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6일 주일낮설교 (그 아홉은 어디 있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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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 설교 읽기
- Published on Sunday, 06 November 2016 00:00
- Written by 최인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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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1. 6, 2016
本文:누가복음17:11-19
說敎:崔 仁 根 牧師
감사의 달 11월입니다. 똑 같은 여건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감사를 드리고 어떤 이들은 불평을 합니다. 과연 무엇이 사람을 이처럼 극명하게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없는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진정한 감사가 없습니다. 그들은 좋은 일은 자기의 공로이고 나쁜 일은 남의 탓으로 돌리는 지극히 이기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하여 그 인격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면 만사가 다 감사한 것뿐입니다. 그들은 좋은 일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으로 돌리고 나쁜 일은 자신의 부족한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예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그것이 바로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의 자화상을 그대로 기록해 놓은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고침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당대에 가장 저주 받은 병으로 알려진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 달린 매우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열 명 중에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아홉이라는 절대다수가 예수님께 감사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은 오늘 인간들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단적으로 고발하는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오늘 우리 자신을 한 번 타진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과연 아홉과 같은 사람인지? 돌아와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를 드린 그 한 사람인가를 말입니다. 우리 속에서 이처럼 주님께서 기다리시는 감사가 없다면 우리는 결코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상실한 사람은 결국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인본주의와 자기중심주의에 빠진 육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본문으로 돌아가 우리들의 모습을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고 감사로 제사를 드리며 하늘의 구원을 목도하는 그런 복된 영적인 사람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3년 동안의 공생애 동안 잠시도 그냥 머물러 계시지 않고 좁은 이스라엘 땅을 종횡무진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불쌍한 인생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어느 날도 이스라엘 땅을 두루 다니시다가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통과하시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던 중 한 촌으로 들어가시게 되었는데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 촌이 문둥병자들을 수용하고 있었던 소록도와 같은 곳인 것 같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를 한꺼번에 만났다는 말씀이 이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라 문둥병자들은 격리 되어 집단 수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한꺼번에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동시에 부르짖었습니다. “
(눅17:12-13)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붙들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안타까움을 보시고 선한 마음으로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도 무서운 질병에서 기적 같은 회복을 받았는데,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놀라운 치료를 해 주셨는데, 단 한 사람 외에는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드린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안타까우셔서 물으셨습니다.
(눅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고 말입니다. 이 한 말씀 속에는 언제 그랬더냐 는 식으로 나음을 입고 각자 자신의 길로 돌아 가버린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묻어나옵니다. 과연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자문해 보면서 오늘의 말씀을 경청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배움과 깨달음으로 우리들에게 또 다시 기회로 부여하신 감사의 달 11월을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지난 8월 한 달 동안 하나님께서 정의 해 놓으신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공부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제아무리 잘나고 성공했다고 해도 우리 인생들의 본질은 질그릇과 같고 풀과 풀의 꽃과 같으며 안개와 같고 나그네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오늘 우리들의 실상입니다. 이는 어느 한 사람의 연구 결과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집대성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을 만드신 하늘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기에 이의가 없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 등장한 열 명의 문둥병자들을 만나보게 됩니다. 그들의 삶이란 그 자체가 공허합니다. 일단 문둥병에 걸리게 되면 사랑하는 가족들과 정든 사회와 이웃들을 다 떠나 문둥병자들만 집단 수용하는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곳이 대한민국에서는 소록도입니다. 거기에서 치료를 잘 받고 나았다 해도 그들은 부모형제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들의 일그러진 모습이 스스로도 용납이 안 되고 사회적인 공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양성에서 회복이 되어 음성으로 판정을 받으면 음성나환자촌으로 밖에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들이 병에서 회복을 받았어도 이미 코나 입술이나 귀나 얼굴의 많은 부분들이 뭉그러져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요 손과 발에도 형언할 수 없는 상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와 같은 그들만의 세계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종이 어렸을 때에도 부산에 이와 같은 음성나환자촌이란 곳에 가 보았는데 그곳에는 어린이나 젊은 사람들이나 성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보기에도 끔찍한 그들만의 세계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끼리 양계장을 운영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문둥병자는 문자 그대로 저주 받은 더 이상의 소망이 없는 그런 무서운 질병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의 DNA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들의 인생도 겉보기에는 건강한 것 같고 화려한 것 같고 성공한 것 같으나 결국은 문둥병자와 같이 소외되고 외롭고 병들고 상처 입으며 서서히 망가지다가 이 세상을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스라엘의 최대 지도자였던 모세는 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탄식하였으며 이스라엘의 3대 족장이었던 야곱은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고백하였겠습니까?
(시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창47:9)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늘 가슴에 새기며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고 또한 상담을 받게 됩니다. 많은 경우에 특별히 젊은 청년들 중에서 비슷한 그들의 고민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목사님, 저는 너무 연약한 것 같아요. 매사에 자신감도 없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많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미래에 희망이 있을까요?” 하는 식입니다. 이것은 못난 어떤 특정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다치기 쉽고 상처 입기 쉬우며 질그릇 같이 쉽게 깨어지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모다 더 강한 절대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무를 한 번 보십시오. 새롭게 연한 순이 나오고 새로운 가지가 나올 때 그 얼마나 연약해 보이고 보잘 것 없어 보입니까? 하지만 그것이 나무라는 몸통에 붙어 있는 한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눈에도 보이지 않게 강하여져 가고 결국은 하늘을 찌를 듯한 거목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친히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무와 가지에 비유하여 말씀하시고 그 가지가 비록 약하지만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많은 열매를 맺히게 된다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소망도 없이 격리 되어 신음하던 열 명의 문둥병자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진배없음을 깨닫고 살리시는 영이요 회복하시고 인도하시는 영이신 성령님의 동행하심을 기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열 명의 문둥병자들과 같이 아무런 소망도 내일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에게로 가던 문둥병자들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망도 없이 사람과 같은 대우도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죽음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던 그들에게 놀라운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눅17: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회입니다. 그들은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다는 소식을 그들은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나자 말자 부르짖으며 달려 나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허망한 우리 인생 여정에 예수님 밖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꿈에도 예수님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귀로만 듣던 예수님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고 온 몸으로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와 같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리를 높여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눅17: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렇게도 소망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만나자 말자 주저 없이 외쳤던 것입니다.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매달렸던 것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14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보시고 가라사대”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그들을 보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을 보셨을까요? 그들이 그렇게도 소리소리 외쳐 예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소망 없이 문둥병자들과 같이 기약 없는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명예가 아니라, 출세와 성공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문둥병자들과 같이 부르짖으며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오늘 본문 말씀에서만 나타나는 방법이 아닙니다. 사도 마가도 동일하게 예수님을 만나는 길을 똑 같이 부르짖는 소경을 통하여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막10:46-49)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 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 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 짧은 인생에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아파야 의사를 찾듯이 인생 여정에서 작은 자로 추락하고 실패하고 병이 들어봐야 절대자를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임한 고통과 아픔과 연약함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깨닫고 소경과 같이 열 명의 문둥병자들과 같이 오늘 우리들도 부르짖고 소리치며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처럼 예수님을 찾고 부르짖고 구하게 됩니까? 두 말 필요도 없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이처럼 예수님을 구하고 찾을 만큼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다음과 같은 말씀에 있습니다.
(눅17:14-15)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르짖으며 예수님을 찾아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 어떤 치료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손을 대고 어루만지시며 고쳐주시든지 끌어안고 기도하시며 고쳐주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들을 그 자리에서 고쳐주실 줄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모션도 취하시지 않았습니다. 기도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환부를 어루만지시며 고쳐주시지도 않았습니다. 다면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 한 사람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원망하지 도 않았습니다. 왜 여기에서 고쳐주지 않느냐고 항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기 위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은 바로 거기에서 나타났습니다. 길 가는 도중에 나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입니까? 무조건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행동하다가 기적을 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믿음에는 원망이 없습니다. 믿음에는 따지는 것이 없습니다. 무조건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들로 바로 이와 같은 기적을 만들어 내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것 또한 오늘 본문에만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의 전 사상이요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의 순종만이 기적의 원천임을 성경은 명명백백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요2:7-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손이나 발을 씻는 돌 항아리의 물일지라도 예수님께서 포도주 대신 떠다가 주어라고 하시매 그대로 믿고 순종하여 떠다 주었더니 그 물이 변하여 양질의 포도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단순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적은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돌아온 그 한 사람과 같은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들은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하여서 객관적으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 온 몸이 깨끗하여지고 그 지긋지긋하던 문둥병에서 해방이 되었다면 그 다음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자신들을 고쳐주신 이가 예수님이신 줄 뻔히 알고 있는데 그 예수님께로 달려가서 엎드려 감사부터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열 명 중에 이렇게도 당연한 감사를 드리러 찾아 온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 주님의 마음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오직 그 한 사람 외에는 그것도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이방인이요 사마리아인이었던 그 한 사람 밖에는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드린 자가 없었다는 사실에 오늘 우리들의 도전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일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만이 우리 인생 삶의 본질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감사는 성도의 본분과 인간의 사명을 다하는 가장 중요한 영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열 명 중에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와 기본적인 본분을 다 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자연스럽게 “난 아니야!”라고 치부하고 지날 것이 아닙니다. 9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하지 못했다면 우리들도 그 90%에 해당할 수 있음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을 가지고, 기도하며 노력하며 삶 속에서 감사가 매일의 생활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도 안타까우셔서 되물었습니다.
(눅17:17-1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부르짖고 외치는 소리를 가슴에 담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우리를 긍휼이 여기소서!” 하는 안타까운 그들의 소리를 가슴으로 들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두 말 않고 깨끗이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다 주님을 떠나 제 갈 곳으로 먼저 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과 이 마음을 가슴에 담아두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절대로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거나 서운하게 해 드려서는 안 된다고 입술을 깨물며 새기고 또 새겨야 하겠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은 곧 감사를 상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는 빼어난 것이 없을지라도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이방인과 같이 예수님에게만은 인정과 사랑과 축복을 받는 그런 멋진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와 감사로 사례하는 이 이방인에게 결코 빈손으로 돌아가도록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눅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는 말씀과 예수님은 찾아와 사례하는 이 이방인에게 영육간의 구원을 선포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마땅히 우리들이 해야 할 감사를 드리는데도 결코 그냥 보내지 않으시고 이처럼 놀라운 축복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2016년 감사의 계절이 다가 왔습니다. 감사는 절기 행사가 아닙니다. 365일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가진 것 중에 예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들은 아홉 명의 치료 받은 문둥병자들과 같이 감사를 잊어버리고 당연한 듯 자신의 세계로 되돌아 가버리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을 들을 기회를 허락하시고 잊었던 감사를 일깨우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심기일전 하여 잊었던 감사를 회복하고 오늘 본문의 내용을 거울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우리들의 자화상이 무엇인기 재인식하고 믿음으로 자는 영혼을 깨워서 감사로 채우는 놀라운 역사를 다시 한 번 더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기적 같은 은총을 베풀어 주신 예수님은 우리들이 돌아온 그 한 사람과 같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례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예배자로 부름 받아 하나님께 나아온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섬기며 그 은총으로 삶의 구원을 누리는 그런 멋들어진 심령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주후 2016년 11월 6일
주일 낮 예배 설교에서