 우리를 내려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 사랑하는 자녀여, 나는 너의 하늘 아버지란다. 그것을 다 마셔라! 다 마시도록 하거라. 다 마셔도 돼. 아직도 우유 통에는 우유가 얼마든지 있단다." 우리도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모르고 불신앙으로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족한 이 종은 오직 이와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의심 없이 넘치는 복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단 한 순간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맏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풍성한 자부심으로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천국을 상속 할 사랑덩어리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이 세상에 그 무엇이 우리들에게 유익할까요? 단 한 가지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 어떤 것도 다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이 잔인한 죽음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한 말씀을 친히 남겨 두셨습니다.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고 말입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우리들이 그 어떤 궤변으로 죽음을 미화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과연 목숨보다 오늘 우리들에게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숨을 우리들 스스로 어떻게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의 비극인 것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도 이 목숨을 이 땅에서 영원히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드시 이 육신의 생명은 때가 되면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우리들의 신분이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실감나는 때가 바로 누구나 떠나야 하는 생의 마지막 순간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죽어도 다시 살며 그렇게 또 다시 사는 삶은 천국에서 영원복락을 누릴 것이라는 확신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또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는 이 사실의 마지막 축복이 하늘나라 즉 천국을 상속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른편으로 구별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맏아들이고 그 맏아들이라는 의미는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막연하게 천국에 갈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분명하게 주님께서 선포해 놓으신 말씀과 같이 우리는 천국을 상속 받아 그곳에서 영원복락을 누리는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참으로 아름답고 황홀한 계절을 맞고 있습니다. 모든 메마른 나무에서 푸르른 엽록체가 피어나고 모든 꽃들이 만개하며 따스한 햇볕이 죽었던 몸과 마음이라도 살려낼 듯 원기왕성하게 대지를 살려내고 있는 그런 계절을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사랑 이야기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사랑을 주고받지 못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가진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랑이 없다면 달콤한 말도,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믿음도, 열정도 다 의미가 없다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고전13:1-3참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솔로몬은 과연 멋진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그의 이와 같은 개인적인 사랑이 성경이 되어 오늘 우리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사랑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조건 없이 주고받는 그런 사랑을 말입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을 배우지 못했고 또한 깨닫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봄이라는 계절은 바로 이와 같은 깊은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우리들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메마른 가슴을 활짝 열고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고귀한 것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사랑을 위해 사는 그런 멋쟁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도 소중하고 소망도 귀하지만 그 보다 더 귀하여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들의 삶이 그렇게 녹녹치 못하고 힘들고 지치고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히 우리들이 가슴에 품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와 같은 사랑을 가슴으로 깨닫고 그 품에 안겨 감사하며 생의 꿈을 되찾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오신 우리 모든 빌립보의 성도님들은 이와 같은 깊은 사랑으로 심호흡을 하고 새로운 소망으로 심장이 고동치는 그런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6410

주일 낮 예배 설교 말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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