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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31일 주일낮설교 (기도로 승부하라!)

기도로 승부하라!

7. 31, 2016

本文:사도행전10:1-6

:

 

미국 노스웨스트 대학 창설자인 버터 필드 박사의 간증입니다. 그가 대학을 세우기 전에 부흥사로서 복음을 전할 때였습니다. 어느 도시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그 교회의 노인 부부 집에 숙소를 정했습니다. 그들 노인 부부는 음식

솜씨도 신통치 않았고, 침대도 훌륭한 것이 아니어서 교회 제직들이 걱정을 하다가

부흥사 숙소를 새로이 마련하여 옮겨 가기를 권했습니다. 새로운 숙소는 집도 크고 넓은 정원에다가 부유하게 사는 젊은 부부의 집이었습니다. 버터 필드 박사는 그러나 옮기기 전에 이 문제를 놓고 먼저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하찮은 문제를 두고 기도를 하시다니... 제직들은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 제가 젊은 부부가 사는 집으로 옮겨도 되겠습니까? 아니면 이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기도하는 중에 그의 마음속에는 누가복음 107절이 떠올랐습니다.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버터 필드 박사는 제직들에게, “이미 이곳에서 여장을 풀었으므로 다소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집회가 끝날 때까지 여기에 머물겠습니다.” 하고 숙소를 옮기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며칠 뒤였습니다. 아직 집회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옮기려던 그 집에 장티푸스가 발생하여 1개월 동안 출입금지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버터 필드 박사가 기도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대로 숙소를 옮겼더라면 부흥회를 인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1개월 동안 금족령이 해제 될 때까지 그 집에 갇혀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버터 필드 박사는 숙소를 옮기는 사소한 일이었지만 그것마저도 하나님과 상의했기 때문에 무사히 집회를 마칠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모든 것을 기도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지시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그는 이렇게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깜짝 놀랄 메시지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이방인이면서도 그 어떤 선택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보다 더 놀라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고넬료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잘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10:1-2)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라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는 자기 스스로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기록한 누가라는 제자가 객관적으로 보고 기록한 내용이기에 고넬료의 이와 같은 멋진 영적 모습은 객관적인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우리들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종이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목회에 헌신하면서 가장 이 땅에서 멋진 사람은 이처럼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돈이 많은 사람도 있고, 지식이 높은 사람도 있으며, 세상 권세를 다 가진 사람도 있고 빼어난 미모를 가진 사람도 있으며, 온갖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고귀한 인물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 종이 보고 느낀 가장 훌륭한 사람은 바로 이처럼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름 없는 한 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라는 사람은 이방인으로서 선민이었던 유대인들의 말 상대도 될 수 없었으나 이처럼 당당하게 성경에 기록 되어 영원히 남는 복을 누리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이 증거 하는 대로 그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고넬료를 중심으로 기도로 승부하라!”는 제하의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체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로 승부하라!

사도행전이 기록된 그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오래 전 미국에서 흑인들을 백인들이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과 같았습니다.

(4: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넬료는 그 어떤 유대인들로부터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시기 위해 베드로에게 특별히 임재하시고 환상을 통해서 친히 역사해 주셨던 것입니다.

(10:9-16)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비록 고넬료가 이방인이었지만 그 집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만큼 고넬료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 위해 베드로를 특별하신 방법으로 설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고넬료가 어떻게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이토록 초자연적인 역사를 동원하실 만큼 기적 같은 응답을 주셨을까, 하는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함께 배우면서 도전을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넬료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은 그만큼 관계가 믿음으로 아름답게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역으로 설명하면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드려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면 그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1:15-17)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들의 기도가 기적 같이 응답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과 관계회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이와 같은 모든 문제점들을 사전에 차단하고 자신만 아니라 온 가족들이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들 자신도 중요하지만 가족들이 다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친히 복을 받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112: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그 기도가 응답되기를 원한다면 고넬료와 같이 온 식구들이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지향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 드리는 기도는 공기만 울리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이웃들을 많이 구제하였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신비로운 체험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들의 그와 같은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그 방법과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5:34-40)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그 하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이웃들과의 관계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이웃들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이 어려울 때 도와주고 외로울 때 친구가 되어주며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고 도와주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해 드린 것과 같은 인정을 받는다고 가르쳐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의 현실 속에서 거의가 이처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잘 섬기는데 이웃을 학대하거나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기도한들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유대인들 중의 하나인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18:10-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 속에서 바리새인들의 의는 참으로 오늘 우리들을 능가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며 소득의 십일조를 정확하게 바쳐드리며 토색 불의 간음 같은 죄를 절대로 저지르지 아니하는 선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는 받아주시지 아니하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죄인들의 기도를 받아주셨을까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 아무리 의롭게 잘 산다 할지라도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악을 행하면 그런 자들은 이미 하나님께 악을 행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진정한 신앙인들이고 또한 우리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이웃들과의 관계 회복에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들을 섬김이 바로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23일 토요일은 우리교회의 여름 어린이 성경학교가 끝나는 날이었습니다. 3시 경에 나흘 동안 계속된 성경학교를 끝내고 4시부터 일식당에서 일을 한, 한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그 전날 밤엔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서 밤을 지냈으니 더욱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직장에서 부르니 할 수 없이 4시부터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날따라 매우 까다로운 백인 부부가 왔습니다. 평소에는 쉽게 경험해 보지 못할 만큼 그들은 까탈스러웠고 매니저까지도 몇 번씩이나 불려 가야만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불평이 많을 수가 없었고 요구사항이 많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테이블을 나흘 동안 성경학교를 하고 파김치가 된 그 집사님이 맡게 되었으니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들이 주문한 식사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여 집사님의 손을 붙잡고 같이 기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청산유수로 기도를 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을 겪은 여 집사님은 너무나도 당황하였고 다른 직원들이 어떻게 그 사람들을 보았을까 오히려 자신이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매니저를 몇 번씩이나 불러들이며 식당을 온통 뒤집어 놓고 식사가 나오자 젊잖게 그것도 자기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전까지도 종 부리듯 하인 취급을 하던 그 손을 붙잡고 기도를 하는 것이라니...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돌발 상황에 엄청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들이 진정한 성도들이고 때를 따라 기도를 드릴 정도의 신자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성도들의 기도는 결코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25:41-46)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웃은 곧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들에게는 무관심하고 하나님께는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표리부동한 신앙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실제로 만 명 정도 모이는 대형교회에서 이와 같은 부끄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에 초라한 홈리스 한 사람이 이 대형 교회 입구에 앉아서 먹을 것을 좀 달라고 간절하게 구걸을 하였습니다. 만 명이라는 엄청난 성도들이 하나 같이 그 거지를 지나쳤습니다. 오직 세 사람만이 관심을 가지고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지나갔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빈손에 돈을 쥐어 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배가 시작 될 무렵 그 거지가 성전의 맨 앞자리에 가 앉았습니다. 하지만 앉기가 무섭게 예배위원들의 손에 끌려 나왔습니다. 할 수 없이 맨 뒷자리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광고 시간이었습니다. 사회자가 말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하셨습니다. 스티펙 목사님, 어디에 계십니까? 앞으로 나와 주시지요...” 온 성도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스티펙 목사님을 두리번거리며 찾았습니다. 바로 그때 맨 뒷자리에서 거지가 일어나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 강대상에 섰습니다. 순간 만 여명의 성도들은 아연질색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바로 그들이 몇 분 전에 그렇게도 무시했던 그 거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스티펙 목사는 일부러 그 교회 교인들의 신앙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거지로 꾸미고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성도들에게 담대하게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의 많은 성도들을 보시지 않습니다. 화려하게 잘 꾸며진 환경도 보시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을 닮아 있는지를 보십니다. 믿음은 이웃을 향해 행동하는 능력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새롭게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미주크리스챤신문 416일자에 게재된 것을 발췌한 것입니다.

고넬료는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누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회복하고 있는지, 누가 이웃들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것은 각 성도들의 개인적인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이렇게 바른 신자로서의 자세를 갖추고 있는지의 유무를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각 성도들의 기도생활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아무리 이웃들을 자신의 몸과 같이 섬긴다고 해도 기도생활이 이를 뒷받침 해 주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다 헛수고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만큼 기도는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가장 객관적이고도 영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중했던 모든 베네핏을 배설물과 같이 과감하게 버리고 평생을 한결 같이 예수님만 쫓아 살았던 사도 바울의 영적인 모습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 바로 이와 같은 기도에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살전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는 말씀이 바로 사도 바울의 삶이 어떠하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어찌 하나님 없이 항상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어찌 하나님 없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기에 기도는 그렇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죠지 뮬러는 평생에 5만 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역사가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였으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면 기도 응답을 5만 번 이상이나 받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기도에 관한 이와 같은 말씀만 들어도 한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삶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와 같은 기도를 회복하여야 하겠습니다. 험하고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기도하는 것 외에 능력을 받을 길이 없고 삶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 구약 성경에는 우리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많은 소중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중에 흠이 없이 완전하게 살았던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평생을 통해 흠이 없는 인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흠이 없는 일생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묵상해 보다가 하나의 해답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통해 기도를 쉬지 않고 하나님을 만났던 인물이었습니다.

(삼상12:23-24)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자식이 없어 눈물을 흘리던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과 같은 위대한 아들을 허락해 주셨고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땅에 3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하셨다가 그가 다시 기도한 즉 비를 다시 내리시기까지 역사해 주셨던 분이 바로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우리들도 고넬료와 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그래서 기도로서 하늘의 문을 열고 기도로서 험악한 이 시대를 승리하는 멋쟁이들이 되십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으로서 당시 유대인들의 대화상대도 되지 못했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굴하지 아니하고 꾸준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불쌍한 이웃들을 많이 구제하며 늘 기도에 힘쓰다가 마침내 기적을 보는 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성령 충만을 받았고 또한 사도들로부터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인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0:44-48)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기도는 모든 통념과 불가능과 차별을 뛰어 넘어 이처럼 기적을 만들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들도 고넬료와 같이 온 가족들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불쌍한 이웃들을 구제하며 항상 기도에 열심을 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짧은 인생 인본주의로 현실에만 만족하며 살다가 영원한 구원을 잃어버린다면 그 보다 더 불쌍한 인생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도 예배자로 구별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시는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6731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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