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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You are here: Home 말씀과예배 설교 읽기 2016년 10월 16일 주일낮설교 (위로하시는 하나님)

2016년 10월 16일 주일낮설교 (위로하시는 하나님)

위로하시는 하나님

10. 16, 2016

本文:고린도후서1:1-11

:

 

포르투갈의 구 도시 포르트(Porto)에서 지금도 운영 되고 있는 작은 Bar가 하나 있는데 이곳은 여행하는 여행객들을 가이더들이 반드시 안내를 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 바는 아래 위층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층에서는 커피를 팔고 위층에서는 도서관처럼 책을 진열하고 있습니다. 아래층에서 커피를 들고 올라와 위층에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설계된 운치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곳이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이유는 바로 이 바에서 그 유명한 해리포터를 쓴 작가 조앤 롤링이 남편과 함께 자주 와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1991년 이곳 포르트에서 영어 교사를 하던 중 텔레비전 저널리스트인 죠지 아란테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2년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결혼 다음 해에 딸 제시카가 태어났지만 남편과의 불화로 4개월 된 딸을 데리고 포르트를 떠나 영국으로 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무일푼으로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의지할 데가 없게 되자 여동생이 사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로 가 그곳에서 간신히 기초생활을 유지하며 지나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여의치 않아 그녀는 다시 어린 딸을 데리고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미혼모에게 주는 정부의 기초생활비로 일당 15불을 받으며 근근이 연명해 나갔습니다. 너무나도 사는 것이 비참하여 자살을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세상모르고 자라나는 어린 딸 제시카를 바라보며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러면서 대학 때부터 시작하였던 글쓰기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 글을 출판해야 하는데 12곳의 출판사를 찾았으나 무명 여인의 그 글을 선뜻 출판해 주겠다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출판사 대행업을 하는 작은 업체를 만나 간신히 그 책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책은 출판 되자 말자 불티나게 팔려나갔습니다. 얼마 후에는 그 책이 영화로도 만들어 졌습니다. 책이 무려 전 세계에서 45천 만부나 팔렸습니다. 그녀의 재산은 2010년 현재 1169억 원이나 되었습니다. 2013년도에는 영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3위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를 버렸던 조지 아란테스에게는 땅을 칠 일이 일어 난 것입니다. 자기의 여인이 18년 후에 억만 장자가 될 줄 알았다면 결코 그런 여인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그 어떤 환경에서도 쉽게 삶을 포기하거나 사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앤 롤링이 그토록 어려울 때 무너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세상모르고 재롱을 부리며 품안에서 성장하고 있는 딸 제시카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그와 같은 딸이 없었더라면 조앤은 혼자서 절망하고 지친 나머지 자살을 하고 이 세상을 떠났을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이와 같은 절망의 나락에서 허덕일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때를 만난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조앤에게 있었던 제시카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한결 같은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위대한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서 지친 우리들을 지켜주십니다. 외로운 우리들을 안아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보니 우리 하나님은 지친 우리들을 위로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고후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고 그와 같은 놀라운 위로를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좋으신 우리 하나님을 기대해야 하겠습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 모두는 힘들고 어려울 때 이처럼 가슴 후련하게 도움이 되는 위로 자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제법 친한 것 같고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았으나 실제로 삶 속에서 절망하고 상처 입고 낙심하여 쓰러지고 나면 찾아 갈 곳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음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설령 그렇게 위로해 주는 사람이 기적 같이 있다 할지라도 말에 붙은 위로 일뿐 실제적으로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결국 인생일 뿐이고 우리 자신이 지고 있는 짐조차도 해결하지 못한 채, 무게가 조금 다를 뿐 저마다 자신의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잘 나가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모든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그런 초일류로 세상을 누리고 살아가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과 같이 버리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작은 자로 그렇게 한 평생을 외롭고도 힘들게 살아 갔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고상하고 커서 그 사랑에 화답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가 이를 위해서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고백한 그의 삶의 고통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후11:23-27)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사는 날 동안 당한 고통과 절망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지금 우리들에게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고후1:3-6)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는 이처럼 짧은 4절의 말씀에서 위로라는 말을 9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실로 차원이 다른 사람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도 오늘 우리들과 똑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인데 그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살아가는 모습은 전혀 오늘 우리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하는 놀라운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는 주님 한 분 섬기는 일로 이처럼 모진 고통과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가 섬기는 하나님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으로 정의하고 그리스도의 위로가 우리들에게 넘친다고 선언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고난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그 모든 어려움을 견뎌 낼 수 있도록 이처럼 위로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사람은 사람이로되 전혀 다른 사람인 것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삶의 문제가 넘쳐나고 지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위대한 가치관과 믿음을 전수 받아 바울처럼 이겨내고 승리하는 그런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환난 가운데서 위로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똑 바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일생을 바쳐 그 하나님을 쫓아갔던 것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그는 하나님께 일생을 바쳐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분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결코 그는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쫓아 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하게 하나님을 알고 그러한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하고 쫓아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알고 있었던 하나님은 과연 어떠한 하나님이셨을까요? 오늘 본문 3절 말씀이 바로 이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고후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라는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가 확신하고 있었던 그의 하나님은 바로 이처럼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과연 어떤 때에 위로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까? 그 해답은 4절에 정확하게 기록 되어져 있습니다.

(고후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는 말씀과 같이 모든 환난 가운데서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을 것만 같은 그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고후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당하는 환란과 고통 가운데서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이 더 이상의 소망이 없는 그러한 극한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던져 주시는 그 놀라운 위로로 이겨내고 승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처럼 힘들고 어려운 환난이 있을지라도 이겨내야 하고 견뎌 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들을 그와 같은 한경에 처해 있는 줄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우리들을 위해로 주시는 가슴이 따뜻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Dean Cromwell이란 미국 남 켈리포니아대학 육상 코치는 36년간 코치로 있으면서 21명의 전국 선수권 대회 우승자를, 13명의 세계 기록자를, 다수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했는데 그 핵심이 되는 비결은 "격려"의 힘을 사용, "위로자"가 되는 것이 그 비결이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심어주는 것이 최상입니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 2018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전에서 우리 한국 국가 대표 팀이 이란에게 0:1로 패해 월드컵출전이 좌절 위기에 빠지자 감독인 슈틸리케는 선수들이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에는 카타르의 소리아 같은 스트라이커가 없다. 그래서 잘 안 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다른 나라 선구들과 비교한 것으로 선수들에게는 사기를 떨어뜨리고 백성들에게는 실망을 주는 지도자답지 못한 자세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는 대한민국에서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선수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좋지 않는 비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위기와 환난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사람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위로해 주십니다. 그리고 능력과 따뜻한 사랑의 손을 다시 내밀어 주십니다. 이것을 사는 날 동한 경험하였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고백할 수 있도록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들을 환난 중에서도 위로하시며 다가 서 주시는 것일까요? 이유는 단 하나 연약한 우리들이 낙심하지 아니하고 또 다시 소망으로 힘차게 일어서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소망에 굳게 서도록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낙심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굳굳하게 일어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다윗과 같은 신자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연약함을 위로하시고 환난에서 지키시며 한없는 사랑으로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고후1: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신자와 불신자는 바로 여기에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답답하여도 신자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그런 성도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다윗을 보면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은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서 이스라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는 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그와 같은 다윗을 질투하고 시기한 나머지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군사 3천을 이끌고 다윗을 죽이려고 이스라엘 온 나라를 뒤지며 추격해 갔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그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하겠습니까?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고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 싸워 나라를 구원한 죄밖에 없는데 잡아 죽이지 못해 혈안이 된 왕을 어떻게 이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절망하거나 낙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의지했습니다.

(23: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환경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고난을 견뎌내니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그 악한 사울을 제거하시고 다윗을 그 왕위에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온 몸으로 경험한 다윗은 훗날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놀라운 고백을 남겨 두었습니다.

(37: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믿던 믿지 않던, 그리고 우리들이 알던 모르던 우리 하나님은 고통과 환난 속에서 우리들을 위로하시며 지켜 주십니다. 이는 오직 하나 우리들로 하여금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기차를 타고 미국 조지아 주의 어느 조그마한 도시를 지나면 수선 가게의 벽에다 슬픔에 잠긴 마음을 제외한 모든 것을 고칠 수 있음이라고 쓰여진 큰 간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간판은 약간 과장이 있기는 해도 영리한 선전이었습니다. 이 간판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절망과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치료할 방법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슬픔이 하루하루의 삶을 어둡게 하고 절망 속에 빠지게 할 때, 우리는 어디에서 위로와 구원을 얻어야 합니까? 친구나, 가족이나, 직장 동료의 보편적인 지혜가 효과적인 치료 방법을 제시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해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비탄에 젖은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들을 보살펴 주시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벌써 무엇을 하셨는가를 보기만 하면 됩니다. 큰 슬픔에 잠긴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하여 친히 천국의 좋은 환경을 버리시고 하나님의 외 아들이시면서도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므로”(4:15),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되 온 몸으로 겪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은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147:3)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만일, 당신이 지금 뼈를 깎는 듯한 슬픔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55:22)는 말씀을 붙들고,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당신의 슬픔을 쏟아 놓으십시오. 그 분만이 고통 받는 당신의 영혼을 달랠 수 있으며, 당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낫게 하여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처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하지만 이 세상에는 절망에서 붙들고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의 줄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낙심한 나머지 소중한 생명조차도 포기하고 마는 자살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혼 후 홀로 키우던 아들·딸을 살해하려 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으려 한 40대 남성이 법원으로부터 실형을 선고 받았다.

[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2(부장판사 이동욱)는 생활고 등을 이유로 두 아이를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둘 다 미수에 그친 혐의(살인미수)로 기소된 전모씨(46)에게 징역 26월을 선고했다고 14일 밝혔다. 전씨는 지난 627일 서울 송파구 자신의 집에서 11살짜리 딸, 8살짜리 아들에게 수면제 등을 먹여 재운 후, 연탄난로에 불을 피워 가스를 마시게 해 죽이려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다행히 이날 전씨의 범행은 이혼한 아내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불이 꺼지면서 제지됐다. 법원에 따르면 전씨는 사업실패로 빚 독촉 등을 받던 중 지난해 12월 혼자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아내와도 불화가 심해져 두 아이를 전씨가 양육하는 조건으로 지난 6월 결국 이혼했다. 이혼 후 전씨는 재결합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별다른 수입 없이 양육에 어려움을 느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차라리 다같이 죽자고 마음 먹은 것. 재판 과정에서 전씨는 "아이들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내 방에서 혼자 죽으려고 했다"며 혐의를 부인했으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혼자 죽으려 했다면 밀폐된 공간에서 혼자 연탄난로를 켰어야 했는데 현관에 불을 피워놓고 애들을 재웠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수면제를 먹여 일어나지 못하도록 했다"며 살해 고의성을 인정했다. 이어 "아버지로서 아이들을 보호·양육할 의무가 있음에도 되레 살해하려고 했다. 아이들의 정신적 충격도 상당하다""재범위험성도 상당한 것으로 보여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전씨를 상당기간 격리할 필요가 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범행이 미수에 그쳤고, 사업실패와 이혼, 우울증 등 범행동기에 다소 참작사유가 있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덧붙였다.](20161014일자 동아일보에서 발췌)

감사하며 살도록 위로해 주십니다

진정한 감사는 고통에서 해방 되어 봐야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체험해 봐야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소망으로 노래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로하시며 우리들의 삶이 이처럼 감사로 가득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삶의 모든 고통을 온 몸으로 겪고 나서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위로하시며 복된 소망으로 인도해 주셨으니 감사드린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도 그와 같이 감사드리는 심령이 되기를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위로를 기대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고후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성도들의 최후의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처럼 엎드려 하나님의 그 풍성한 은혜에 감사를 드릴 때 비로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성도들의 최후의 열매인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감사를 잊은 성도들은 원망하게 되고 불평하게 되며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는 결단코 감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이 세상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하여 성경에 기록하여 남겨 두었습니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신 뜻이라는데 무슨 변명을 더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결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지니고 삶의 무게에 날마다 눌려 있는 부족한 심령들입니다. 이것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래서 우리들을 이처럼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위로가 없이는 우리는 단 하루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불행한 사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위로를 오늘 우리들의 마음이 둔하여져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와 같은 위로를 깨닫는 심령들이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의인이 되며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골목길에서 놀다가 친구가 던진 돌에 눈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부모는 현장에 달려가 소년을 안고 병원으로 갔으나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두 눈은 실명되었으며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 고 하였습니다. 그때 소년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비록 눈은 잃었지만 아직 머리는 남아 있잖아요."라고 말입니다. 이 소년이 바로 시각장애자로서 영국의 경제학자요 캐임브리지대 교수, 국무위원을 지낸 헨리 포세트(1833-1884)경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우리들에게 어떻게 다가오시는지, 보다 더 자세히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다행히도 오늘 본문 말씀은 이에 대한 정확한 진리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엄청 놀라운 위로로 우리들을 찾아오시고 인도하신다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무려 9번이나 위로라는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들을 위로하시고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또한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환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품고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정도로 성숙하고 믿음으로 무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환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소망을 품고 살고 싶지 않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모두 다 감사하며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를 모르기 때문이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며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사모하고 예배에 올인하며 믿음의 길로 자신을 연단하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선택이 아니라 삶의 필수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도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위로를 알았기 때문이요 또한 삶 속에서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깊은 소망을 품고 끝까지 그 하나님을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로 막연하고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하나님을 믿음으로 가슴에 품고 그 하나님의 위로를 온 몸으로 느끼며 그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감사드리며 기대하는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하라고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들을 거룩한 예배자로 불러주시고 구별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도 우리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고 말씀으로 무장하여서, 위로의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진정 살아 있는 영혼들이 다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주후 201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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