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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12일 주일낮설교 (믿음은 참는 것입니다!)

믿음은 참는 것입니다!

6. 12, 2016

本文:마태복음15:21-28

:

 

어린 아이가 엄마 치마폭에 매달려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신기합니다. 무슨 배짱으로 그 비싼 장난감을 사달라고 그렇게도 당당하게 조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렇게도 염치없이 매달리는데도 엄마는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장난감집으로 가서 사준다는 것입니다. 부모 없이 자란 아이들은 이와 같은 모습만 보아도 주눅이 들고 기가 죽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고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보면 이와 같은 장면들이 연상이 되고 참으로 좋은 관계와 믿음은 기적을 만들어 낼 수도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가진 가련한 한 엄마가 그 아이를 고쳐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서슴없이 아이를 데리고 그 예수님 곁으로 달려옵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외칩니다. “우리 아이가 흉악한 귀신에 들렸습니다. 예수님, 제발 우리 아이를 좀 고쳐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수님의 반응은 너무나도 냉정하였습니다. 거들 떠 보지도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모습을 본 제자들은 한 술 더 떠서 저 여자가 자꾸만 시끄럽게 굴고 있으니 쫓아버리시지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 이상으로 주님께 애원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오로지 딸아이의 귀신만 내어 쫓아주기를 소망하고 또 바랐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참으며 끈질기게 애원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은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소자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주신 마지막 축복이었기 때문입니다.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종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는 하나의 공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부르짖고 애원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도 마치 어린 아이가 뜬금없는 배짱으로 다짜고짜 비싼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과 같이 오늘 본본 속의 주인공처럼 주님께 애원할 줄 아는 열정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희한하게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간절한 애원을 믿음으로 인정해 주시고 그 믿음에 걸 맞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참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름 없는 한 여인의 애절한 부르짖음에 감동을 받는 것은 주님께서 그 어떤 반응을 보여주셔도 전혀 개의치 않고 끝까지 부르짖고 애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 여인을 향하여 와 같은 취급을 하셔도 이 여인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그 여인은 자녀들인 이스라엘 백성에 비해 개와 같은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의 대답은 실로 가슴을 찡하게 울려 줄 만큼 애절합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비로소 주님께서 이 여인의 이와 같은 대답을 들으시고 나서 선언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들도 이 이름 없는 여인을 통해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속절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하고도 간절하게 주님께 매달리고 애원하는 복된 믿음의 덕목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이처럼 가슴으로 매달리고 애원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진정한 믿음은 무관심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모들은 자식의 행복으로 기뻐하고 자식으로 인해 또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부모와 자식은 불과분리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이름 없는 여인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 사람 구실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방법을 다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효험을 보지 못하다가 마침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막무가내로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있는 힘을 다해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22) 하고 말입니다. 애타는 마음으로 소리소리 질렀으나 불행하게도 그녀는 주님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부르짖고 외쳤지만 예수님은 묵묵부답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5:22-23)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철저히 그 여인의 부르짖음에 무관심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도 시끄러우니 저 여자 좀 쫓아내 주시라고 간청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견딜 수 없는 아픔이요 슬픔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가 바로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외쳐도 돌아보는 이 하나 없고 아무리 두들겨도 관심을 보이는 이가 없습니다. 백주 대로에서 폭행을 당해 피투성이가 되어도 말리는 사람 하나 없고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그냥 강 건너 등불 보듯 지켜보고만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중국에서 이와 같은 사건이 있었는데 범세계적으로 충격을 주는 끔찍한 무관심이었습니다.

지난 달 30일 중국 허난 성 카이펑 시에서 60대 남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지나다 쏟아진 폭우로 불어난 물에 미끄러져 오토바이와 함께 물에 넘어 졌으나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쳐다만 보고 있을 뿐 그 누구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아 결국 죽은 사건이 발생해 중국은 물론이고 온 세계 사람들의 원성을 산 적이 있었습니다. 이웃의 불행과 아픔에 무관심 하는 정도가 도를 넘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무관심을 예수님께서도 직접 비판하셨는데 그것이 성경에도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11:16-17)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약자와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은 엄청 더 큰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환경을 극복하는 것은 그렇게도 어렵고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선 이 여인은 그와 같이 무서운 무관심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부르고 매달리고 호소하였습니다. 흉악한 귀신에 들린 딸을 보면서 당하는 엄마의 쓰리고 아픈 가슴을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부르고 호소하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기적을 보는 놀라운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어떠한 환경과 여건 하에서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예수님을 찾고 부르짖는 믿음의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진정한 믿음은 무시를 당하여도 참아내는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무관심으로 일관하시던 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뜻밖에도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라는 말씀이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네 사정은 딱하다만 나는 너 같은 사람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안타깝게 도움을 구하고 있는 여인의 입장에서는 철저히 무시를 당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를 당하고도 무덤덤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민교회가 한국교회 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민목회가 힘들고 어려운 것은 이민생활 속에서 남모르게 당하는 무시와 무관심에서 오는 충격과 스트레스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주류사회에서 언어와 문화와 현실 앞에서 당하는 어쩔 수 없는 숱한 무시와 무관심의 충격이 생활 속에서 가슴 속에 내재되어 있다가 교회에 와서 폭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아닌 일도 감정이 격해지고 고성이 오가고 심지어는 폭력까지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종로에서 뺨 맞고 청량리에서 분풀이 하는 전이감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절대로 말조심을 해야 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네가 감히 나를 무시해?” 하게 되면 큰 일 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무시당하는 일에 우리는 익숙해 있지 않고 내심 스스로 잘났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여인이 당했을 모욕감이 어떠하였을지 그래서 우리는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고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사랑의 예수님께 귀신 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 찾아와 호소하였건만, “너 같은 사람을 위해 내가 온 것이 아니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그 절망감과 그 모욕감이 과연 어떠하였을는지, 충분히 연상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참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가슴을 슬어 내리고 심호흡을 한 다음 정중하게 그 주님 앞에 엎드려 호소하였습니다.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광경을 연상하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과연 이 여인은 훌륭한 인격을 가졌구나!” 하고 말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무시와 모욕을 이기지 못해 소중한 내일을 포기하고 던져버리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청년 실업률은 거의 12%에 육박하고 있고 대학까지 공부시켜 놓은 자식들이 취직을 하지 못하고 빈둥거리자 부모자식 간에 엄청난 충격과 불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모든 인맥을 다 동원해 자식을 대기업에 취직시키기 위해 수천만 원씩 뇌물을 주고 사기를 당하는 일들 또한 속출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버지가 퇴근 하실 때 쯤 되면 엄마는 취직 못한 아들과 딸을 집 밖으로 내 쫓습니다. 집에서 빈둥거리는 꼴을 퇴근한 아버지가 보면 역정을 내실까봐 두려워서 말입니다. 현실이 이 지경인데도 기업에 취직을 한 4명 가운데 한 명은(25%) 취직한 지 6개월 이내에 직장을 그만 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처럼 상사가 주는 모욕감이나 무시하는 언행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그것도 하나 처리 못해?”, “, 넌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난 너같이 무식한 놈은 처음이야!”, 등등 견딜 수 없는 모욕으로 무시를 당할 때 도저히 그 분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이 여인을 한 번 보십시오. 주님께서 그렇게 무시하고 모욕을 주는데도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오히려 그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하며 애결하고 있으니 진한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믿음의 덕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 앞에 엎드려지는 겸손과 애절함이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아주 작은 것에도 토라지고 삐지고 돌아서는 현 시대의 모습들은 그저 이 여인 앞에서 초라하고 못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포기하고 너무 쉽게 돌아서고 너무 쉽게 깨버리는 우리들의 조급함은 결코 하늘의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조급하고 수양되지 못한 인격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름 없는 이 여인의 겸손과 애절한 마음을 본 받아 끝까지 엎드러지고 끝까지 부탁하고 끝까지 참아내는 그런 멋진 믿음의 덕을 갖추어서 이 여인과 같은 기적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어떤 모욕도 참아내는 것입니다

절절히 호소하며 매달리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참으로 무정하리만큼 매정하게 대하시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참아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말씀을 던지셨기 때문입니다.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예 이 여인을 개에다 비유하셨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웬만한 사람 같으면 다 주님 곁을 떠나갈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애걸복걸하는데 급기야는 에까지 비유하며 모욕을 주시는 데야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여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고 대답하며 끝까지 주님의 것을 사모하고 기대하였습니다. 참으로 존경 받고 축복 받아야 마땅한 고백이요 신앙이요 인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두 말 하지 않으시고 그녀에게 놀라운 축복을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이 여인이 무엇을 원하고 있고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다 아시면서도 그녀의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테스트 해 보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조급하고 자기중심적인 우리들은 오늘 예수님을 보고 배우고 깨닫는 역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들의 인격과 신앙을 시험해 보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 누구라서 이처럼 비인격적인 모욕을 당하고서도 묵묵히 견뎌내며 믿음의 덕목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거의 대부분이 포기하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일찍이 중요한 구원의 지름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선포해 주셨던 것입니다.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이처럼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면서 믿음의 덕을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하시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당하신 모욕을 죄인 된 우리들이 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역사에 스탠톤이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 링컨의 활동에 대해 늘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에 출마하자 스탠톤은 링컨의 수염을 빗대 고릴라 대통령을 세울 바에야 아프리카에 가서 고릴라 한 마리를 사오는 게 낫겠다.” 라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대통령이 된 후 그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후에 링컨이 총에 맞고 쓰러졌을 때 스탠톤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여기 누워 있는 이 분은 인류가 소유할 수 있었던 최고의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위대한 인물은 모욕을 참고 견디며 자신의 위대한 사명을 완수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인간적으로는 링컨을 생각하면서,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어떤 모욕과 무시도 이겨내는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현충의 달 6월을 맞아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희생하면서 큰 역사를 이 땅에 만들어 놓았던 위대한 인물들처럼 멋지고 열매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믿음이 구체적으로 우리들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 되어야 하는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름조차도 없는 한 여인이지만 그녀의 위대한 믿음은 견딜 수 없는 숱한 모욕과 무시와 무관심 속에서도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여인과 같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그 주님의 은총을 덧입기 위해 그 어떤 것도 견뎌내고 참으며 엎드려 경배 드리는 순수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도 그 예수님을 배우지 못해 스스로 망하고 말았던 역사를 우리는 결단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나이 백세에 얻은 아들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기꺼이 바쳐드릴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믿음으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는 준비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오늘 우리들도 아브라함과 같이 여호와 이래의 축복을 누리며 오늘 본문의 이름 없는 여인과 같이 마음의 소원을 허락 받는 놀라운 기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피상적이거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분명하게 배웠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감정과 유익과 자존을 내려놓고 겸손히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질 수 있을 때 비로소 믿음을 인정받게 되고 기적 같은 축복을 누릴 수 있음을 분명하게 배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예배자로 구별된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처럼 아름다운 믿음으로 주님의 기적을 보시는 진정한 멋쟁이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리는 바입니다. 아멘

주후 201665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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