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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6년 6월 19일 주일낮설교 (믿음은 확신입니다!)

2016년 6월 19일 주일낮설교 (믿음은 확신입니다!)

믿음은 확신입니다!

6. 19, 2016

本文:마가복음5:25-34

:

 

일본에서 클리닝회사인 히꾸요오샤라는 세탁공장을 창립 하였던 고 이가라시 겐지 선생의 간증이 있습니다. 청년시절 무일푼인 채 하꼬떼 지방의 친구를 믿고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가보니 그 친구는 그곳에 없고 해는 저물고 굶주림과 피로 속에서 선생은 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당장 그 밤의 숙소도 없지만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 기쁨은 기도 응답의 확신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기도를 응답해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 막막한 형편에서 하나님의 어떤 방법으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는지 몹시 궁금하면서 흥미 있었고 그것을 보게 될 것을 생각하니 매우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둠 속의 뒤쪽에서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그곳에서 세탁소를 하는 주인이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겐지 선생은 먹을 것과 잘 곳을 얻었고 일자리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선생은 다른 일을 10년간 했지만 결국 10년 후에는 다시 세탁업을 시작하여 대성하였습니다. 배고프고 막막한 형편에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한 그 기도는 후일 그의 대성공의 길까지 열어 놓는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성도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인도하시고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한 여인의 삶이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녀는 무려 12년 동안이나 피를 흘리며 살아야 했던 혈루증 환자였습니다. 병원이란 병원은 다 다녀보고 잘 고친다는 의사란 의사는 다 만나 보았지만 12년 동안 병은 고치지도 못한 채 재산만 다 날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자신의 지방으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그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그 예수님이시라면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안고 말입니다. 하지만 감히 자신의 병을 안고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피를 흘리는 자신의 병은 부정한 병으로 낙인이 찍혀 대중 속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부끄러운 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도 몰래, 심지어는 주님도 모르시게 조용히 나아가 주님의 옷자락만 만지기로 작정합니다. 그렇게 하여도 충분히 자신의 병이 나을 줄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5:27-28)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자신의 몸에서 혈루가 멈추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12년 동안이나 앓던 그 지긋지긋하던 혈루병에서 깨끗이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시면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한 가지 확신만으로 예수님께로 나아왔다가 기적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여인의 이와 같은 확신을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5: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믿음은 바로 확신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확신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확신이 넘치는 믿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 함께 공부하면서 풍성한 은혜를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은 확신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혈루증 여인은 오직 예수님에 관한 확신 하나로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찾아 갔다가 결국은 기적을 본 행운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고통의 늪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고귀한 말씀입니다. 아무리 열쇠가 많이 있어도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인생 여정에서 당하는 숱하게도 많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님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그 예수님으로부터 기적을 볼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에 관한 해답을 오늘 본문에서 여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인정해 주시는 믿음을 소유하여야 합니다. 과연 이 여인은 어떻게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그런 복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그 믿음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지, 함께 그 해답을 찾아 문제를 해결 받고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예수님의 기적이 현실화 되는 놀라운 역사를 함께 만들어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은 절망을 극복하게 합니다

이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절망을 극복하는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밝히 증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여인은 한 가지 질병으로 무려 12년을 앓으며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불운의 인물이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질병을 해결 해 보려고 그녀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치료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허무한 절망뿐이었습니다.

(5: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과연 무엇을 보며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12년 동안 병을 고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그 여인이 얻은 것은 많은 괴로움과 많은 재산의 허비였으며 그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병이 낫기는커녕 더욱 중하여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절망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늪과 같이 허우적거리면 더욱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절망의 현장이 바로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 많으신 우리 예수님은 이와 같은 우리들을 부르시고 소망의 길을 제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입니다.

개그맨 이동우씨가 결혼한 지 100일 만에 망막 색조 변색증이라는 희귀한 불치병에 걸려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인생에 이보다 더 청천병력과 같은 시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갓 결혼하여 인생의 푸른 꿈을 꾸며 행복에 젖어야 할 바로 그 때에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다는 장님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인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연을 들은 대전에 사는 한 40대 남성이 눈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겠습니까? 그래서 단숨에 대전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동우씨는 눈을 기증 받지 않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동우씨의 고백이 감동이었습니다. “비록 눈을 기증 받지 않았지만 기증 받은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분은 저에게 더 좋은 눈을 주시어 더 좋은 세상을 바라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동우씨가 단걸음으로 대전에 가서 눈을 기증하겠다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은 근육병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근육병이란 근육이 점점 약하여져 가는 유전 질환으로 보행이 불가능해지고 호흡이 점점 불가능해지며 심장 기능이 또한 약하여져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되는 무서운 질병으로 그 사람은 눈 외에는 성한 곳이 없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으로부터 어떻게 눈을 받아 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동우씨는 그분의 따뜻한 마음과 세상을 보는 신선한 감동만 받고 그냥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삶의 단면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여 도움 받으러 갔더니 그 사람은 더 큰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 이와 같은 현실 말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분들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여인과 같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적극적인 믿음이 있다면 삶의 현실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똑바로 만나고 실패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삶의 현실에 절망의 늪이 드리워지기 전에 생명이요 길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은 절망을 넘어 기적과 같은 삶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은 확신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12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절망과 좌절의 늪에 빠져 시간과 재물과 청춘을 다 허비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소망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만 만나면 회복의 기적을 볼 수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5:27-28)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 이와 같은 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다거나 예수님께서 만져주신다거나 예수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신다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은 많았지만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이곳 외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확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적국인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 나아만의 사건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문둥병에 걸려 이스라엘에 용하다는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 왔을 때 엘리사가 그러하였습니다. “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을 하고 가시오.” 하고 단 한 마디의 말만 던져주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건방지고 오만한 나아만은 노발대발 하였습니다. 감히 내가 누구인데 이처럼 정성을 들여 환부를 어루만지며 고쳐주지 아니하고 강에 가서 씻으라고만 하느냐고 말입니다.

(왕하5:11-12)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오만한 인간의 단면인 것입니다. 절대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병든 몸이면서도 이처럼 오만하게 화를 내는 것은 아직 절대자가 누구인지, 그 절대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인간적인 생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의 여인은 그 얼마나 놀라운 확신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 여인과 같은 확신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일찍이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 나왔던 아버지에게 이것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곧 확신입니다. 이와 같은 확신이 있을 때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시고 그 확신에 걸맞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가복음 1046절 이하에 보면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거지 바디메오의 믿음을 깊이 평가하시고 그 소원을 들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소경은 예수님만 만나게 되면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을 줄 믿고 그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찾아 부르짖고 또 호소하였습니다.

(10:47-48)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 소경은 어떻게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입을 가로 막고 구박하며 방해 하는데도 굴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부르짖어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을까요? 그 해답은 오직 하나, 예수님을 만나면 기적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와 같은 확신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고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0:49-5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소경의 이와 같은 확신과 열정을 예수님은 의심 없이 믿음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확신은 곧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은 확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된다는 확신! 예수님께서 함께해 주시면 가능하다는 확신! 예수님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확신! 바로 이와 같은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여인과 같이 고통당하는 안타까운 인생들의 모습들을 성경에 기록하시고 오늘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굳은 믿음의 확신으로 주님을 찾고 기적을 회복하라고 말입니다.

믿음은 용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름 없는 병든 여인의 놀라운 용기를 목도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피를 흘리는 자신의 부정한 몸 그대로 예수님을 찾아 다가서는 무서운 모습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지위가 남자보다 우위인 지금도 이처럼 하기가 가히 쉽지 않을 터인데 여자가 남자 앞에 서는 것이 금지 되어 있던 그 당시에서는, 더 더군다나 피를 흘리는 부정한 혈루병을 앓고 있는 여인에게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그 여인은 당당하게 해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유출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함부로 남을 만지도록 허용되지 않고 있는 율법이 버젓이 적용되고 있던 시절에 말입니다.

(15:11)

유출병 있는 자가 물로 손을 씻지 아니하고 아무든지 만지면 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러한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이 여인의 행동은 보통 남자도 감히 할 수 없는 놀라운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오직 하나 병을 고쳐야 되겠다는 일념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찾아가 만나야 한다는 확신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용기인 것입니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가 존재의 용기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 용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깊이 있게 고찰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용기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아십니까? 용기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이 있어야 용기도 있습니다. 인간이 믿음이 없으면 비겁해집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대했을 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인 장군을 두려워하며 벌벌 떨 때 어린 소년 다윗은 골리앗을 겁내지 않고 담대히 나가 싸웠습니다. 사울 왕을 비롯한 이스라엘 병사들은 비겁했습니다. 어린 소년이 나가서 싸우겠다고 했을 때 투구를 씌우고 갑옷을 입히고 칼을 채워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나약함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어린 소년인 다윗보다 용기가 없는 어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대한 골리앗이 칼과 단창을 들고 당당하게 앞에 서 있는데도 오직 물맷돌만 들고 나갔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양을 칠 때 곰과 사자를 이겨내게 해 주셨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만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진정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의 전정한 용기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다음과 같은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삼상30:1-6)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제 삼일에 시글락에 이를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는 말씀 속에서 다윗이 인생 최악의 위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용기를 얻고 그와 같은 위기를 이겨 냈는지 성경은 이렇게도 생생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이 절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기는 믿음 있는 자의 필수조건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실제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용기를 얻어 다시 아말렉을 공격하였고 잃었던 모든 것들을 다시 찾아냈던 것입니다.

(삼상30:17-20)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치매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의 취하였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의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대소를 물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또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무리가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가로되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 하였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믿음이 우리 속에 있는지의 여부는 우리에게 용기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악하고 또한 험악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너무나도 위축되고 연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환경을 초월하여 예수님께 당당히 나아왔던 여인과 같이, 그리고 그 어떠한 위기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덧입고 목숨을 내 놓고 당당하게 전쟁터에 나아가 승리하고 돌아 왔던 다윗과 같이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용기로 세상을 이기고 정복하는 그런 멋들어진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믿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조석으로 변화되어 가는 세속화의 거대한 물결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세상에 다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현충의 달 6월을 맞아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다시 세워 갈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이름 없는 여인은 몹쓸 혈루증으로 12년이라는 세월을 낭비하고 세월과 시간만이 아니라 재물과 육체까지도 다 망가져버린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위기와 절망 속에서 믿음을 만들어 냈고 그 믿음으로 예수님이시면 능히 자신의 작은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실 줄 믿고 당당하게 용기를 내어 그 예수님을 찾아 갔다가 기적을 체험한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믿음을 만들어 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곧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무너지지 아니하고 다시 주님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것이요, 예수님만 만나게 되면 그 어떤 문제도 능히 해결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주님을 찾아 나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가로 막는 그 어떤 난관이라도 믿음이라는 용기로 능히 극복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당당하게 승리하는 그런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귀한 날 예배자로 부르심을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몸과 마음과 예물을 바쳐 예배드리는 빌립보의 모든 권속들은 바로 이와 같은 벅찬 믿음으로 하늘의 기적을 이 땅에 심어 놓는 그런 멋쟁이들이 다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6619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6. 12, 2016

本文:마태복음15:21-28

:

 

어린 아이가 엄마 치마폭에 매달려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신기합니다. 무슨 배짱으로 그 비싼 장난감을 사달라고 그렇게도 당당하게 조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렇게도 염치없이 매달리는데도 엄마는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장난감집으로 가서 사준다는 것입니다. 부모 없이 자란 아이들은 이와 같은 모습만 보아도 주눅이 들고 기가 죽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고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보면 이와 같은 장면들이 연상이 되고 참으로 좋은 관계와 믿음은 기적을 만들어 낼 수도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가진 가련한 한 엄마가 그 아이를 고쳐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서슴없이 아이를 데리고 그 예수님 곁으로 달려옵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외칩니다. “우리 아이가 흉악한 귀신에 들렸습니다. 예수님, 제발 우리 아이를 좀 고쳐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수님의 반응은 너무나도 냉정하였습니다. 거들 떠 보지도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모습을 본 제자들은 한 술 더 떠서 저 여자가 자꾸만 시끄럽게 굴고 있으니 쫓아버리시지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 이상으로 주님께 애원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오로지 딸아이의 귀신만 내어 쫓아주기를 소망하고 또 바랐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참으며 끈질기게 애원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은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소자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주신 마지막 축복이었기 때문입니다.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 종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는 하나의 공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부르짖고 애원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도 마치 어린 아이가 뜬금없는 배짱으로 다짜고짜 비싼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과 같이 오늘 본본 속의 주인공처럼 주님께 애원할 줄 아는 열정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희한하게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간절한 애원을 믿음으로 인정해 주시고 그 믿음에 걸 맞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참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름 없는 한 여인의 애절한 부르짖음에 감동을 받는 것은 주님께서 그 어떤 반응을 보여주셔도 전혀 개의치 않고 끝까지 부르짖고 애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 여인을 향하여 와 같은 취급을 하셔도 이 여인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그 여인은 자녀들인 이스라엘 백성에 비해 개와 같은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의 대답은 실로 가슴을 찡하게 울려 줄 만큼 애절합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비로소 주님께서 이 여인의 이와 같은 대답을 들으시고 나서 선언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고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들도 이 이름 없는 여인을 통해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속절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하고도 간절하게 주님께 매달리고 애원하는 복된 믿음의 덕목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이처럼 가슴으로 매달리고 애원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진정한 믿음은 무관심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모들은 자식의 행복으로 기뻐하고 자식으로 인해 또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부모와 자식은 불과분리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이름 없는 여인 또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려 사람 구실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방법을 다 찾아보았지만 아무런 효험을 보지 못하다가 마침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막무가내로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있는 힘을 다해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22) 하고 말입니다. 애타는 마음으로 소리소리 질렀으나 불행하게도 그녀는 주님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부르짖고 외쳤지만 예수님은 묵묵부답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5:22-23)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철저히 그 여인의 부르짖음에 무관심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도 시끄러우니 저 여자 좀 쫓아내 주시라고 간청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견딜 수 없는 아픔이요 슬픔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가 바로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외쳐도 돌아보는 이 하나 없고 아무리 두들겨도 관심을 보이는 이가 없습니다. 백주 대로에서 폭행을 당해 피투성이가 되어도 말리는 사람 하나 없고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그냥 강 건너 등불 보듯 지켜보고만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중국에서 이와 같은 사건이 있었는데 범세계적으로 충격을 주는 끔찍한 무관심이었습니다.

지난 달 30일 중국 허난 성 카이펑 시에서 60대 남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지나다 쏟아진 폭우로 불어난 물에 미끄러져 오토바이와 함께 물에 넘어 졌으나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쳐다만 보고 있을 뿐 그 누구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아 결국 죽은 사건이 발생해 중국은 물론이고 온 세계 사람들의 원성을 산 적이 있었습니다. 이웃의 불행과 아픔에 무관심 하는 정도가 도를 넘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무관심을 예수님께서도 직접 비판하셨는데 그것이 성경에도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11:16-17)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약자와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은 엄청 더 큰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환경을 극복하는 것은 그렇게도 어렵고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선 이 여인은 그와 같이 무서운 무관심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부르고 매달리고 호소하였습니다. 흉악한 귀신에 들린 딸을 보면서 당하는 엄마의 쓰리고 아픈 가슴을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부르고 호소하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기적을 보는 놀라운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어떠한 환경과 여건 하에서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예수님을 찾고 부르짖는 믿음의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진정한 믿음은 무시를 당하여도 참아내는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무관심으로 일관하시던 예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뜻밖에도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라는 말씀이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네 사정은 딱하다만 나는 너 같은 사람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안타깝게 도움을 구하고 있는 여인의 입장에서는 철저히 무시를 당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를 당하고도 무덤덤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민교회가 한국교회 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민목회가 힘들고 어려운 것은 이민생활 속에서 남모르게 당하는 무시와 무관심에서 오는 충격과 스트레스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주류사회에서 언어와 문화와 현실 앞에서 당하는 어쩔 수 없는 숱한 무시와 무관심의 충격이 생활 속에서 가슴 속에 내재되어 있다가 교회에 와서 폭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아닌 일도 감정이 격해지고 고성이 오가고 심지어는 폭력까지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종로에서 뺨 맞고 청량리에서 분풀이 하는 전이감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절대로 말조심을 해야 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네가 감히 나를 무시해?” 하게 되면 큰 일 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무시당하는 일에 우리는 익숙해 있지 않고 내심 스스로 잘났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여인이 당했을 모욕감이 어떠하였을지 그래서 우리는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고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사랑의 예수님께 귀신 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 찾아와 호소하였건만, “너 같은 사람을 위해 내가 온 것이 아니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그 절망감과 그 모욕감이 과연 어떠하였을는지, 충분히 연상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참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가슴을 슬어 내리고 심호흡을 한 다음 정중하게 그 주님 앞에 엎드려 호소하였습니다.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광경을 연상하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과연 이 여인은 훌륭한 인격을 가졌구나!” 하고 말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무시와 모욕을 이기지 못해 소중한 내일을 포기하고 던져버리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청년 실업률은 거의 12%에 육박하고 있고 대학까지 공부시켜 놓은 자식들이 취직을 하지 못하고 빈둥거리자 부모자식 간에 엄청난 충격과 불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모든 인맥을 다 동원해 자식을 대기업에 취직시키기 위해 수천만 원씩 뇌물을 주고 사기를 당하는 일들 또한 속출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버지가 퇴근 하실 때 쯤 되면 엄마는 취직 못한 아들과 딸을 집 밖으로 내 쫓습니다. 집에서 빈둥거리는 꼴을 퇴근한 아버지가 보면 역정을 내실까봐 두려워서 말입니다. 현실이 이 지경인데도 기업에 취직을 한 4명 가운데 한 명은(25%) 취직한 지 6개월 이내에 직장을 그만 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처럼 상사가 주는 모욕감이나 무시하는 언행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그것도 하나 처리 못해?”, “, 넌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난 너같이 무식한 놈은 처음이야!”, 등등 견딜 수 없는 모욕으로 무시를 당할 때 도저히 그 분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이 여인을 한 번 보십시오. 주님께서 그렇게 무시하고 모욕을 주는데도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오히려 그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하며 애결하고 있으니 진한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믿음의 덕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 앞에 엎드려지는 겸손과 애절함이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아주 작은 것에도 토라지고 삐지고 돌아서는 현 시대의 모습들은 그저 이 여인 앞에서 초라하고 못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포기하고 너무 쉽게 돌아서고 너무 쉽게 깨버리는 우리들의 조급함은 결코 하늘의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조급하고 수양되지 못한 인격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름 없는 이 여인의 겸손과 애절한 마음을 본 받아 끝까지 엎드러지고 끝까지 부탁하고 끝까지 참아내는 그런 멋진 믿음의 덕을 갖추어서 이 여인과 같은 기적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어떤 모욕도 참아내는 것입니다

절절히 호소하며 매달리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참으로 무정하리만큼 매정하게 대하시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참아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말씀을 던지셨기 때문입니다.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예 이 여인을 개에다 비유하셨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웬만한 사람 같으면 다 주님 곁을 떠나갈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애걸복걸하는데 급기야는 에까지 비유하며 모욕을 주시는 데야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여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고 대답하며 끝까지 주님의 것을 사모하고 기대하였습니다. 참으로 존경 받고 축복 받아야 마땅한 고백이요 신앙이요 인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더 이상 두 말 하지 않으시고 그녀에게 놀라운 축복을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이 여인이 무엇을 원하고 있고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다 아시면서도 그녀의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테스트 해 보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조급하고 자기중심적인 우리들은 오늘 예수님을 보고 배우고 깨닫는 역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들의 인격과 신앙을 시험해 보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 누구라서 이처럼 비인격적인 모욕을 당하고서도 묵묵히 견뎌내며 믿음의 덕목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거의 대부분이 포기하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일찍이 중요한 구원의 지름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선포해 주셨던 것입니다.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이처럼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면서 믿음의 덕을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하시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당하신 모욕을 죄인 된 우리들이 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역사에 스탠톤이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 링컨의 활동에 대해 늘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에 출마하자 스탠톤은 링컨의 수염을 빗대 고릴라 대통령을 세울 바에야 아프리카에 가서 고릴라 한 마리를 사오는 게 낫겠다.” 라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대통령이 된 후 그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후에 링컨이 총에 맞고 쓰러졌을 때 스탠톤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여기 누워 있는 이 분은 인류가 소유할 수 있었던 최고의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위대한 인물은 모욕을 참고 견디며 자신의 위대한 사명을 완수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인간적으로는 링컨을 생각하면서,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어떤 모욕과 무시도 이겨내는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현충의 달 6월을 맞아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희생하면서 큰 역사를 이 땅에 만들어 놓았던 위대한 인물들처럼 멋지고 열매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믿음이 구체적으로 우리들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 되어야 하는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름조차도 없는 한 여인이지만 그녀의 위대한 믿음은 견딜 수 없는 숱한 모욕과 무시와 무관심 속에서도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여인과 같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그 주님의 은총을 덧입기 위해 그 어떤 것도 견뎌내고 참으며 엎드려 경배 드리는 순수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도 그 예수님을 배우지 못해 스스로 망하고 말았던 역사를 우리는 결단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나이 백세에 얻은 아들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기꺼이 바쳐드릴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믿음으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는 준비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오늘 우리들도 아브라함과 같이 여호와 이래의 축복을 누리며 오늘 본문의 이름 없는 여인과 같이 마음의 소원을 허락 받는 놀라운 기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피상적이거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분명하게 배웠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감정과 유익과 자존을 내려놓고 겸손히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질 수 있을 때 비로소 믿음을 인정받게 되고 기적 같은 축복을 누릴 수 있음을 분명하게 배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예배자로 구별된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처럼 아름다운 믿음으로 주님의 기적을 보시는 진정한 멋쟁이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리는 바입니다. 아멘

주후 201665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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